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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5 : 고려의 역사 133 (제17대 인종실록 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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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5 : 고려의 역사 133 (제17대 인종실록 12)

두바퀴인생 2011. 9. 19. 08:04

 

 

한국의 역사 365 : 고려의 역사 133 (제17대 인종실록 12)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4. 김부식과 삼국사기(계속)

 

이렇게 만들어진 <삼국사기>는 1174년 송나라에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편찬 이후 곧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일본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는 2차 판각본이다. 그리고 3차 판각은 조선 개국 후 1394년에 있었으며, 제4차 판각은 1512년에 있었다. <삼국사기>를 완성한 후 김부식은 6년을 더 살다가, 1151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남긴 저서가 20여 권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으며, <동문선>과 <동문수>에 그의 글들이 실려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한때 사대주의에 빠진 김부식의 편파적인 역사의식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는 그 중심 내용이 예법 준칙과 유교적 덕치주의, 사대적인 예절 등을 강조한 김부식의 사론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삼국의 현실을 역설하고 독자성을 구축하려는 사론들을 바탕으로 그 같은 일방적인 비판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흔히 사대주의로 매도되는 당시의 대중국관에 일방적인 이해에 대해서도 그 시대의 독특한 외교관례일 뿐 모화사상이나 사대주의는 아니라는 견해도 대두되고 있다.

 

<삼국사기>편찬 당시의 고려인들은 단순히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뛰어난 문화와 높은 학문을 가진 나라를 최고로 생각했다. 인종 대만 하더라도 중국 내에서 한족의 입지는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흔히 고려인들이 야인이라고 불렀던 여진족이 금을 세워 중국 대륙으로 팽창해 가고 있었고, 한족이 세운 송은 남쪽으로 쫓겨가 가까스로 왕조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김부식의 대중국관을 '모화'라고 말할 순 있어도 '사대'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김부식이 모화사상에 젖어 있었다면 묘청의 금에 대한 정벌론을 찬성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화사상에 따르면 북방의 야인이 중국 본토를 유린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부식은 금나라가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한 점을 인정하여 정벌론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는 그가 사대주의자나 모화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중심이 되어 집필한 <삼국사기>를 사대주의의 소산으로만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

 

삼국시대 이래로 고려를 비롯한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약국이 강국에게 조공하는 것을 하나의 외교적 형태로 삼았고, 조공을 약조한 국가는 조공국으로서의 예절을 지키는 것이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공이 곧 속국을 자처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란이 약했을 때는 고구려에 조공했고, 여진이 약했을 때도 고려에 조공했다. 또한 송나라도 한때 힘이 약해져 하나라에 조공하였고, 거란이 강해지자 고려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그들에게 조공했다. 이처럼 조공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당시의 외교적 관례에 불과했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 등이 조공했다는 사실은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힘의 열세를 인정하지 않고 조공을 거부하고 전쟁을 초래하여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조공의 약조가 깨지기 전까지는 그에 준하는 외교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삼국사기>가 만들어지던 시기에도 이러한 외교적 관례는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따라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사대적 예절을 강조한 것은 고려의 현실을 감안한 실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당시의 외교적 관례를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올바른 일은 아니며, <삼국사기>를 그런 관점에 바탕하여 사대주의 소산으로 취급하는 것 역시 옳은 태도는 아닐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강렬한 국가의식과 우리 민족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을 분리된 세 국가가 아닌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보고 고려를 그 결정체로 설정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고려 왕실의 위상을 높이고 신하들에게 충(忠)을 강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의 역사서인 만큼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를 제외한 부분에 대해서 기술이 미흡하다는 점, 신라를 가장  오래된 국가로 내세웠다는 점, 발해에 대한 기술이 미흡하다는 점, 대륙백제에 대한 기술이 거의 무시되었다는 점,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을 당연시 표현하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사기>를 쓴 사마천이나 기타 모든 사관들의 역사서들이 사관의 주관적인 역사관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역사서가 승자에 의해서 왜곡되고 부풀려지고 축소되는 점은 어디를 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사관이 역사서를 기술할 때 의식적으로 조작하거나 부풀린 점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가 모두가 진실일 수 없듯이 사관들에 의해 기록에서 제외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발해 역사에 대한 계승국 시비가 모두 이런 이런 경우가 될 것이다. 즉 그것은  사료가 없거나 유물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 또 사료나 유물이 남아 있다하더라도 각자의 나라들이 자국의 정체성과 영토주의, 패권주의, 정통성 확립 차원에서 자신의 역사는 부풀리고 확대하며 주변국의 역사까지 역사를 감추고 축소하며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과거에도 마찬가지로 사관들의 역사 기술이 공평성과 정확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삼국사기> 부정적인 시각에 대한 한 네티즌의 글을 참고로 소개한다.   

