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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8 : 고려의 역사 146 (제19대 명종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378 : 고려의 역사 146 (제19대 명종실록 7)
제19대 명종실록
(1131~1202년, 재위 1170년 9월~1197년 9월, 27년)
3. 명종시대의 반란들
김보당의 난
이 사건은 1173년 8월 동북면 병마사로 있던 문신 김보당이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김보당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 했는데, 그의 반란 명분은 많은 호응를 얻어 동북면 지병마사 한언국이 반란에 가담하게 된다.
군사를 일으킨 김보당은 우선 녹사 장순석을 거제도로 보내 유배 중이던 의종을 경주로 인도해 나왔다. 이에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의방은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돌입하였고, 이의민을 경주로 보내 의종을 살해토록 지시했다.
정부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자 반란군은 열세를 면치못했으며, 그해 9월에 지병마사 한언국이 체포되어 죽고, 얼마 뒤 김보당과 녹사 이경직도 채포되어 사형당했다.
발발 2개월 만에 끝난 이 사건은 무신난 이후 문신계에 의해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으로 유배중이던 의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일이기도 하다.
김보당은 채포되었을 때 "문신 중에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진술했으며, 이 때문에 그나마 그때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많은 문신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 후 무신들의 기반은 더욱 탄탄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위총의 난
김보당의 난으로 많은 문신들이 주살되자 정중부와 이의방의 무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서경 유수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다. 1174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김보당의 난에 비해 규모가 매우 컸으며, 이 때문에 정부군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충청도, 경상도 일원에서 대대적인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서경 유수 조위총은 국왕을 폐립하고 문신을 학살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정중부와 이의방을 비롯한 무신들의 축출을 내세웠는데, 절령(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하여 동조하였다.
이리하여 고려군은 순식간에 개경군과 서경군으로 양분되었다. 이에 개경에서는 이의방이 평장사 윤인첨으로 하여금 토벌대를 이끌고 서경군을 치게하였는데, 약천후와 추위 때문에 서경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상은 핑계일 것이고 아마 서경군을 얕잡아보고 전투를 벌이다가 패하였는데, 변경 지역에서 상시 강한 전투력을 갖춘 북방의 군대가 전술적으로나 전투의지가 나약했던 개경군을 압도한 것으로 판단된다.
윤인첨이 대패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이의방은 서경 출신 상서 윤인미와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석재의 목을 베고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는 최숙을 비롯한 날랜 기병 수십 명을 서경군 진영 깊숙히 보내 적진을 교란시킨 다음 기습 작전을 펼쳤다. 이에 당황한 서경군이 후퇴하자 이의방은 그 여세를 몰아 서경군을 대동강까지 뒤쫓아갔다. 하지만 조위총이 전열을 가다듬고 수성작전을 펴자 싸움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시간이 갈 수록 혹독한 추위 때문에 더이상 성과가 없자 이의방은 군사를 이끌고 그만 철수하고 말았다.
그해 11월 이의방은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두경승을 후군총군사로 삼아 서경을 치게 하였다. 윤인첨은 조위총의 심복들이 연주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 연주로 향했다. 하지만 지난번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지라, 쉽사리 조위총을 공격하지를 못했다. 이 소식을 등은 명종은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 사유정을 반란군 진영이 있는 서경에 보내 전쟁을 그만 두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자 조위총은 일단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가 곧 이를 번복하였다. 이에 후군총군사 두경승이 연주를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니 서북의 여러 성이 뒤따라 항복하게 되었다.
전세가 이처럼 호전되자 윤인첨은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에 돌입하였다. 윤인첨에 의해 포위된 조위총은 김존심과 조규를 금나라에 보내 이의방이 왕을 내쫓고 시해한 일을 고발하려 하였다. 하지만 김존심이 도중에 조규를 죽이고 조정에 항복하는 바람에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조위총은 다시 서언을 금나라에 보내 정중부와 이의방이 의종을 시해한 사건을 고하게 하고, 절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금나라에 내속하겠다며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 왕은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로 압송하였다.
이처럼 금군 지원요청에 실패한 조위총은 정부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윤인첨과 두경승의 합공에 밀려 1176년 7월 난을 일으킨 지 22개월 만에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하지만 서경의 잔병들이 그 후 몇 년 뒤까지도 산발적으로 정부군과 싸움을 벌이면서 재기를 도모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조위총의 난은 무신들의 독재를 막고 국가 질서를 회복한다는 처음의 의도는 좋았으나 전세가 위태롭게 되자 외세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띠게 됨으로써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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