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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1 : 고려의 역사 129 (제17대 인종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361 : 고려의 역사 129 (제17대 인종실록 8)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4. 묘청의 난과 서경 세력의 몰락
이자겸의 난으로 고려 왕실은 완전히 권위를 상실하고 하마터면 왕위를 다른 성씨에게 빼앗길 뻔하는 고초를 겪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래 200년 동안 유지된 사직이 이처럼 커다란 위기에 놓이기는 처음이었다. 따라서 난이 수습된 뒤에도 그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었고, 급기야 국도를 옮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치달았다.
인종은 이자겸의 난이 종결된 후부터 줄곧 왕권강화에 매진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서경 천도 계획을 세운다.
이자겸의 난을 겪으면서 인종은 개경의 귀족 세력이 왕권을 수호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국도를 옮겨 왕실의 위상을 되찿고자 했는데, 마침 그때 개경의 지덕이 다하여 국도를 서경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대두했다. 풍수설에 근거한 이 같은 주장은 인종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고, 결국 서경천도론은 조정의 중론으로 떠오른다.
서경 천도를 처음 내 세운 사람은 서경의 승려 묘청이었다.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불리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
묘청은 개경이 이미 업운이 쇠잔하여 궁궐이 불탄 것이라며 왕기가 서려 있는 서경으로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서경천도론이 현실화될 경우 자신들이 조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인종에게 묘청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린다.
"묘청은 성인이며, 그의 제자 백수한도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국가의 대사를 소상히 자문한 후에 정사를 처리한다면 반드시 국가의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지상,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등은 대신들에게 이 문건을 돌리면서 서명을 받기 시작하였고,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 승선 이지저 등을 제외한 중신들의 동의를 받았다.
상소문이 제출되자 인종은 묘청을 입궐토록 했다. 그리고 묘청에게 국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태평성대를 개창할 방도가 없는지 문의하였다. 그러자 묘청은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위치를 설정해주었다.
"제가 보건데 서경 임원역의 땅은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크게 번창할 지세)인데, 만약 이곳에 궁궐을 짓고 전하께서 옮겨 앉으시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금나라가 공물을 바치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고 주변의 26개 나라가 모두 조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어 보면 묘청은 풍수지리를 신봉한 혹세무민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인종은 왕비와 외척들에게 휘둘려 왕권이 미약하였으며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이자겸의 전횡으로 지도층과 외척들이 매관매직과 호화사치로 부패하였고 그래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을 잊고 오로지 허망한 풍수와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다고 생각한 우둔한 왕이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무속과 무당이 번창하고 운수를 믿고 토정비결을 신봉하며 조상묘터가 잘못되었다며 조상묘를 이장하는 대통령이나 사회지도층, 재벌들이 벌이는 행태나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와 풍습은 오늘날까지도 허망하기 짝이 없는 미신에 매료되어 있는 사회이다.
묘청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인종은 서경을 방문하여 묘청과 백수한에게 임원역의 지세를 보게 하고 궁궐을 신축하기 위해 1128년 11월 궁궐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김안으로 하여금 공사를 총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때 개경에서도 왕궁 복구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엄동설한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공사를 독촉하였고, 이듬해인 2월 드디어 서경에 대화궁이 완성되었다. 물론 막대한 재원과 인력이 투입되었음은 물론이다.
궁궐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여 낙성식을 가졌다. 그때 묘청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포문을 올려 칭제건원(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함)할 것을 권고하고, 주변국과 협공하여 금을 치라고 하였다. 하지만 중신들이 반대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화궁 축성 후 인종은 한동안 서경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 이듬해 서경 중흥사 탑이 화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두고 대신들이 서경에 궁궐을 지으면 재난이 사라진다는 묘청의 말이 거짖임이 판명되었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묘청은 이에 개의치 않고 대화궁 주변에 성을 쌓을 것을 주청하여 임원궁성을 건설하고, 궁성 내에 문수보살을 비롯한 여덟 보살을 안치시킨 팔성당을 설치했다.
그 후 인종은 다시 개경으로 가서 머물다가, 1132년에 왕궁을 수축하자 서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인종을 태우고 가던 말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다가 진창에 빠져버렸고, 호송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찿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그날 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133년 직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간언하였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인종은 오히려 이듬해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로 삼고 자색의 의복까지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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