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362 : 고려의 역사 130 (제17대 인종실록 9) 본문
한국의 역사 362 : 고려의 역사 130 (제17대 인종실록 9)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4. 묘청의 난과 서경 세력의 몰락(계속)
인종의 신임을 확인한 묘청은 다시금 '칭제건원'을 상소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끈 서경 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이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대회궁 건설 후 잇따라 계속된 재해 때문에 묘청의 입지는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은 극약처방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정하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할 것을 건의 했다. 하지만 인종은 간관들의 반대에 부딪혀 서경 행차를 거부하자 1135년 정월 묘청은 결국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과 병부상서 유참, 사재소경 조창언 등과 함께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으며 자신들의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묘청을 왕으로 옹립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묘청의 반란은 왕을 교체하기 위한 반란이 아니라 개경 세력을 제거하고 인종으로 하여금 서경 천도를 시행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호를 정하고 연호를 체택하고 군대명칭을 새로이 하는 등 반란이 성공한다면 새로운 나라를 개국할 수도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반란군은 난을 일으킨 후 곧 국왕의 조서를 날조하여 서경 부유수 최자, 감군사 이총림, 어사 안지종 등을 잡아가두고 또 가짜 승선 김신을 파견하여 서북면 병마사 이중병과 그의 수하 장수들, 그리고 각 성의 지휘관들을 포박하여 모두 서경의 소금 창고에 가두어 두었다. 또한 서경에 머물던 개경 출신들을 모두 가두고 군사를 절령(자비령)으로 파견하여 통로를 차단하고 서북면 내에 있는 모든 군대를 서경에 집결시켰다.
묘청과 조광을 비롯한 서경의 문무대신들은 대화궁의 관풍전에서 전략을 짜고 군사를 몇 조로 나누어 곧바로 개경을 공격하는 기습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 개경은 서경의 반란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다. 다만 서경측은 인편으로 백수한에게 묘청이 군대를 일으켰으며, 곧 개경의 역적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뿐이다. 백수한은 이 편지를 받고 그 내용을 인종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인종은 문공인을 불러 논의했으나 문공인은 편지의 내용이 사실인지 의심스럽다며 비밀에 부쳐두고 지켜볼 것을 건의했다.
그런데 병졸 최언과 한선정이 황주 땅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라며 '개경으로 왕래하는 길이 이미 서경의 반란군에 의해 차단되었다'고 보고함으로써 묘청의 난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서경의 반란 소식이 사실임이 확인한 인종은 백관을 소집하여 회의 끝에 반란군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김부식을 원수로 임명하고 내시 유경심, 조진약, 황문상을 서경으로 급파하여 군사행동을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서경군은 왕에게 서경으로 이어할 것을 청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변고를 당할 것이라는 편지를 올리고, 뒤이어 겸교첨사 최경을 개경으로 보내 왕에게 글을 올렸다.
"폐하는 음양의 지당한 말을 믿고 도참의 비기(秘氣)를 고려하여 대화의 궁전을 창건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는 형태를 본받았으므로 저희들은 몸을 다바쳐 노력하면서 천도의 날만 기다렸더니 천만뜻밖에 신하들이 주상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다만 자신들의 지방을 고집하면서 천도를 반대할 뿐 아니라 나라에 공헌이 되는 일까지 방해하고 있습니다. 민심은 두려운 것이며 뭇 사람의 분노는 막기 어려운 것이니 만약 주상께서 친히 서경에 오시면 병란이 수습될 것입니다."
이 글을 접하고 개경의 대신들은 신하로서 왕을 감히 오라고 하는 것은 불충이니 표문을 가지고 온 최경을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인종은 전쟁이 날 것을 염려하여 오히려 최경에게 폐백을 내리고 분사 호부원외랑 벼슬도 내려주었다.
인종의 이러한 처사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세력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리고 서경파 김안을 비롯한 잔당들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죽이고 토벌군을 출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경 세력의 이 같은 강한 반발에 밀린 인종은 별 수 없이 출병을 명령했다. 그러자 김부식은 우선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인물들인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을 처단한 후 대병력을 이끄고 서경으로 향했다.
김부식의 대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란군 진영에선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군이 안북대도호부(안주)에 도착하면서 반란군 지역에 있던 많은 성들이 정부군에 호응하는 바람에 전세는 점차 반란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김부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반란군을 이끌고 있던 조광에게 누차에 걸쳐 항복을 권유했다.
전세의 불리함을 절감한 조광은 항복을 결심하고 묘청, 유담, 유호 등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경 윤첨을 시켜 개경으로 보냈다. 그런데 개경에 도착한 윤첨이 옥게 갇히자 조광은 항복을 해도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전 군사들에게 결사항전을 명령했다. 그리고 개경측의 회유교섭도 단호히 거절하고, 인종이 보낸 전중시어사 김부, 내시 황문상을 죽였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 이덕경도 죽여버렸다.
이렇듯 전면전을 선언한 조광은 정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대동강을 따라 1,170칸에 달하는 성을 쌓고 정부군의 총공세에 대비했다. 하지만 정부군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장기전이 지속되자 식량이 고갈되어 굶어죽은 사람이 속출하는 바람에 항전 1년여 만에 서경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 지휘관들이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묘청의 난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묘청의 난이 제압됨으로써 고려 조정 내의 서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으며, 불교 세력도 상당히 쇠퇴하였다. 반대로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의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로 인해 서경 세력과 균형이 깨져 문신귀족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은 곧 왕을 능멸하고 무신을 홀대하는 풍조로 이어져 결국 무신정변의 원인이 된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364 : 고려의 역사 132 (제17대 인종실록 11) (0) | 2011.09.18 |
---|---|
한국의 역사 363 : 고려의 역사 131 (제17대 인종실록 10) (0) | 2011.09.17 |
한국의 역사 361 : 고려의 역사 129 (제17대 인종실록 8) (0) | 2011.09.15 |
한국의 역사 360 : 고려의 역사 128 (제17대 인종실록 7) (0) | 2011.09.14 |
한국의 역사 359 : 고려의 역사 127 (제17대 인종실록 6) (0) | 2011.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