 

흔히 『삼국사기』를 비난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이 책이 사대주의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책이며 지나치게 신라 중심적이고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깎아내린 구절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비난이다. 왜냐하면『삼국사기』가 고조선이나 마한, 북부여, 동부여, 옥저, 동예, 가야의 역사를 자세히 다루지 않은 것은 사대주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단지 책이 다루고 있는 역사의 특성 때문이며 그가 일부러 고구려나 백제의 역사를 깎아내리려고『삼국사기』를 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이라는 비난부터 한번 따져보자.

사람들이 김부식의『삼국사기』를 '사대주의에 물든 역사책' 이라고 헐뜯는 까닭은, 김부식이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역사만 적고 그 이전인 단군조선과 열국들(북부여, 행인, 구다, 조나, 황룡국, 마한, 동부여, 옥저, 예), 대진국(발해)과 가야의 역사를『삼국사기』에서 빼 버렸다는 사실과 고구려와 백제가 당(唐)에게 무너진 일을 "하늘의 뜻대로 된 것이며,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이 비판은 옳은가? 단지 역사의 많은 부분이 빠져있다는 이유로『삼국사기』가 의도적으로 역사를 깎아내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삼국사기』는 사대주의 때문에 역사를 짧게 쓴 책이 아니며 고구려나 백제 역사를 일부러 깎아내리지도 않았다.(단, 고구려의 역사를 900년에서 708년으로 깎아내렸다는 혐의는 받을 만하다.『당서』에는 고려 - 고구려 - 가 900년 동안 나라를 이끌었다고 적혀 있는데 『삼국사기』에 나온 고구려 왕들의 계보를 모두 더해 보면 708년 정도이니까)

우선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삼국三國', 그러니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결코 고조선(단군조선) 때나 열국시대를 다룬 책이 아니다. 따라서 삼국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고 그 사이에 부분부분 단군조선이나 가야, 왜열도, 낙랑국, 북부여, 동부여의 역사가 들어가는 형식으로 역사를 다루게 된다. 그것을 '의도적인 역사 왜곡' 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삼국사기』가 삼국시대만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그 이전 시대를 자세히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를 일부러 줄인 것이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은, 마치『조선왕조실록』이 조선시대의 역사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그 이전인 고려나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아주 가끔 언급한다는 이유로 '역사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고려와 삼국 시대를 다루지 않았고 이는 사대주의에 젖어서다.

또 이 책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부풀리기 위해 썼으므로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명사明史』의 [조선전朝鮮傳]이나 『명조실록明朝實錄』에 나오는 조선 관계기록만을 '객관적'이라고 하면서 그것만으로 조선 역사를 쓸 수가 있는가? 그런데 삼국시대나 사국시대의 역사를 쓰는 학자들은 버젓이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 사관들이 『조선왕조실록』을 쓴다. 이름 그대로 조선시대에 일어난 일을 중점적으로, 당대의 관점에서 적은 책이므로 어디까지나 조선시대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많이 적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고려나 삼국시대의 역사를 부분부분 끼워넣어 제도의 유래나 풍습, 땅 이름을 설명한다.

