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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3 : 고려의 역사 141 (제19대 명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373 : 고려의 역사 141 (제19대 명종실록 2)
제19대 명종실록
(1131~1202년, 재위 1170년 9월~1197년 9월, 27년)
1. 허수아비 임금 명종과 무신들의 정권다툼(계속)
이의방이 정권을 독점하는 상황이 전개되던 1172년, 귀법사 승려 1백 여 명이 이의방 타도를 외치며 도성 북문으로 침입하였다. 그러나 이의방이 군사를 이끌고 즉시 출동하여 그들을 공격하자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의방은 중광사, 흥호사, 귀법사, 용흥사, 묘지사, 북흥사 등의 절을 허물고 재물을 약탈함으로써 승려들의 기를 꺽어 놓았다.
그러나 반란 사건은 끓이지 않았다. 1173년 8월,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고 의종을 복위시켜야 한다면서 반란을 일으키자 지병마사 한언국이 이에 호응하여 녹사 장순석을 거제도에 보내 유배중이던 의종을 경주로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반란군은 이의민과 박존원이 이끄는 정부군에게 패배하고 김보당과 한언국은 체포되어 개경 저잣거리에서 효수되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의종도 경주에서 이의민에게 허리가 꺽인 채 살해되어 연못에 던져졌다.
김보당 반란 사건 이후 다시 한 번 문신들이 대거 척살되고, 이의방은 세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 이 때문에 조야에서 이의방을 비방하는 소리가 높아갔고, 1174년 9월 급기야 서경 유수 조위총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조위총이 군사를 일으키자 동.북 양계의 백성들이 거의 모두 이에 호응하여 자비령 이북의 땅은 서경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이의방은 윤인첨으로 하여금 3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토록 하였다. 하지만 윤민첨이 대패하여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을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의방은 상서 윤인미와 대장군 김덕, 장군 김석제 등을 비롯한 서경 출신 인사들을 모조리 죽여 효수하고 직접 출전하였다.
이의방은 반란군을 맞아 먼저 날랜 병사들을 차출하여 서경군을 교란시키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반란군이 이의방의 교란 작전에 빠져 군사들이 흩어지자 조위총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서경성에 진을 치고 장기전으로 대항하자 이의방의 군대는 추위에 지쳐 대패하고 말았다. 1174년 12월, 패퇴한 이의방이 전력을 정비하고 다시 서경군을 치기 위해 출전했을 때, 평소 아버지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한 이의방에 악감정을 갖고 있던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승려 종감과 모의하여 이의방을 기습적으로 살해함으로써 정권은 다시 정중부 부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의방이 죽자 그의 측근들과 수하들도 모두 죽거나 유배되었다. 조위총의 난은 1176년 7월까지 계속되다가 윤인첨에 의해 서경이 격파되고 조위총이 붙잡히면서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위총의 숨어 있던 수하들이 서경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반란을 도모하는 바람에 서경은 항상 전운에 휩싸여 있었다.
조위총의 난으로 질서가 무너지고 민심이 흉흉하던 가운데 1176년1월에는 공주의 천민집단 명학소에서 망이와 망소이가 주동되어 난을 일으켰다. 그들이 스스로를 산행(山行)병마사라고 부르면서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조위총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정은 지후 채원부와 낭장 박강수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토록 했다. 하지만 난민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대장군 정황재, 장군 장박인 등에게 군사 3천을 주어 그들을 제압토록 하였다. 그런데 정부군은 난민들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내원승 양주택을 현령으로, 내시 김윤실을 현위로 임명하여 난민들을 위무하게 하는 등 화유책을 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이, 망소이는 조정의 회유책을 거부하고 예산현을 공격하여 감무를 살해하고 충주까지 점령하였다.
사태가 이처럼 점점 다급하게 돌아가자 조정은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파견하여 난민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자 정부군의 공격과 반란 난민 간의 내분으로 수세에 몰린 망이.망소이는 1177년 정월 강화를 요청함으로써 민란은 일시적으로 진정 국면에 접어든다. 그러나 두 달 뒤에 정부군이 망이, 망소이의 가족을 가두는 바람에 다시 난민들이 봉기하여 청주목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그해 7월 난민들이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망이, 망소이를 비롯한 주동자들이 감옥에 갖히면서 난은 종결되었다.
이 때 서경에서는 조위총의 수하들이 지속적으로 관아를 습격하는 등 소규모 반란을 일으키다가 1179년 2월에 다시 봉기하였다. 이에 서북면 지병마사 이부가 반란군을 완전히 소탕시킬 목적으로 거짓으로 식량을 나눠준다 하여 찿아온 난민들을 가둬놓고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천여 명의 난민들이 목숨을 잃자 다시금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관군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각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였지만 초반에는 오히려 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안북도호판관 함수산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후 반란은 3개월간 지속되다가 5월에 가서야 겨우 제압되었다.
이처럼 수년 동안 도처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중에도 정중부를 위시한 그의 측근 세력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각종 불법을 자행하였다. 이 때문에 민심이 들끓자 권력 찬탈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청년 장수 경대승이 허승과 모의하여 1179년 9월에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을 살해하고, 그 측근들을 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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