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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0 : 고려의 역사 128 (제17대 인종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360 : 고려의 역사 128 (제17대 인종실록 7)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3. 이자겸의 난과 고려 조정의 혼란(계속)
이렇듯 이자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을 독살하려고 하자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이자겸의 왕위 찬탈 흑심을 알고 충성심이 은근히 발동하여 드디어 왕에게 충성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고려 왕실이 멸망의 위기에서 회생 가능한 기회로 다시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척준경의 이런 결단이 없었더라면 고려 왕실은 이자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척준경이 충성을 맹세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종은 친필로 쪽지를 써서 환관 조의를 시켜 척준경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오늘 숭덕부 군사들이 병장기를 가지고 대궐 북쪽으로 올 것이다. 만약 그들이 침문을 침입하여 내가 살해를 당한다면 그것은 내가 덕이 없음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원통한 것은 태조가 창업하고 역대 성왕이 이어온 왕통이 내 몸에 이르러 만약 타성으로 바뀐다면 이는 나만의 죄가 아니라 실로 나를 보좌한 대신들의 심대한 치욕으로 남을 것이다. 그대는 속히 대책을 강구하라."
이처럼 인종은 참으로 끈질기게 회유와 협박, 양심을 건드리며 척준경의 충성심을 충동하여 척준경을 끌어들여 왕권을 되찿으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왕의 친서를 받은 척준경은 인종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감지하고 장교 7명과 관노 20여 명을 인솔하여 궁궐로 향했다. 그때 이들에게는 무기가 없어 목책나무를 몽둥이 삼아 뽑아든 채로 달려가고 있었다.
환관 조의의 인도로 그들이 궁궐로 들어가자, 순검도령 정유황이 군사 1백 명을 이끌고 군기감으로 들어가서 남아 있던 갑옷과 병기를 꺼내 나누어주고 연경궁으로 향했다. 그는 도중에 이자겸의 수하인 소경 유원식을 만났는데, 그가 이자겸에게 알릴 것을 염려하여 그자리에서 죽여버렸다.
그 사이에 척준경은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천복전으로 달려가니 소식을 들은 인종이 이미 마중을 나와 있었다. 척준경이 인종을 인도하여 궁을 빠져 나오자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이자겸의 수하들이 활을 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척준경이 고함을 치며 호령 하자 위세에 눌린 그들은 공격을 멈추었다.
척준경은 인종을 안전한 군기감에 데려다 놓고 수하들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한 다음 승선 강후현을 파견하여 이자겸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그러자 사태를 직감한 이자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복을 입고 나타났다. 척준경은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모두 팔관보에 가두고, 그를 호위하던 장군 강호와 고진수를 죽였다. 또한 병사들을 풀어 그의 잔당들을 모두 잡아들이거나 죽이고, 왕을 다시 궁으로 모셔갔다.
이 때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는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병력 1백여 명을 이끌고 광화문에 도착하였으나 문이 굳게 닫혀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자덕, 김인규 등과 함께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병부로 갔다. 그는 그때까지도 이자겸이 체포된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녁 무렵에 순검 병사들이 병부로 달려와 자신을 포박했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 이자겸과 자신의 형제들을 비롯한 도당이 모두 체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자겸 일당이 모두 체포된 다음 날, 궁을 청소하던 내시들이 내침에서 헌화사 승려 의장을 발견했다. 그는 침소에 숨어 있다가 왕을 시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 역시 내시들에 의해 압송되어 팔관보에 갇혔다.
1126년 5월에 일어난 인종의 이 역전극으로 이자겸의 난은 평정되었고, 이자겸은 그의 처 최씨와 아들 이지윤 등과 함께 영광에 유배되었다. 조신들은 대부분 그를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으나 인종은 이자겸은 자신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므로 죽일 수는 없다고 거부하며 유배형에 그친 것이다. 이들 외에 이자겸의 두 딸이 왕비에서 쫓겨났고, 이지미는 협주로, 이공의는 진도로, 이지언은 거제로 각각 유배되었으며, 측근 30명과 사노비 90명도 각지에 유배되었다.
귀양길에 오른 이자겸은 몇 달 후 귀양지에서 죽었으며, 그의 물락으로 경원 이씨는 그 이후 다시는 왕비를 내지 못하고 귀족 반열에서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전형적인 유형이었는데, 외척으로 급성장했던 한 가문이 과욕으로 말미암아 참담한 몰락의 길을 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 바로 이자겸의 난과 인종의 역전극 드라마 같은 역사였다.
그러나 '토사구팽'이라 했던가, 이자겸을 체포하여 인종을 사지에서 구해 고려 왕실의 왕권을 되찿게 해준 척준경은 이듬해 3월,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의 죄"라는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로 유배되었다가 곡주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등창으로 죽었다.
