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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7 : 고려의 역사 145 (제19대 명종실록 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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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7 : 고려의 역사 145 (제19대 명종실록 6)

두바퀴인생 2011. 10. 2. 03:32

 

 

 

한국의 역사 377 : 고려의 역사 145 (제19대 명종실록 6)

 

제19대 명종실록

(1131~1202년, 재위 1170년 9월~1197년 9월, 27년)

 

2. 무신정권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계속)

  

김자양은 혹독한 고문 끝에 살아남은 이의민을 장하게 여겨 개경을 수비하는 경군으로 추천하였다. 경군에 들어간 이의민은 태껸을 잘한 덕분에 의종의 눈에 들었고, 대정을 거쳐 별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다가 정중부가 반란을 일으킬 때 가담한 공으로 중량장으로 승진하였고, 1173년 김보당이 난을 일으켜 의종을 복위시키려 하자 그는 의종을 죽이기 위해 경주로 내려갔다.

 

당시 의종은 거제도에서 유폐중이었는데, 반란군의 장수 장순석의 인도를 받아 김보당의 반란군이 웅거하고 있던 경주에 나와 있었다. 이의민은 경주로 진격하여 장순석을 제거하고 의종을 체포하여 객사에 가뒀다. 그리고 의종과 곤원사 연못에서 술을 마시다가 기회를 틈타 의종의 척추를 맨손으로 꺾어 죽였다. 이 때 의종의 등뼈에서 그의 손이 닿자 뚝뚝 하며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그는 껄껄 웃었다고 한다. 이의민이 개경으로 돌아간 후 경주의 부호장 필인이 의종의 시체를 건지지 않았다면 의종은 능도 없는 왕이 될 뻔했을 것이다.

 

이의민은 의종을 죽인 공로로 이의방에 의해 대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1174년에 일어난 조위총의 난 때 정동대장군지병마사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그는 이때 화살에 눈을 밎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는데도 진군하여 맹위를 떨치면서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덕택에 그는 정3품 상장군에 올라 권력자의 반열에 섰다.

 

하지만  1179년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하면서 급격히 세력이 약화됐다. 경대승은 이의민을 몹시 싫어했다. 그는 정중부를 처단하고 조정 관원들이 축하연을 열었을 때 '임금을 죽인 눔이 아직 살아있는데, 무슨 축하연인가?" 라며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의민은 경대승이 자신을 죽일까 봐 겁을 먹고 수하들을 시켜 자기 집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경대승의 도방 무리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확산되자 자기 집 골목 입구에 대문을 세우고 밤이면 수하들로 하여금 경비를 서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이의민은 병마사로 변경에 나가 있다가 경대승이 죽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내가 경대승을 죽이려 했는데 이 일을 누가 했는고? 나보다 손이 빠른 눔이 잇었구먼."하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는 경대승이 죽은 것이 아니라 경대승에 의해 허승이 죽었던 것이다.

 

이의민이 내뱉은 이 말은 곧 경대승의 귀에 들어갔고, 이의민은 이 때문에 겁을 먹고 병을 핑계삼아 관직을 버리고 고향 경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명종은 몇 번에 걸쳐 그를 불러 올리려고 했지만 그는 결코 상경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경대승이 죽은 후에도 계속 경주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경대승의 사망 소식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명종이 그가 반역을 도모할 것을 염려하여 병부상서 벼슬을 내리고 사람을 보내 간곡하게 부탁하자 마지못해 상경하였다.

 

상경한 후 그는 곧 실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때 무장 출신 두경승이 재상직에 있었는데, 중서문하평장사로 있던 이의민은 두경승이 자신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이의민은 두경승을 겁줄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힘자랑을 하기에 내가 이렇게 때려 눕혔지."

이의민이 주먹으로 중서성 기둥을 가격하자 금이 쩍 갔다. 이에 두경승도 뒤질세라 맞받아쳤다.

"그래? 나도 언젠가 공중에 빈 주먹질을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더군."

두경승이 이렇게 말하며 중서성 벽을 악력으로 거머쥐자 벽이 부서지면서 깊숙히 두경승의 주먹이 박혔다.