… 이 책이 '조선시대만 자세히 적고 그 이전 시대인 삼국이나 진(:발해), 신라, 고려를 많이 다루지 않았으므로 그 역사들을 [내버린] 책이며, 사대사상에 젖어서 앞시대의 역사들을 잘라 내버리고 조선 중심으로 역사를 썼다. 그러니 이 책은 역사를 깎아내리려는 목적으로 쓴 것이다. 따라서 믿을 수 없다. 참고하면 안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다.『삼국사기』나『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다 보니까 다른 역사들이 자세하지 않은 것이지. 일부러 역사를 빼버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삼국사기』 인식은 출발부터 잘못되었다고 봐야 한다. 기존의 『삼국사기』 인식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만약 김부식이 '사대주의자' 라서 고조선이나 발해(:대진국)를 안 다뤘다면,『삼국사기』안에는 그 어떤 단군조선의 흔적도 나오지 말아야 한다. 또,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다루었어야 한다.

그러니까 만약 김부식이『삼국사기』를 우리 역사를 깎아내리고 짧게 줄이려고 썼다면 적어도 단군조선을 철저하게 부정하거나 (:예를 들면 한국 기록이나 중국 기록에 나와 있는 '조선'은 실재하지 않았다든지, 민중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단군 이야기는 '꾸며낸 거짓' 이니 믿을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던지, 아니면 아예 '조선(:단군조선)'이라는 나라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고 책에 적어놓았어야 했는데『삼국사기』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 북부여, 동부여, 낙랑국(:낙랑 '군' 이 아니다)도 빼 버려야 할텐데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고구려본기] 첫머리에 동부여와 북부여를 적고 있고, 고구려가 '북부여의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이 세운 나라라고 적음으로서 북부여와 동부여를 우리 역사로 인정하고 있다. 만약 사대주의 때문에 우리 역사를 줄이려고 했다면 위만조선이나 한군현과는 상관없는 북부여나 동부여에서 기록을 시작했을까? 또 고구려보다 먼저 세워진 북부여와 동부여를 우리 역사로 인정했을까? 이 사실만 보더라도 김부식이 '일부러' 우리 역사를 줄이기 위해『삼국사기』를 썼다는 주장은 잘못된 판단임을 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성 가운데 하나가 "옛날 선인왕검仙人王儉이 살았던 곳" 이라고 적어 단군왕검을 인정하고 있고, [신라본기]에서는 박혁거세 이전에 신라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조선朝鮮의 유민들"이었다고 적어 단군조선을 인정하고 있다.(김부식은 근세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살았던 근세고려의 사람이므로 여기서 조선은 단군조선, 그러니까 고조선을 가리킨다)

또 가야가 나오는 기록을 [신라본기]에 부분부분 끼워 넣음으로써 가야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조條에서 금관국 얘기가 잠깐 나온다)

그럼 왜 김부식은 가야나 대진국(:발해)을 자세히 다루지 않았을까? 실마리는 책 이름인『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김부식은 이 책을 쓸 때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썼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이들보다 '강했던' 나라들이 많았으나(북부여, 낙랑국, 가야) 김부식은 이들보다는, 끝까지 살아남아 다른 나라나 세력들을 모두 통합한 세 나라를 '역사의 중심' 이자 '정통'으로 보아 철저하게 이 삼국을 중심에 놓고 삼국의 관점에서 정리한 역사를 쓴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살아남지 못한 가야는, 500년 이상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삼국사기』에서 빠져 버린다.(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를 대단히 안타깝게 여긴다)

