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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81 : 고려의 역사 149 (제20대 신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381 : 고려의 역사 149 (제20대 신종실록 2)
제20대 신종실록
(1144~1204년, 재위 1197년 9월~1204년 1월, 6년 4개월)
1. 늙은 왕 신종의 즉위와 최씨 무인정권의 성립(계속)
신종은 왕위에 오르자 곧 이름을 탁으로 개명했다. 그의 초명인 민이 금나라 왕의 이름과 같다하여 바꾼 것이다.
그는 즉위 전날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름을 천탁으로 바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즉위 후 신하들에게 적당한 이름을 지어 바치라고 했더니 참지정사 최당이 '탁'자를 택하여 바쳤다. 그래서 신종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이름을 탁이라고 고쳤다. 또한 왕의 이름이 탁으로 고쳐지자 탁자 성을 가진 자는 모두 외가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고, 만약 본가와 외가의 성이 같으면 외조모나 친조모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다.
신종이 즉위하던 달에 최충헌은 상장국 주국에 오르고, 최충수와 박진재, 조영인, 기흥수 등의 측근들이 각각 응양군대장군, 형부시랑, 판이부사, 판병부사 등을 차지함으로써 최충헌 세력은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금나라에다 왕이 바뀐 사실을 통보하고 표문을 보냈는데, 금에서 찬탈의 의혹이 있다면서 몇 번에 걸쳐 사신을 보내 명종을 대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충헌 등이 명종은 요양차 아주 먼곳에 있기 때문에 30일 이상을 걸어가야만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하여 신종은 가까스로 금나라 왕의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종은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정 대소사의 모든 결정권은 최충헌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다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충헌은 이후 아우 충수와 함께 신종에게 '봉사10조'를 올려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새 궁궐에 들어가면 화를 당한다는 풍설 때문에 좁은 옛 궁궐에 있는 것은 옳지 않으니 왕이 새 궁궐로 이어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토지 관리 및 인재 등용에 관한 개혁안이 봉사 10조의 중심 내용이었다. 하지만 말만 그럴싸한 내용일 뿐 최충헌 세력 스스로가 이 개혁안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음으로써 어떠한 개혁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권력에만 눈이 멀어 각자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들끼리 알력이 생겨 마침내 치열한 힘싸움으로 이어졌다. 최충수는 최충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다가 최충헌에게 죽임을 당하고, 박진재도 후에 지나치게 권력을 확장시키다가 최충헌에게 양쪽 다리의 힘줄이 짫리는 형을 당하고 유배되어 죽는다.
최충헌은 이처럼 권력을 위해서는 혈육도 가차없이 죽이는 잔인한 모습을 보이며 독재정치를 구현해 나갔다. 그는 항상 3천 명 이상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평상복으로 대궐에 출입하였고, 자신의 안방에서 국가대사를 결정하여 왕에게 알리지도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에 일부 원로들이 반발 움직임을 보이자 최충헌은 1199년 6월 평장사 최당, 이술유 등을 치사(벼슬을 중단시키는 것)케 하여 본인들의 청원없이 약 20여 명의 대신들을 강제 퇴직시켰다.
이 같은 그의 권력 독식은 고려 사회를 극도로 부패시켰고, 백성들은 권력층의 횡포와 굶주림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그러면서 명종 대에 시작된 민란이 곳곳에서 발생하여 온 나라가 전쟁터로 전락해갔다. 1198년에는 최충헌의 종 만적이 난을 일으켜려다 실패하였으며, 1199년에는 명주(강릉)에서 도적이 일어나 삼척과 울진 두 현을 함락시켰고, 동경(경주)에서도 도적이 일어나 명주현의 도적과 연합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또 1200년 4월에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같은 달에 밀성의 관노 50여 명이 관가를 습격하고 운문에서 일어난 난민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동경(경주)에서 이의민의 친족들과 동경 아전들이 싸움을 벌여 동경의 방수, 별장, 통인들이 모두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김해에서는 하층민들이 호족들의 횡포를 참다못해 반란을 일으켜 호족들을 내쫓고 관아를 포위하면서 관군과 대치하기도 하였다.
이에 신종은 낭자 오응부와 합문지후 송공작 등을 명주에 보내고, 장작소감 조통과 낭장 한지 등을 동경에 보내 도적들을 달랬다. 또한 최충헌은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 신종으로 하여금 죄수들을 대거 석방하도록 했으며,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았다.
하지만 1202년에는 탐라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 소부소감 장윤문과 중량장 이당적을 파견하여 가까스로 백성들을 무마하고 난을 주동한 번석과 번수를 처형하였다. 그리고 경주에서는 별초군이 운문의 난민과 동화사, 부인사의 승려들과 결탁하여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영주 별초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져 영주 백성과 경주 백성 간에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영주군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조정은 경주에서 계속되는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경주에 중앙군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감시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경주에서 패좌 등이 주동이 되어 다시 민란을 일으켰고, 조정은 김척후, 최광의, 강순의 등을 시켜 그들을 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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