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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82 : 고려의 역사 150 (제20대 신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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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82 : 고려의 역사 150 (제20대 신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10. 7. 01:10

 

 

 

한국의 역사 382 : 고려의 역사 150 (제20대 신종실록 3)

 

 

제20대 신종실록

(1144~1204년, 재위 1197년 9월~1204년 1월, 6년 4개월)

 

1. 늙은 왕 신종의 즉위와 최씨 무인정권의 성립(계속)

 

이렇게 소요가 이어져 정국불안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최충헌의 벼슬은 거듭 승진되었다. 1197년에 상장군에 오른 그는 같은 해 12월에 추밀원지주사가 되고, 1199년 12월에는 수태위상주국, 1200년 12월에 추밀원사와 병부상서, 어사대부 등을 겸임하게 된다.

 

또 이듬해 12월에는 태부참지정사 및 이부상서 판 어사대사 태자소사에 올라 조정의 병권과 인사권,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로써 최충헌은 장기집권의 토대를 구축하였고, 고려 왕실은 점점 힘을 상실하여 왕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선종은 이러한 최충헌의 독단을 그저 지켜보면서 비참한 상태로 왕위를 유지하다가 1203년 12월 등창으로 병석에 누워 이듬해 1월 태자 덕에게 선위하고 둘째 아들 덕양후의 저택에서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신종 실록의 사관은 신종의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고 있다.

"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임금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는 것과 임명하고 파직시키는 문제는 전부 최충헌에 의해 좌우되었다. 신종은 허수아비처럼 왕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나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신종은 개성 남쪽에 묻혔으며, 능호는 양릉이다.

 

신종은 선정왕후 김씨에게서 희종, 양양공 서, 효화공주, 경녕공주 등 2남 2녀를 얻었다.

 

선정왕후 김씨는 강릉공 김온의 딸이다. 그녀는 신종이 평양공으로 있을 때 결혼하여 1197년에 신종이 즉위하자 원비에 책봉되었다가 1200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204년 이들 희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에 책봉되었으며, 최충헌에 의해 희종이 폐립된 후 많은 고초를 겪다가 122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능호는 진릉이다.

 

신종의 둘째 아들 양양공 왕서는 신종 3년 1200년에 덕양후에 봉해졌다가 다시 양양공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1211년 최충헌이 희종을 폐할 때 강화도 교동현으로 유배되었다. 그에게는 위, 병, 인, 희 등의 네 아들이 있었다. 

 

 

경대승

경대승(慶大升, 1154년~1183년)은 고려장군이다. 본관은 청주이다.

 

1154년 의종 8년 중서시랑평장사 경진(慶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1168년 15세에 음서제도로 교위(校尉)가 되었고, 뒤에 장군이 되어 아버지 경진이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군대에 바치고 청렴하게 지냈다. 1170년 그의 나이 17세에는 정중부의 무신들이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추대하는 《무신정변》이 일어난다.

 

1178년 25세인 명종 8년 청주인들 사이의 분쟁으로 100여 명이 죽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심관으로 파견되었으나, 실패하자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1179년 26세에 당시는 무신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정중부(鄭仲夫) 일파의 무단 정치를 싫어함을 알고 그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을 결심을 하였다.

 

견룡(牽龍), 허승(許升)과 함께 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鄭筠), 사위 송유인(宋有仁)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기존의 최고 권력기구인 중방을 무력화 시키고, 새로운 권력 집단인 도방을 신설하였다. 관리등용에 있어 문신과 무신을 고루 기용하고자 하였지만, 반란에 참가한 무신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같이 거사를 일으켰던 허승과 김광립이 제거되었다.

 

1181년 28세에는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등의 무인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잦은 민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왔다.

 

1183년 명종 13년 무신정권의 제3대 독재자이며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을 창설하여 사병 100명을 거느렸지만, 집권 5년만에 3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이의민  

이의민(李義旼, ? ~ 1196년)은 고려의 무신이다. 본관은 정선이다. 베트남 리 왕조의 후손으로 귀화인 출신이었다.

