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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9 : 고려의 역사 147 (제19대 명종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379 : 고려의 역사 147 (제19대 명종실록 8)
제19대 명종실록
(1131~1202년, 재위 1170년 9월~1197년 9월, 27년)
3. 명종시대의 반란들(계속)
망이.망소이의 난
조위총의 난으로 조정의 중앙집권적 통제력이 약화되자 가난과 수탈에 시달려 오던 천민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그 첯 번째 사건이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이다.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부패와 부귀영화를 누렸고 나라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던 무신정권의 암울하던 시절, 중앙의 통제력이 미약해지고 극심한 가난과 탐관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천민 집단이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주동이 되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는 서경에서 조위총의 난이 한창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조정은 조위총의 무리를 서적이라 하고, 망이와 망소이의 무리를 남적이라고 하였다.
굶주림과 권력층의 황포에 지친 명학소의 천민 망이와 망소이는 스스로를 산행병마사라 칭하며 봉기하여 공주를 함락시킨다. 하지만 조위총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정은 이들 민란을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지후 채원부와 낭장 박강수를 보내 난민들을 회유토록 했다. 하지만 난민들은 그들의 회유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조정은 대장군 장황재와 장군 장박인을 보내 군사 3천을 내주고 난민들을 토벌토록 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전투를 벌인 결과 난민들에게 대패하자 무력을 통한 토벌을 중지하고 다시금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현령과 현위를 파견하는 등 회유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망이와 망소이가 이끄는 난민들은 회유책을 거부하고 오히려 예산현을 공격하여 감무를 살해하고, 충주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등 점차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때 조위총의 난이 다행히 수습된 단계라 조정은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남적처치병마사로 삼아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한다. 이렇게 되자 난민들은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마침내 망이와 망소이가 정부군에게 강화를 요청했다. 이에 조정은 그들의 강화제의를 받아들이고 곡식을 나누어주는 등 천민들에 대해 화해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오래가지 못하는데, 정부군이 망이. 망소이 가족들을 체포하여버린 것이다.
정부군이 망이. 망소이 가족 체포는 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다시금 대대적인 민란을 유발했다. 이에 다시 궐기한 난민들은 덕산의 가야사를 점령하고 홍경원을 불태우는 등 개경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아산을 점령하고 청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청주목 관할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에 조정은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여 난민들을 공략하였다. 이 때문에 난민들이 완전히 포위되자 그들을 이끌던 망이. 망소이가 항복을 요청해 왔고, 1177년 7월 망이.망소이가 장세유에게 체포되면서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천민들의 난은 1182년 전주 관노들의 난으로 이어진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천민들의 행정구역인 '소'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일반 농민 반란과 다른 점이다. 이들 천민들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천민신분에서 벗어나는 한편 지배계층의 수탈과 횡포를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반란은 고려 사회의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스스로 인간다운 권리를 찿고자했던 일종의 신분해방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몸부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후에도 이러한 고려 사회의 신분질서는 철폐되지 않았고 고려가 망하고 이조가 들어서면서 조선은 유교가 정치. 사회에 근본 사상으로 자리메김하면서 양반과 상눔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 속에서 모든 것은 양반을 위해 양인, 중인, 천민 등 모든 백성들이 노예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회로 정착되고 말았던 것이다. 유교는 지배층을 위한 백성들을 옭아매기 위한 낙후된 봉건 사상체계로 이로인한 조선의 개혁과 발전은 영원히 사라졌다.
이러한 조선의 신분제도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보다 더 지독하고 폐쇄적인 신분제도로 결국은 명분과 허례허식에 세월을 허비하였고 양반 지배층의 비리와 부패, 탐관들의 백성 수탈은 강도를 더하였다. 결국 왕권이 미약하고 외척과 선비들이 권력을 주도하던 조선은 유교의 폐습으로 인해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효심과 김사미의 난
김사미의 난과 효심의 난은 1193년 각각 운문(청도)와 초전(울산)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이다. 이 난들은 각각 다른 곳에서 일어났지만, 같은 시기에 과거 신라의 중심 지역에서 일어난 것과 농민이 주동이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170년 이후에 무신정권이 성립되어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의 정권을 거쳐 이의민이 10년간 조정을 농락하던 시점에서 일어난 이 두 사건은 1176년에 발생한 망이.망소이의 난과 성격을 같이한다.
망이.망소이 난 이후에도 무신들의 하층민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 계속되자 고려의 기반계층인 농민들이 이반하기 시작하였고, 1190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농민들의 항거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193년 7월 경상도에서 대대적으로 농민들이 봉기하였던 것이다.
김사미와 효심이 주동이 되어 각각 운문과 초전에서 난을 일으키자 조정은 농민반란군 토벌전을 감행하였다 토벌대장은 대장군 전존걸이었으며.장군 이지순, 이공정, 김착후, 김경부, 노식 등이 부장으로 출전했다.
이 때 토벌대 지휘관으로 출전한 이지순은 당시의 실권자 이의민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김사미, 효심이 이끄는 반란군과 내통하였다. 이에 반란군은 이지순을 이용하여 식량과 무기를 구입하고 토벌대에 맞섰다.
이지순은 아비 이의민의 명령에 따라 농민군과 힘을 합쳐 신라를 재건한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 바람에 정부군은 쉽사리 농민군을 격파하지 못하였고, 농민군은 점점 세력을 넓혀 나갔다.
이처럼 이의민의 권력욕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정부군을 농락하면서 수 개월을 버티었다. 이 과정에서 이지순이 농민군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부군의 토벌대장 전존걸은 "만약 법으로 이지순을 다스린다면 그 아비 이의민이 나를 해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욱 기세를 펼 것인즉 장차 죄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라고 탄식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토벌대장을 다시 상장군 최인으로 교체되었고, 1194년 2월에 김사미의 농민군이,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효심의 농민군이 정부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무너지고 만다. 이의민은 그 즈음 이들과 내통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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