그럼 진(: 대진국이라고도 함. 외국에서는 이 나라를 발해라고 불렀다)은 왜 빼 버렸을까? 사대주의 때문일까? 아니다. 내가 볼 때, 김부식은 발해 역사는 다루기 어려운 미묘한 사항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일부러 따로 발해 역사를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신라 시대에 대진국(:발해)에 관한 기록이 적은 까닭은, 정치적인 상황과 국제관계 때문이지, 민족이 달랐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민족이 같아도 정치적인 이념 때문에 갈라져서 원수처럼 으르렁 거리는 경우는 많다. 남북한이 좋은 예이다)

우리가 '현대사'를 배울 때를 생각해보라. 휴전선 남쪽에 있는 남한의 역사는 '자세히' 배우지만, 휴전선을 놓고 적대관계로 대치하고 있는 북한의 역사는 자세히 배우지 않는다. 적대관계라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철저히 상대방을 (사실상) 부정하고 배척하며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역사를 정식 역사로 인정하지 않아서 빼 버리기 때문이다.

북한의 역사 교과서가 북한정권만을 '정통성이 있는 정권' 이라고 주장하면서 남한정부를 '괴뢰'이고 남한 땅을 '해방(?) 시켜야 할 반쪽'으로 여겨서 남한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남한도 마찬가지로 자기들만이 정통성이 있고 북한은 '괴뢰' 이며 '해방(?)시켜야 하는 국토의 일부' 이거나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할 족속이라고 (언론과 우익계에서) 가르치고(!) 있다.

대진국(:발해)과 신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였으리라고 보여진다. [당서]나 [삼국사기], [삼국유사]만 보더라도 대진국과 신라가 무력충돌한 부분이 여러군데에서 나오고, 신라는 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진국과의 접경지대에 군대를 보내 대진국을 치거나 당에 반항하며 대진국과 친하게 지냈던 고구려 유민의 정권인 제(齊) - 평로ㆍ치청은 당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정기 장군의 아들인 이납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제나라라고 붙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 를 무너뜨리려고 신라군대를 산동에 보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였던 대진국에 대한 반감으로 무력충돌이나 정치적 비난을 뺀 기록은 잘 남지 않았을 것이고([당서唐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보면 발해와 신라 사신이 - 당에서 - 외국인이 보는 과거에 붙은 합격자 수를 놓고 서로 자기네 합격자가 더 많으니 자기네가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며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또 발해와 신라 사신이 서로 자기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싸우는 장면도 나온다. 이 기록을 보면, 대진국과 신라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험악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오늘날의 북한과 남한처럼, 같은 민족이기는 했으나 정치적ㆍ군사적으로는 대립관계였다고 본다. 게다가『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진-발해-을 '발해말갈' 조條에서 서술할 때 인용한 역사서『삼국사三國史』를 보면, 신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북쪽에는「말갈」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고 남쪽에는 왜(:왜열도 세력이나 가야? 가야도 신라의 남쪽에 있었으니까)가 있으니, 이들이 나라의 근심이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최치원이 살았던 때에는 진-발해-을 '북적北狄 - 북쪽 오랑캐-'이라고 부르며 신라 사람들이 멸시했다. 이 사실을 보았을 때 적어도 신라의 지배층이나 지식인들은 당나라와 대립하면서 자기들 머리 위에 있던 진-발해-을 적대시하고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당과 손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렸다는 사실 때문에 대진국을(고구려를 이어받았고 당과 대립했으므로) 부담스럽게 여기며 싫어했고, 대진국은 대진국대로 신라를 '당과 손잡고 고구려를 무너뜨린 원수'로 여겨서 또 실제로도 신라가 당과 친하게 지내면서 대진국을 훼방놓았으므로 신라를 싫어했다.(신라를 경계하던 일본과 동맹을 맻은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라는 대진국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그 신라는 근세고려로 이어졌고 김부식은 신라시대에 남겨진 기록을 근거로 역사를 정리했다. 그런 판국이었으니 대진국(발해)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또 한가지 더 중요한 까닭이 남아 있다. 김부식이『삼국사기』를 쓸 때의 국제정세와 정치적 목적, 그리고 『삼국사기』자체의 성격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안에서만 보고 말려고 쓴 책이 아니다. 고려는『삼국사기』를 금나라나 남송에도 보냈으며 김부식이 쓴 책이라는 서문을 분명히 달아서 보낸 책이다. 다시말해서 '고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고려시대 이전의 역사' 이자 '고려의 공식 역사서' 란 말이다.