그는 본래 안남국 리 왕조의 후손으로 5대조 이양혼이 베트남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로 망명하였다. 경대승이 갑작스럽게 죽자 집권하였다.

 

경주의 소금장수 이선을 아버지로 옥령사의 여종을 어머니로 하여 경주에서 태어났다. 이선의 세 아들 중의 한사람으로, 고조부 이시두는 고려에서 예의판서를 지냈지만 이후 몰락하여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키가 크고 힘이 세어 안찰사 김자양(金子陽)에게 발탁되어 경군(京軍)에 편입되었다.

 

수박(권투)을 잘 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가 1170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중랑장이 되었다.

 

1173년 김보당의 의종 복위 반란을 진압하여 대장군이 되고, 그 후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이 되었고 이 과정에 의종을 살해하고 시체를 가마솥 두 개에 넣어 연못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1179년 경대승이 정중부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인 경주에 있다가 1183년 경대승이 죽은 뒤에 다시 조정에 나가 판병부사가 되었다.

 

권력을 잡자 뇌물을 받고 백성들의 민가를 함부로 헐으며 논밭을 수시로 빼앗았으며 아들 이지영, 이지광, 손자 이진옥도 횡포가 심하기로 유명했다. 민가나 길가에서 여자를 함부로 겁탈하고 심지어 국왕 명종의 애첩까지 겁탈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명종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급기야 자신이 왕이 될 꿈마저 꾸며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 등과 힘을 합하여 고향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 부흥을 도모하려 하였으며 1193년 이의민과 내통하는 남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아들 이지순과 대장군 전존걸이 출병했으나 이지순이 오히려 이들을 도와주자 전존걸은 크게 한탄하며 자살해버렸다.

 

1196년 이른 봄 아들 이지영이 동부녹사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자 최충수는 이에 불만을 품고 형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 암살을 모의했고 음력 4월 8일,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말을 타려할 때 문 밖에서 대기하던 최충헌, 최충수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사후 머리는 참수되어 길거리에 효수되었으며 최충헌은 백존유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켜 3족을 멸하고 이지순과 이지광을 죽였으며 이지영은 해주에서 연회를 벌이다 장군 한휴에게 붙잡혀 죽었다.

 

이의민의 본관

이의민의 본관은 정선 이씨이다. 정선 이씨는 베트남 리왕조 연원을 안남 이씨의 한국 성본이다. 한국 안남 이씨의 상조 이양혼(李陽焜, 리 즈엉 꼰)은 베트남 안남국 리왕조 인종(이건덕, 李乾徳, 재위, 1072~1128)의 셋째 아들이자, 5대 임금 신종(이양환, 李陽煥, 재위, 1128~1138) 의 아우로 신종과 왕위를 다투다가 북송으로 망명하여 송나라 문하시중이었던 진(陳)씨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송나라 휘종(재위, 1100~1125) 때 금나라의 공격으로 북송이 쇠하고 남송으로 전환되는 1127년에 고려로 들아와 경주에 정착하고, 2세손 이시두(李君郁)는 고려 인종(재위, 1122년~1146년)에 예의판서(족보)에 올랐고, 6세손 이의민(李義旼)은 상장군, 종형 이희민(李羲旼)은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양혼의 9세손 이우원(李遇元)은 정선에 정착하여 본관을 정선으로 하였다.

 

이의민은 최근까지 경주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경주 이씨로 알려졌으나 본래 경주 이씨가 아닌 안남 이씨이고, 이우원(李遇元)이 정선으로 분파한 이후에, 본관을 정선으로 기록하였다. 이의민이 경주의 천한 가문 출신이라고 기술되고 있는데, 고려 시대 무신정권의 세력다툼, 후기 문신들이 전횡하는 상황속에서 의도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충(忠)이라는 유교적 가치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무신정권의 모든 인물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기술하였다. 현재에는 고려 왕조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무신정권에 거부감이 있어, 이의민, 최충헌, 최우 등의 무신정권 실권자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