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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8 : 고려의 역사 136 (제18대 의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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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8 : 고려의 역사 136 (제18대 의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9. 22. 17:13

 

 

한국의 역사 368 : 고려의 역사 136 (제18대 의종실록 3)

 

 

제18대 의종실록

(1127~1173년, 재위 1146년 2월~1170년 9월, 24년 7개월)

 

1. 향략주의자 의종의 환관정치와 정중부의 난(계속)

주연이 펼쳐질 때마다 정중부를 비롯한 무인과 병사들이 주변을 지켜야 했는데, 주연이 길어지면 그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곤 하였다. 그러면 의종은 무장들을 달래기 위해 태껸 시합을 시켜 우승한 자에게 상을 내리곤 하였다. 하지만 무장들은 늘상 문인들로부터 무식한 눔들이라고 무시를 당했으며, 심지어는 환관이나 내시들마저도 그런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의종의 사치가 심해지고 주연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권력은 환관과 내시들의 차지가 되었고, 그들은 의종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주연을 주관하기도 하고, 왕의 다음 행차지를 정하여 주연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환관 정함, 백선연, 왕광취 등과 내시 박회준, 유장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 내관들은 모두 1백칸이 넘는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수십 명의 노비를 부리며 기고만장하 태도로 일관하였다. 특히 그들의 우두머리격인 정함과 백선연은 왕의 신임을 믿고 백관들을 눈짓으로 명령하고 무장들을 종 부리듯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왕명이 모두 고자한테서 나온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의종 후반기의 정치는 한 마디로 호나관들이 좌우하는 '환관정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모든 관리들이 앞다투어 그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이처럼 정사가 엉망진창이 된 상태에서 1167년 연등회 도중에 우승선으로 있던 김부식의 둘째 아들 김돈중의 말이 기마병의 화살통을 들이받아 공교롭게도 그 화t살이 보련(왕의 가마)옆에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의종은 자객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황급히 궁성으로 돌아와 계엄령을 내렸다.

 

의종은 범인을 잡는 자에게 은 2백 근을 주고 신분에 상관없이 본인의 소원만큼 벼슬을 내리겠다는 방을 붙였다. 또 의종은 그렇게 하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다시 현상금으로 황금 15근과 은병 2백 개를 더 내걸었다. 그리고 용맹한 무장들을 선발하여 내순검을 조직하고 두 조로 나누어 밤낮으로 대궐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현상금을 내걸고 범인을 잡으라고 재촉을 하자 조신들은 별다른 증거 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결국 유배 중이던 대령후 경의 하인 나언 등의 소행이라고 믿고 그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나언 등 대령후의 하인들이 참형을 당하고, 호위병들은 근무태만의 책임을 물어 14명이 귀양길에 올랐다. 이 때문에 무장들의 불만은 한층 고조되었다.

 

나언 등이 사형당한 후 의종은 다시 많은 호위병들을 이끌고 궁궐 박으로 자주 미행을 나갔다. 귀법사, 용흥사, 흥왕사 등의 절을 주로 다녔으며, 심지어 남경과 서경에도 거둥하여 승가사와 문수사, 장의사 등의 절은 물론이고 경치가 뛰어난 정자들을 두루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궁궐 주변에 자신이 설치한 누각들을 찿아다니며 문사들을 불러 시를 짓고 주연을 베푸는 일도 잦았다.

 

의종의 잦은 미행으로 호위병들의 불만은 날로 고조되어 갔다. 그들은 언제나 주변이나 경계하는 하수인 취급을 받았으며, 내관이나 문사들의 잔심부름까지 도맡았다. 그리고 왕의 주연이 밤을 세워 계속될 때는 끼니조차 얻어먹지 못하고 경계에 열중해야 했다.

 

그러나 의종은 호위병들의 고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3일에 한 번씩 연회를 베풀었다. 이에 호위병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자, 마침내 반란으로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1170년 8월 정축일 밤 의종이 문관들과 밤늦도록 연회를 즐기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반역을 확책하고 그 다음 날 왕이 보현원으로 가면 거사를 단행하기로 약조하였다.

 

다음날 의종은 보현원으로 가려고 그 근처까지 와서 문신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호위하고 있는 무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수박회 시합을 열어 상품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그런데 수박회 시합 중에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빰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정중부를 비롯한 무관들을 분노케 했다. 그러자 의종은 정중부를 달래며 진정시켰으나, 저녁 무렵에 왕이 대신들과 함께 보현원에 이르렀을 때 이고와 이의방이 임종식, 이복기 등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은 곧 의종 앞에서 한뢰를 죽였으며, 그 연회에 참석했던 대소 신료들과 환관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그 후 정중부를 비롯한 무관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곧바로 대궐로 달려가서 추밀원 부사 양순정 등 수십 명을 죽이고, 부하들에게 "문관의 관을 쓴 눔들은 한낱 서리라도 모조리 죽여라."고 명령했다. 이 결과 문관 50여 명이 살해 당하고 정권이 정중부의 손에 넘어가자 환관 왕광취 등이 동료들과 함께 정중부를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되레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게 반란에 성공한 정중부는 그해 9월 의종과 태자를 각각 군기감과 영은관에 유폐시켰다가 다시 거제현과 진도현으로 추방하고 왕의 아우 익양공 호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리하여 고려 조정은 무신들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행후 1백 년간 무신정권 시대가 열린다.

 

거제현으로 유폐된 의종은 1173년 8월까지 그 독에 머물다가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일어난 김보당에 의해 경주로 옮겨졌다. 그러나 김보당의 거병이 실패하자 2개월 뒤인 10월 경신일에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 북쪽 연못가에서 살해됨으로써 향년 4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호는 희릉으로, 정확한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의종은 장경왕후 김씨와 장성왕후 최씨 등 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장경왕후에게서 1남 3녀를 얻었다.

 

장경왕후 김씨는 종실 강릉공 김온의 딸이며 의종이 태자로 잇을 때 입궁하여 의종 즉위 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해 개경 주변의 많은 사찰에 득남 법회를 열었으며, 결국 1149년 4월에 태자 기를 생산했다. 그리고 이후 경덕, 안정, 화순궁주를 낳았다. 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잇지 않으며 생몰연대도 기록이 없다.

 

장선왕후 최씨는 참지정사 최단의 딸로 1148년 8월에 입궁하여 오아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은 없었으며 역시 다른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태자 기는 1149년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홍이다. 115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170년에 정중부의 난이 발생하자 진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