나라 안에서만 돌려보고 말 책이라면 모를까, 고려 황실이 다른나라 왕실에 '공식문서'로 보내는 역사책인 만큼 당시의 국제정세나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속된 말로 눈치를 봐야 했다는 것이다.

옛 대진국(:발해) 땅에는 대진국을 이은 금나라가 자리잡고 있었고, 옛 당나라 땅에는 당을 이은 나라인 송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당(唐)을 나쁘게 말하는 기록이 설사 많았다 하더라도 그대로 적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금(金)이 자리를 잡고 있는 이상 대진국의 역사가 고려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예전에는 대진국 ― 신라의 대치상태였지만, 김부식이 살던 때는 금 ― 고려로 그 상태가 거의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사실도 한 몫 했으리라)

결국 『삼국사기』에 가야나 대진국(:발해)이 안 들어간 것은 그가 역사를 몰라서가 아니라(사실 신라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두 나라를 그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삼국사기』가 어디까지나 끝까지 살아남은 '삼국三國'을 중심으로 쓴 역사책이고 대진국이 신라와 적대관계였으며 이 대치상태가 금(金)과 고려로 이어졌기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해서 일부러 적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 만약 '고려의 정식 역사'를 다룬 책에 대진국을 다뤘다면, 금金을 속국 취급한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었고, 이는 강대국인 금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김부식이『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으로 쓴 나머지 고구려를 소흘히 다루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 주장의 근거는 그가 [신라본기]를 책의 맨 첫 부분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과, 신라의 건국연대를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올려잡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하늘의 뜻(?)이며, 당연한 것."이라고 논평하면서 신라의 멸망은 "안타까운 일이나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그가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지녔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고구려를 소흘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적어도 고려는 - 실제로는 신라를 이어받았으므로 - 시라 역사를 중요시했으나, 이념적으로는 고구려를 잇는다는 표어를 내걸었기 때문에 고구려 역사를 소흘하게 다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비교적 '푸대접'을 받는 백제 역사도 - 적어도 오늘날의 한국 역사학자들이나 이병도에 비해서는 - 훨씬 잘 기록하고 있다 최소한 오늘날의 한국 사학자들이 김부식의 백제사 서술태도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고구려본기] 첫부분과, [신라본기] 첫부분을 대조해서 살펴보면 터무니없는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주몽 이야기는, 천손(天孫)신화 형식을 띠면서도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성을 띠고 있다. 주몽의 혈통을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에서 찾고, 강을 건너는데 강에서 물고기와 거북들이 저절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부분이나 알에서 주몽이 태어났는데 짐승들이 이를 지키고 감쌌으며 상서로운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는 기록을 빼고는 내용이 현실적이고 자세하며 구체적이다.

그가 어릴적에 어디서 자랐는지, 무엇을 했는지, 왜 동부여를 떠났으며 어느 경로를 통해서 어떻게 남하南下 했는지, 누구와 힘을 합쳐서 나라를 세웠는지, 어느 나라 어느 땅을 병합했는지가 아주 자세히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건 천손天孫 신화라기보다는 숫제 주몽 전기(傳記)다.