 

또 한 번은 이의민이 두경승과 함께 중서성에서 일을 토의하다가 의견 충돌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 때 이의민은 '네가 무슨 공이 있다고 나보다 지위가 높으냐?"고 말하면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지위가 낮은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이들이 이렇게 중서성 내에서 힘을 다투고 있을 때 추밀원에서는 무장 출신인 추밀원사 김영존과 추밀원부사 손삭이 서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대판 싸움을 벌였다. 이 바람에 추밀원 관리들이 항상 위축되어 그들 둘이 함께 있으면 슬금슬금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중서성과 추밀원의 이 같은 권력다툼을 빗대어 세간에는 "중서성에서는 이가와 두가요, 추밀원에서는 손가와 김가로다."는 말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문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퍼뜨리기도 하였다.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위풍이 당당하여 진짜 재상 같거던

황각에 앉은지 삼사 년에

주먹바람은 만 번도 넘게 불었네'

 

이의민의 포악성에 걸맞게 그의 아내 최씨 역시 성질이 대단했다. 한 번은 이의민이 여종을 건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 여종을 때려죽였다. 그리고 색욕 또한 대단하여 종눔과 간통하다가 이의민에게 발각되어 쫓겨났다.

 

이의민 또한 여색을 대단히 밝혔는데, 양갓집 규수든 남의 아내든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들면 반드시 품에 넣었고, 싫증이 나면 곧 쫓아내고 다시 결혼을 하곤 하였다.

 

아비의 이 같은 품성을 이어받은 아들 지순, 지영, 지광 등의 횡포도 만만치 않았다. 이지순은 김사미와 효심의 난 때 토벌군 장군으로 출전하였는데, 난적들이 노획한 재물이 많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과 내통하여 의복, 신, 버선 등을 팔아 재물을 축적했다. 또 이지영은 왕명을 받드는 합문지후를 두들겨 팼는가 하면 왕이 총애하는 애첩을 협박하여 강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비인 이의민이 명종에게 그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명종은 이지영이 횡포를 부릴 것을 염려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같은 이지영의 포악성 못지않게 이지광의 행실 역시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오만방자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지영과 이지광을 일러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 이처럼 아들과 더불어 권력을 마음대로 남용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이의민은 급기야 왕위를 넘보게 된다. 이에 이자겸이 한 때 믿었던 "십팔자가 왕이 된다"는 말을 믿고 김사미, 효심 등과 내통하여 신라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무도 이의민 일가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1196년에 장군이 된 이지영이 최충수의 집 비둘기를 강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로 최충수는 이지영에게 앙심을 품게 되고, 결국 자신의 형 최충헌과 모의하여 은밀히 수하들을 동원, 급습하여 이지영을 비롯한 이의민 일가와 그 측근들을 모두 도살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하여 권력은 최충헌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최충헌에 의해 명종이 쫓겨나고 신종이 즉위함으로써 향후 60여 년간 기나긴 최씨 무인정권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최충헌에 의해 무신정권은 본 궤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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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은 왕권을 회복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과 영달을 위해 당시 실권자였던  경대승이 갑자기 죽고난 다음메 이의민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로써 40여 년만에 끝날 수 있었던 무인정권을 60여 년을 더 무인들에게 권력을 내주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명종은 그럴 능력도 없었지만 그런 용기도 없었던 무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폭력이나 무력의 힘으로 쟁취한 권력은 또 다른 폭력 혁명을 유발하고 권력을 쟁취한 인물들이 부패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고려의 역사에세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력으로 권력을 쟁취하더라도 새로운 이념과 사상으로 민생을 되살릴 수 있는 사회 개혁을 시도하지 못하면 그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최충헌은 앞서 권력을 농단하며 자신들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하였던 부패하기 그지없던 외척 이자겸이나 무신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등 여러 무인들에 비해 비교적 강력한 개혁정책을 나름대로 추진하였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주변을 단속하였으며, 특히 그의 후손들이 지배하던 무신정권은 9차에 걸친 몽고의 침공이 무인정권의 존속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이러한 외침으로 국민들의 단합이 무엇보다 절실하였고 강력한 군사정책이 요구되었기에 외세의 침략에도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