등창은 일종의 홧병로 기골 장대한 무장 척준경이 결국 인종으로부터 토사구팽당했다는 분함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그 분을 삭이다가 등창이 터져 죽은 것이다. 이는 후삼국 시대의 영웅 후백제의 견훤이 왕건에게 귀순하여 반란으로 자신의 금산사에 구금하고 왕위를 찬탈한 자신의 아들 신검을 고려군을 도와 징벌하고 통일을 본 후에야 그 울분이 등창으로 터져나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자겸이 죽고 난 뒤 3년이 흐르자 인종은 자신의 외조모이자 장모인 자겸의 처 최씨를 개경으로 소환하였다. 이 때 인종은 이자겸을 다시 한양공에 봉하고 최씨를 변한국 대부인에 봉함으로써, 중국의 진시황이 웅에 가두었던 자신의 모친을 함양 감천궁에 모신 선례를 따랐다. 인종의 이 같은 행동을 두고 사관들은 그를 우유부단한 왕이라고 평하기도 했고, 원수를 용서하고 덕을 펼친 관용 있는 왕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김부식은 후자의 평가를 취하여 그에게 어질 인(仁)자를 붙여 묘호를 인종이라 하였다.
척준경
척준경(拓俊京, ? ~ 1144년)은 고려 중기의 무신이며, 곡주(谷州: 황해북도 곡산군) 출신이다. 뛰어난 용맹으로 여진족 정벌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곡산 척씨(谷山拓氏) 가문의 시조이며,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척위공(拓謂恭)의 아들이다.
생애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무뢰배와 사귀므로 서리(胥吏) 되기를 바랐으나 되지 못했다. 왕자 신분으로 계림공(鷄林公) 옹(顒)으로 불리고 있던 숙종(肅宗)을 섬기게 되어 추밀원 별가(樞密院別駕)가 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여진족 정벌
1104년(숙종 9) 음력 2월 동북면 병마사 임간(林幹)이 정주(定州)에서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무리하게 출정시켰다가 동여진과 싸워 크게 패했는데, 척준경이 적장 둘을 베는 등 추격해오는 적의 기세를 꺾었기 때문에 남은 병사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임간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파면되었으나, 척준경의 이름은 이 싸움을 계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천우위 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가 되었다.
숙종은 윤관으로 임간을 대신하게 하였으나, 음력 3월에 윤관이 싸워도 여진족에게 밀려 강화를 청하고 돌아오자 크게 분노하여 여진 정벌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숙종이 승하한 후 즉위한 예종(睿宗)은 1107년 17만 대군을 편성하여 여진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척준경은 지난날 지은 죄를 윤관이 용서하였기에 용감히 싸워 발군의 활약을 보였다.
1107년의 활약
1107년(예종 2) 음력 12월 출정하기에 앞서 여진족 추장들에게 예전에 억류했던 추장들을 풀어준다고 하여 고려 땅으로 불러들이고는 모두 죽였는데, 고려 측의 말을 믿지 않은 일부 추장은 천리장성 밖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다. 윤관을 따라 중군 병마녹사(中軍兵馬錄事)로 출정한 척준경은 김부필(金富弼 : 김부식의 형), 최홍정과 함께 이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출정 후 여진족들이 석성(石城)에서 완강하게 농성하자 선두에 서서 여진족을 무찔렀고, 그 때문에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의 전공으로 비단 30필을 하사받았다.
1108년의 활약
1108년 음력 1월 윤관이 거느린 군사가 진군하던 중 가한촌(加漢村)에서 매복에 걸려들어 대부분 죽고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척준경은 아우 척준신(拓俊臣)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진 속으로 돌격하여 여진족들이 포위를 풀고 달아나게 했다. 무사히 영주(英州 : 고려가 점령지에 설치한 9성 중의 하나)로 돌아온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해하였다. 음력 2월에 여진 군사 2만이 영주성을 공격하려 하자 척준경은 결사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서 싸웠다. 척준경의 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여진족들은 더 이상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달아났다.
이후 왕자지(王字之)가 갑작스런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원하여 여진족들을 패퇴시켰으며, 웅주(雄州 : 역시 9성 중의 하나)가 공격받았을 때 군졸의 옷을 입고 성을 빠져나가 정주에서 원군을 거느리고 와 여진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음력 8월과 9월에도 왕자지와 함께 싸워 전공을 세웠으나, 이후 여진의 반격이 거세지고 조정에서도 화친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1109년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여진족을 상대로 수많은 전공을 세움으로써 명성이 높아지고 수차례 승진을 거듭했으며 예종은 척준경의 전공을 치하하는 뜻에서 아버지 척위공을 궁궐로 불러들여 위로하기도 했다.