반대로 [신라본기]는 어떤가? 시조(?)라는 박혁거세의 이야기도 그렇거니와 석탈해나 김알지의 이야기도 '대충' 적어놓았다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다. 박혁거세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설명도 없이 단지 천마가 떨구고 간 알에서 '부모도 없이' 나온 아기로 적혀 있고. 석탈해도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온 '용왕의 아들' 이라고만 적혀 있다. 김알지도 마찬가지, 탈해 이사금이 자식이 없어서 근심하다가 어느날 '경주 계림'에 내려온 금궤짝을 얻고 그 안에서 나온 아기가 김알지였는데 그가 김씨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을 뿐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나 백제의 건국자인 비류 · 온조의 이야기가 아주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한 사람의 전기(傳記)로 손색이 없는 데 비해, 신라의 '시조들'인 박혁거세나 석탈해, 김알지 이야기는 말 그대로 단지 '신화' 에 불과하다.

굳이 따지라면『삼국사기』는 고구려 중심으로 쓰여진 역사책이지, 신라 중심으로 쓰여진 역사책이라고는 하기 어렵다.(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임을 밝힌다! - 필자)

만약 책이 신라 중심으로 나왔다면 박혁거세나 석탈해, 김알지의 이야기가 주몽이나 비류, 온조 이야기보다 더 자세히 나오고 동시에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 그들의 계보와 이동과정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간략하게 신화로만 처리된 점은『삼국사기』는 고구려를 보다 중시했고 고구려 중심으로 역사를 썼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김부식은 [신라본기]를 맨 첫머리에 썼잖소? 그게 신라 중심이 아니고 뭡니까?" 그렇지 않다. 각 나라의 존속기간을 잘 보시라.

┏ 신라 : 박혁거세부터 경순왕 김부까지 936년 동안

┣ 고구려 : 주몽부터 보장왕까지 708 년 동안 (900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은 708년 설이 우세하다.
┃              설령 900년이라 치더라도 신라보다 36년 뒤에 세워졌으니 신라보다는 짧다)

┗ 백제 : 온조부터 의자왕까지 700년 동안

그러니까 김부식은 신라가 고구려보다 중요해서 먼저 쓴 게 아니라, 단지 고구려보다 일찍 세워졌고 보다 오래 갔기 때문에 고구려보다 먼저 적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백제는 고구려보다 늦게 세워지고 일찍 망했기 때문에 가장 나중에 쓰여졌을 따름이고. 김부식은 철저한 편집원칙과 일정한 법칙에 따라『삼국사기』를 적었는데 다만 우리가 잘못 풀이했을 뿐이다.

그럼 왜 김부식은 고구려 중심으로『삼국사기』를 썼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그가 고려시대에 관리를 지낸 사람이라는 사실과, 고려의 국책이 '고구려 계승' 이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왕건이 세운 근세고려는 세워질 때부터 '고구려를 잇는다'는 말을 국책(國策)으로 내세운 나라였다. 그래서 북진(北進)을 자주 시도했고 거란과 자주 충돌했다. (거란이 대진국을 무너뜨리고 그 땅을 차지했으므로) 고구려를 잇는다는 정책을 내세웠으므로 당연히 역사서나 공문서, 외교문서에도 그 사실을 강조했고 고구려에 정통성을 두고 역사서를 쓰며 고구려의 흐름이 고려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고려의 관리였던 김부식은 이런 흐름을 따라야 했고 설사 그가 신라를 추켜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고려 황실의 명을 받고 '국정 교과서' 이자 '공식 역사서'로 펴내는 책 ― 그리고 나라에 바쳐야 하는 역사책 ― 이『삼국사기』인 만큼 국책인 '고구려 계승'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구려가 정통이고, 고구려가 중심이라고 적어야 했다.

김부식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역사를 모두 [본기本紀]라는 말로 다루었는데 이는 황제의 이야기나 황제국皇帝國의 역사를 쓸 때 붙이는 이름이다.(왕의 이야기를 다룰 때는 세가世家 라는 말을 쓴다) 그는 세 나라의 역사를 모두 '제국帝國'의 역사로 나타내되, 제帝라는 말을 쓰지 않고 왕王 이라는 말을 붙여서 교묘하게 충돌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알아둬야 하는 사실이 있다. 그가 '사대주의적' 이라서 대륙 백제(그러니까 백제가 경영한 식민지인 [담로])의 역사를 없애 버렸다는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김부식은『삼국사기』를 쓸 때 서라벌이 한반도의 경주이고 백제가 지금의 한반도 중부에 있었다는 식으로는 적지 않았다. 그는 단지 '서라벌에 낙랑국이 쳐들어왔다' 거나 '백제가 위나라와 싸웠고, 위나라가 졌다."는 기록을 정리했을 뿐이다.

