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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2 : 고려의 역사 140 (제19대 명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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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2 : 고려의 역사 140 (제19대 명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9. 27. 02:23

 

 

 

한국의 역사 372 : 고려의 역사 140 (제19대 명종실록 1)

 

 

제19대 명종

명종(明宗, 1131년~1202년)은 고려 제19대 국왕(재위: 1170년~1197년)이다. 는 호(晧), 는 지단(之旦), 시호명종황명광효대왕(明宗皇明光孝大王). 인종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셋째 아들이며 의종의 동생이다.

 

 

 

생애

1170년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무신들에게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이후 무신 정권 집권자들을 서로 견제하게 만들고 왕족들의 단합을 이끌어내어 무신들의 손아귀로부터 부단히 왕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1173년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이 무신 정권 타도와 전(前) 임금인 의종의 복위를 천명하며 군사를 일으켰으나, 무신 정권에 의하여 진압되고 의종은 시해되었다.

 

1179년 정중부의 전횡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경주로 달아난 이의민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의민은 새로운 무신 권력자가 되어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요직에 앉히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갖은 횡포를 부리다가,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야심까지 품게 된다.

 

그러나 1197년에 최충헌 형제의 정변으로 폐위를 당하고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된 지 6년 후에 병을 얻어 승하하였으며 능은 장단군 장도면에 위치한 지릉(智陵)이다.

 

1196년 음력 4월, 최충헌이 이의민을 참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최씨 정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때 최충헌은 거사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앞으로의 국정개혁안의 내용을 담은 봉사 10조(封事十條)를 올리고 명종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1197년에 최충헌 형제의 정변으로 폐위를 당하고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된 지 6년 후에 병을 얻어 승하하였으며 능은 장단군 장도면에 위치한 지릉(智陵)이다.

 

가계

  • 광정왕후 김씨(光靖王后) - 강릉공 온의 딸이자 의종의 비인 장경왕후의 여동생.
    • 강종(康宗, 1152년~1213년)
    • 연희궁주(延禧宮主)
    • 수안궁주(壽安宮主)
  • 선사
  • 홍기
  • 홍추
  • 홍규
  • 홍균
  • 홍각
  • 홍이

 

 

 

 

 

 

 

 

 

제19대 명종실록

(1131~1202년, 재위 1170년 9월~1197년 9월, 27년)

 

1. 허수아비 임금 명종과 무신들의 정권다툼

 

정중부의 반란으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무신정권 시대로 접어든다. 왕은 존재하나 힘이 없고 모든 권력은 일부 무신들이 장악하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는 기운데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잇따른다. 이로 인해 국가기강은 무너지고 민심은 흉흉해져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른다.

 

명종은 인종의 셋째 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31년 10월에 태어낫으며, 초명은 흔, 이름은 호, 자는 지단이다. 1148년에 익양후에 봉해졌으며 후에 다시 익양공으로 승진되었으며, 1170년 9월 반란을 일으킨 정중부 등이 의종을 몰아내고 동복아우인 그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고려 제19대 왕에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명종은 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내심 왕위를 탐냈던 모양이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전첨 최여해가 꿈을 꾸었는데, 의종이 익양공 왕호에게 홀을 주니 익양공이 그것을 받아 용상에 올라앉는 것이었다. 최여해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꿈을 신기하게 여기고 왕호에게 말했더니 왕호는 그에게 꿈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의종은 어머니 공예왕후도 둘째 경을 후계자로 인종에게 권유하였고 의종이 태자로 책봉되는 것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래 도참설을 신봉하여 아우들이 왕위를 넘볼까봐 항상 두려워하였는데, 만약 최여해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면 반드시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최여해의 꿈 이야기는 그의 즉위가 하늘의 뜻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꾸며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이야기는 명종이 익양공 시절부터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전하고 있다. 물론 왕자들 중 누구도 왕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나 의종의 자유분망한 태도가 왕제로써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가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는 것은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의종을 쫓아내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을 때 그들의 제의를 전혀 거부하지 않은 것을 통해 확인된다. 허수아비 왕이라도 왕이 된다는 것에 만족한 것을 보면 지혜가 부족하고 무능한 졸부에 불과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막상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하였다. 반정의 성공으로 추대되는 왕이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도 알았을 것이나, 그런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이라는 자리가 탐이 났던 것이 틀림없다. 모든 권력은 난을 일으킨 무신들이 쥐고 있었고, 그래서 명종은 그들 무신들의 권력싸움의 틈바구니 속에 끼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다. 그만큼 그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명종은 즉위하자마자 정중부, 이고, 이의방 등을 벽상공신으로 삼아 그들의 화상을 그려 전각에 붙이고, 그들의 수하들인 양숙, 채원 등은 그 다음 자리에 두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은 중방을 설치하고 권력을 농단하면서 조정을 독점하기 위해 각기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바빴다.

 

1171년 이고는 정중부와 이의방에 비해 자신이 홀대를 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과 같이 어울리던 무뢰배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김대용의 밀고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채원과 이의방에 붙잡혀 살해당한다. 그런데 얼마 후 채원이 다시 권력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다가 이의방에게 누설되어 조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이의방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진 정중부는 이의방의 권력 팽창을 두려워 하는 처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