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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4 : 고려의 역사 142 (제19대 명종실록 3) 본문
한국의 역사 374 : 고려의 역사 142 (제19대 명종실록 3)
제19대 명종실록
(1131~1202년, 재위 1170년 9월~1197년 9월, 27년)
1. 허수아비 임금 명종과 무신들의 정권다툼(계속)
정중부를 제거한 경대승은 무신정권의 권력기반이었던 중방을 무력화시키고 도방을 설치, 측근들을 배치하였다. 그 후 그는 정중부 제거에 공이 컸던 허승과 김광림을 제거하였고, 1181년에는 한산충, 채인정, 박돈순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들을 제압하여 유배시켰다.
경대승의 권력독점은 4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1183년 7월 정중부의 귀신을 보고 놀라 그가 갑작스럽게 죽자 경대승의 측근들은 유배되고 정권은 이의민에게 돌아갔다. 당시 경대승이 두려워 고향 경주에 낙향하여 지내던 이의민은 경대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상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종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불렀고, 그래도 듣지 않자 병부상서 벼슬을 내리면서 상경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고, 그제야 이의민은 못이기는 척 상경하게 된다.
당시 명종은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는데도 이의민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축출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그에게 다시 권력 장악의 기회를 주고 말았는데, 이런 처사를 두고 조신들은 개탄하였고 명종은 스스로 왕권을 포기하고 이의민을 끌여들인 것이었다.
이의민은 상경 후 형부상서 상장군, 문하평장사 등을 지내면서 정권을 장악하여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다. 이의민의 힘이 하늘을 찌를 듯하자 그의 자식들도 아비의 힘을 믿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고 뇌물을 받아 제산을 증식하는 등 타락상을 보이자 그들에 대한 세간의 원성이 드높았다.
하지만 이의민의 권력은 13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 왕위를 넘보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7월 청도와 울산에서 반란이 일이났다. 고려 타도와 신라 부흥을 부르짖으며 운문(경북 청도)에서는 김사미가 주변을 장악하여 난을 주도하였고, 초전(울산)에서는 효심이 근처 현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명종은 대장군 전존걸을 시켜 장군 이지순, 이공정, 김척, 김경부, 노식 등과 함께 반란군을 치게 하였다.
이 때 이의민은 한때 이자겸이 믿던 '십팔자(十八字)가 왕이 된다"는 이야기를 믿고 아들 이지순으로 하여금 김사미와 효순을 도우도록 하였다. 이는 이의민 자신이 경주 사람이므로 그들과 연합하여 신라를 재건하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군은 쉽사리 김사미와 효심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2월 결국 정부군에 밀린 김사미가 항복을 청하다가 목을 베이고, 12월에 효심이 체포됨으로써 난은 겨우 진압되었다.
그 후에도 이의민은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가 1196년 4월 장군 최충헌 형제에게 살해됨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은 이듬해 9월 66세의 연로한 명종을 내쫓고 명종의 아우 평양공 민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웠다. 이로써 허수아비 왕 명종은 27년간 머물렀던 왕위에서 쫓겨나 창락궁에 연금되었다. 그 후 6년을 더 살다가 1202년 9월에 이질에 걸려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때 신종이 그에게 의원을 보냈으나 그는 "내가 28년간이나 왕위에 머물렀고, 또 나이가 72세이니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는가?"하면서 약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죽은 후 그는 장단에 묻혔으며, 능호는 지릉이라 하였다.
명종은 의정왕후 김씨에게서 강종(22대)과 연희, 수낭 두 공주를 얻었으며, 이름이 남아있지 않는 여러 후궁들에게서 10여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의정왕후 김씨는 강릉공 김온의 딸이며 명종이 익양후로 있을 때 시집왔다. 그리고 명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의정왕후에 봉해졌다가 사망 후 아들 강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광정태후로 추존되었다.
강종 이외에 명종에게는 여러 후궁과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 중에는 선사, 홍기, 홍추, 홍규, 홍균, 홍각, 홍이 등의 이름이 전해진다. 이들은 모두 승려가 되었으며, 소군(小君)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들 중 선사는 열 살 때 명종의 명령으로 승려가 되었는데, 출가 후에도 궁중에 드나들면서 권세를 떨쳤다. 그리고 이 외의 소군들 역시 삼중 벼슬을 받고 유명한 사찰을 택하여 거주하였으며,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명종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대부분 섬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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