만약 그가 대륙백제를 부정하려 했다면 사서에 대륙백제와 관련되어 있거나 대륙백제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삼국사기』에는 중국 대륙에 있던 백제 식민지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기록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조(條) 10년인 서기 488년에는, "위(魏, 여기서는 선비족이 세운 왕조인 북위)가 군사를 보내어 우리(백제)를 치다가 우리에게 패배했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열전 제 6 최치원전에는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는 강병 백만을 거느리고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幽)ㆍ연(燕)ㆍ제(齊)ㆍ노(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은 최치원이 당으로 건너갔을 때 당의 대사시중에게 올린 글에서 나온다)

이런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부식은 대륙백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단지 기록을 적게 남겼을 뿐이고, 남겨진 기록을 우리가 잘못 풀이했을 뿐이다.(백제를 한반도에 있는 본국本國 백제로)

또, 그는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조에서, 북연(北燕)의 왕인 모용휘를 ['연주燕主' 휘]라고 적고 있다.

주(主)는 분명 왕(王)이나 공(公), 후(候)보다 훨씬 격이 낮은 말이므로 분명히 김부식은 광개토대왕을 높이고 연의 모용휘를 낮추고 있다. (만약 그가 사대주의에 젖어 있었다면 연이 북중국에 있던 왕조였으므로 연왕을 황제라고 부르고 광개토대왕을 낮추어서 말했을 것이다)

또, 당시 고려의 유학은 어디까지나 현실정치에 필요한 '기술' 일 뿐이었지, 근세조선처럼 주자학에 빠져 비현실적인 담론에나 빠져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사대주의가 시작되는 건 조선시대부터이다.)

그런 시대를 살며 관리를 지냈던 김부식에게 '사대주의' 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삼국사기』의 기록이 삼국시대에서 훨씬 뒤에 적힌 기록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고구려본기]의 주몽 이야기는 광개토대왕비에서 거의 똑같은 내용이 나와 사실임이 입증되었고 [백제본기]에 나오는 무령왕의 사망연대와 날짜도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에 새겨진 연대와 똑같아 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했다.

또, 만약 그가 사대주의 때문에 백제 역사를 깎아내리려고『삼국사기』를 썼다면, 왜 [일본서기]와는 달리 온조왕 때에 마한을 완전히 완전히 통합했다고 적고 있는가? ([일본서기]는 백제가 근초고왕 때 ― 온조왕 이후 300년이 지나서 ― 에야 마한을 굴복시켰다고 적고 있다)

결국 김부식이 사대주의 때문에 역사를 깎아내렸다는 말은 기록을 잘못 읽어서 생긴 오류이며 착각일 따름이다.

지금까지『삼국사기』에 대한 오해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삼국사기는 결코 사대주의에 젖은 책이 아니며 신빙성이 없는 기록도 아니다.(그러나 100% 정확하지는 않다)

삼국의 역사를, 삼국시대의 역사를 이만큼 충실하게 나타낸 기록도 드물며 이 책과 더불어 다른 기록들을 보아야 제대로 된 역사가 보인다.『삼국사기』는 우리의 보물이며 우리 역사의 파수꾼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나라 국사 교과서는「동이전」이나「일본서기」 중심이 아니라『삼국사기』중심으로 쓰여져야 한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가 겸허한 마음으로『삼국사기』를 꼼꼼히 읽어 봐야 한다. ― 식민사학을 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