이후 여진족에 대한 태도
여진족을 정벌할 때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용맹을 떨쳤던 척준경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여진족을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1115년 음력 1월 요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완안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고 황제라 칭하자, 요나라의 천조제 야율연희(耶律延禧)는 대군을 편성하여 여진족을 진압하려 했으나 요나라군은 금나라군에게 대패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천조제는 다시 15만 대군을 편성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려 했는데, 이때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어 금나라와의 싸움에 군사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대다수의 신하는 군사를 보낼 것을 주장했으나 척준경은 김부일·김부식 등과 함께 여진족 정벌 이후 국력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결국 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천조제는 금나라군과 싸워 또 한 번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천조제는 음력 11월에도 사신을 보내 고려군의 출병을 요청했으나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1126년 음력 3월 조정에서 금나라를 받드는 것에 대해 논의하자 대부분의 신하가 반대했으나,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금나라가 강대해졌으므로 섬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와 금나라 사이에 군신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이자겸과의 관계
협력척준경은 인종(仁宗)이 등극한 후 권력을 잡은 이자겸을 돕게 되며, 이유는 명확치 않으나, 이자겸의 다섯째 아들인 이지원(李之元)이 척준경의 사위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자겸의 권세가 커짐에 따라 척준경의 위상도 높아졌으며,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拓純) 역시 벼슬이 높아졌다. 척준경은 인종 초에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라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인종은 이자겸이 분에 넘치는 전횡을 일삼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1126년(인종 4) 음력 2월 지록연(智祿延) 등이 인종의 뜻을 받들어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거사하여 궁궐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척준신과 척순도 살해당하고 궐 밖으로 시체가 던져졌다.
뜻밖의 사태에 이자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척준경은 군사를 모아 대궐로 가서 위세를 보이자 오히려 거사한 지록연 등이 위축되어 대궐을 지키기만 했다. 인종은 친히 나와서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해산하게 하고 재물을 하사했으나, 척준경은 성을 내며 대궐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지록연이 이끄는 군사가 밤에 공격해올 것을 우려하여 대궐의 전각에 불을 지르고 공격했다. 이 와중에 화살이 인종이 있는 자리까지 날아가 수비군들이 방패로 가려 막기도 했다.
인종은 불길이 계속 번지자 어쩔 수 없이 신하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이때 척준경은 거사에 가담한 장군들과 문관들을 죽였다. 이자겸은 강압적으로 인종의 거처를 자신의 집으로 옮기도록 했으며, 이 일 때문에 이자겸과 척준경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제거
그 후 이자겸이 노골적으로 왕위를 노리기 시작하자 이자겸 일파를 제거할 방안을 찾던 인종은 최사전(崔思全)의 말에 따라 척준경을 이자겸에게서 떼어내 이자겸의 군사적 기반을 제거하려 했다. 척준경은 최사전의 말에 설득되었으며, 얼마 후 이자겸의 셋째 아들인 이지언(李之彦)의 종이 척준경의 종에게 궁궐을 불사르고 인종에게까지 화살을 날린 것이 죽을죄라고 비난하자 성을 내며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자겸이 아들들을 보내 화해를 청했으나 척준경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때마침 인종이 김부일과 최사전으로 하여금 이자겸 제거를 재촉하자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고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올렸다.
1126년 음력 5월 척준경은 궁궐로 들어가 인종을 호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자겸의 군사들이 저항했으나 척준경의 위세에 눌려 간단히 제압되었으며, 대세가 기울었음을 안 이자겸은 소복 차림으로 인종 앞에 나온 후 곧바로 옥에 갇혔다가 영광으로 유배되어 훗날 귀양지에서 사망했다. 인종은 척준경의 공을 표창하고 위사공신(衛士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또한 문하시중으로 삼으려 했으나, 척준경은 이를 사양하였다. 그해 음력 11월 인종은 척준경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공신당에 걸게 했다.
그러나 척준경의 위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척준경이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내세우며 권세를 부리려 하자 인종은 척준경을 꺼리게 되었으며, 마침내 정언(正言) 정지상이 척준경의 옛 죄를 들어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1127년 음력 3월 암타도(巖墮島)로 귀양 가게 되었다.
말년과 죽음
인종은 1128년 음력 4월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참작하여 척준경의 귀양지를 암타도에서 고향인 곡주로 옮기게 하였으며, 1130년 음력 10월에는 가족들과 한곳에 살도록 했다. 또한 1132년 음력 11월에는 척준경의 아들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게 하였다.
1144년(인종 22) 인종은 척준경을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에 임명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에피소드
척준경과 인종 사이에 인종이 꾼 꿈의 해몽에 대한 일화가 있다.
이자겸이 제거된 후 그의 두 딸도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 무렵 인종은 깨 다섯 되와 황규(黃葵) 서 되를 얻는 꿈을 꾸었는데, 척준경은 이 꿈이 아들 다섯을 얻고 그 중 세 명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그의 말대로 새 왕비가 된 공예태후(恭睿太后) 임(任)씨의 자식들 중 의종(毅宗), 명종(明宗), 신종(神宗)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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