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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6 : 고려의 역사 144 (제19대 명종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376 : 고려의 역사 144 (제19대 명종실록 5)
제19대 명종실록
(1131~1202년, 재위 1170년 9월~1197년 9월, 27년)
2. 무신정권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계속)
그 무렵 서경 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이의방은 윤인첨으로 하여금 서경의 반란군을 토벌토록 하였다. 하지만 윤인첨이 반란군을 토벌하다가 서경군에게 대패하자 이의방은 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토벌군을 이끌고 서경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추위에 시달리다가 돌아오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의방은 윤인첨에게 다시 출전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선의문 밖에서 머물며 토벌대를 독려했다. 그런데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승려 종감과 모의하여 그를 살해함으로써 이의방은 어이없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의방이 살해되자 그의 측근들도 함께 제거되었다. 그리고 정권은 정중부 부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한때 이의방에게 밀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두문불출하면서 사직을 청하기도 하였던 그가 아들 정균의 활약으로 가까스로 정권을 다시 장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는 곧 시중 벼슬에 올랐고, 그의 아들 정균이 권력을 장악했다. 또 정중부의 수하인 이광정, 정종실, 송유인 등이 배경을 믿고 권력을 남용하였다.
이광정은 원래 사병 출신으로 정중부가 의종을 폐위할 때 도운 공으로 대장군에 오른 인물로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추밀원 원사가 되었다. 그는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죽였으며, 뇌물을 좋아하여 재산을 많이 축적했다. 하지만 평장사에 올라 있던 1184년 11월 명종이 팔관회 자리에서 "그대도 많이 늙었구려.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라고 하자 해직당할 것을 염려하여 괜히 사직을 청했다가 명종이 이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울며 겨자먹기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종실 역시 정중부의 수하로 반역에 가담한 공을 인정받아 권좌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재물에 대한 탐욕이 강하여 좋은 물건을 보면 강제로라도 빼앗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40여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뇌물을 받지 않고서는 상대방을 풀어주는 법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벼슬이 수사공에 이르렀으니 무신정권이 얼마나 형편없는 정권이었는지 가늠케 한다.
송유인은 원래 문관들과 친한 무관이었는데, 무신난 이후 혼자 고립되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본처는 섬으로 귀양보내고 정중부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권좌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교활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부귀와 사치가 왕실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읺는 신하는 반드시 죽이거나 좌천시켰으며, 자신이 평장사 벼슬을 주지 않는다고 왕에게 술주정을 하여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결국 평장사에 오른 그는 극악무도함 때문에 재상 이하 신하들은 숨도 크게 못 쉬고 항상 고양이 앞에 쥐걸음하듯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중부 세력의 권력 남용은 청년 장수 경대승의 반란으로 종결되었다. 경대승은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경진의 아들로 15세에 음서로 교위에 임명됐다. 그 후 1175년에 청주에서 난이 일어나자 박순필과 함께 사심관으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이 때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고, 이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1179년 9월 허승 등과 공모하여 정중부를 비롯한 정준, 송유인 등을 살해하고 26세의 젊은 나이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권 장악 후 그는 거사에 함께 했던 허승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무신정권의 핵심기구인 중방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이 설치한 도방을 중심으로 심복정치를 펼쳐나갔다.
그는 문무신을 골고루 등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고 정계를 정상화시키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아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측근들까지도 가차없이 죽이는 진혹한 행동을 일삼았다. 또 도방의 무리들이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1181년 한신충, 채인정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반란은 경대승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 후 경대승은 2년 동안 권좌에 머물다가 정중부의 귀신을 보았다며 헛소리를 하며 병상에 누운 뒤, 1183년 7월에 병사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한동안 조정은 권력의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 때문에 왕권이 회복되는 기미가 보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명종이 자신감을 잃고 경대승을 피해 경주에 낙향해 있던 이의민을 불러올림으로써 권력 공백 상태는 끝이 났다.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소금장수 이선이며, 어머니는 옥령사의 여종이었다. 이의민은 신장이 8척이고 태껸에 능하여 두 명의 형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달이었다. 그 때문에 안찰사 김자양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두 형은 죽고, 이의민만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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