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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70 : 고려의 역사 138 (제18대 의종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370 : 고려의 역사 138 (제18대 의종실록 5)
제18대 의종실록
(1127~1173년, 재위 1146년 2월~1170년 9월, 24년 7개월)
3. '정중부의 난'과 문신귀족의 몰락
정중부의 난은 고려 관료사회의 무반에 대한 홀대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 사건으로 명종 대 이후 1백 년간 지속되는 무신정권의 시초가 된다. 때문에 이 사건을 두고 대개는 고려 문신 중심의 관료체제에 대한 무신들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전말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지속적인 권리회복 운동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는 처우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다소 우발적인 경향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 무신들은 준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정을 도모하여 문신 귀족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쟁취하였고 권력구조에 대한 개혁이나 국력 배양은 커녕 그 이후 반복된 쿠테타로 혼란기를 초래한 점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광종 대 이후 과거제가 정착되면서 고려 사회는 통일전쟁기의 과도기적인 관료체제에서 벗어나 문신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이 같은 관료체제는 무신의 최고 품계를 정3품 상장군에 한정시켰고, 이 때문에 전쟁 상황 속에서도 무신은 언제나 문신 출신 상원수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소손녕과 담판을 지어 강동 6주를 얻어낸 서희, 구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여진정벌을 단행해 동북 9성을 건설한 윤관 등 모두 무신이 아닌 문신이라는 사실을 통해 이는 쉽게 확인 된다.
하지만 무신들은 이러한 관료체제에 대하여 그다지 큰 불마은 품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의 주변국들이 고려의 군권 통수체제와 비슷한 양상을 띠었고, 문인을 우대하는 풍조는 동북아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고려 조정은 대개 정2품의 평장사를 원수에 임명했다. 평장사란 요즘으로 말하면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재상직이다. 재상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지휘관으로 활약했다는 것은 국가 전란에 대해 문신과 무신이 함께 대처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또한 문신들이 병법이나 용병 등의 무신들이 갖춰야 하는 지식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병권의 최고 책임자를 문신에게 맏긴 것은 자칫 우발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 무신들의 군사반란에 대한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 수행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병사들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교량 역활도 했다. 이러한 고려의 군권 편제는 적어도 인종 이전까지는 별다른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려의 병권 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인종 대에 권력을 독식하던 이자겸의 기형적인 정국 운영이 이뤄지면서부터였다. 문신 출신인 그가 사병을 육성하여 국가의 군사체제를 동요케 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무신 출신인 척준경에게 너무 많은 힘을 실어주었고, 이 때부터 무신들의 힘이 급성장했다. 그리고 급기야 척준경에게 이자겸의 난을 종식시킨 공로로 정2품의 평장사 벼슬을 내리면서 무신에게 정3품 이상의 벼슬을 내리지 않던 관습이 깨어졌다. 이로써 무신들은 광종 이후 오르지 못할 나무로만 여겼던 재상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신들의 힘이 한층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묘청의 난이 발발하면서 한껏 고조되었던 무신들의 기가 꺽였다. 고려의 양반사회는 대개 개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반과 서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무반들이 이끌고 있었다. 때문에 서경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에는 자연히 서경의 무반들이 대거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의 문반 세력에 의해 묘청의 난이 진압되자 결과적으로 서경 세력의 힘은 완전히 실추되었고, 그것은 무반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부터 개경의 문신들은 무신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고, 의종 대에 와서 왕이 일부 간사한 문신들과 향락을 즐기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정중부의 난은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난 다소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정중부는 해주 사람으로 키가 7척이나 되는 거인이었다. 그는 청년이 되어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군적에 올라 개경에 보내졌는데, 당시 재상이던 최홍재가 금위병을 뽑다가 그의 체격을 보고 궁궐 호위대인 공학금군에 편입시켰다.
이후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초급장교인 견룡대정에 올랐다. 그 시절 그는 내시 김돈중이 자신의 수염을 태운 사건으로 문관들에 대한 악감정을 품게 된다. 김돈중이 당시 과거에 급제하여 초직으로 내시직을 제수받았는데, 정중부를 만만하게 보고 촟불로 그의 수염을 태워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화가 난 정중부가 김돈중을 흠씬 두둘겨패 요절을 내 버렸다. 섣달 그믐의 축제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이 분노하여 인종에게 정중부를 매질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왕은 마지못해 매질을 허락했지만 정중부를 아낀 나머지 물래 도망을 시켜 화를 면하도록 했다.
정중부는 그 후부터 김돈중을 싫어했고, 그것은 곧 문관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장교 계급인 교위가 되었다. 이 때부터 정중부는 의종의 신임을 얻어 궁궐 북문을 통해 왕궁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어사대에서 누차에 걸쳐 정중부가 마음대로 궁궐문을 열고 다니는 것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의종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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