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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3 : 고려의 역사 131 (제17대 인종실록 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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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3 : 고려의 역사 131 (제17대 인종실록 10)

두바퀴인생 2011. 9. 17. 02:04

 

 

 

 

한국의 역사 363 : 고려의 역사 131 (제17대 인종실록 10)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4. 묘청의 난과 서경 세력의 몰락(계속)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이 묘청의 난을 낭불양가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는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의 주장에도 문제는 없지 않다. 대금정벌론을 내세워 잃었던 민족의 위상을 되찿으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당시 국제정세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또 서경 천도의 당위성을 지나치게 풍수사상에만 의존한 것도 문제였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더라도 고려가 금을 정벌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금은 요를 멸망시키고 다시 남하하여 송을 남쪽으로 몰아낸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중국대륙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동원가능한 막대한 국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나 금은 잘 훈련된 기마병을 주력부대로 영토확장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 데 반해 고려군은 보병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어 기마전술에는 약한 면이 있었다. 물론 앞서 윤관이 별기군을 창설하여 여진족과 싸움을 벌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동북 9성을 개척하여 전쟁에는 승리한 적은 있으나, 별기군은 고려 농민들까지 동원한 병농일치제의 군대였고 당시 고려의 국력이나 주민 및 병력 수를 고려해도 중국의 금나라와 대적한다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서경 세력의 금 정벌론은 감상주의에 삐진 오판이거나, 아니면 서경 천도를 실현시켜 자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계책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천도와 같은 국가 중대사를 단순히 풍수설에만 의존하였다는 것도 문제였다. 풍수설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논리를 곁들여 개경 세력의 입지를 약화시켰더라면 오히려 서경천도론을 공론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주장이 이처럼 허무맹랑하고 근본적인 정당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점점 입김이 약해지고 있다고 해서 대규모 군사를 일으킨 것은 결국 내부 분열과 몰락으로 개경 세력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인종은 묘청을 무척 신임하였고 서경 세력은 이자겸의 난 이전보다 훨씬 강화된 상태였다. 그런데 군사를 일으키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은 스스로 몰락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며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의 정치력의 한계를 증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묘청의 서경천도론이나 금국 정벌론은 당시 인종이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개경 귀족들에 대한 실망감에 빠져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심리적인 공허감이 팽배한 가운데, 승려에 불과한 묘청의 풍수설에 현혹되어 섣불리 천도를 생각하고 궁궐을 짓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나라가 혼란하고 지도자가 확고한 신념이 부족하다면 이처럼 난신과 간신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기 쉽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외척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왕권의 취약함, 그로 인해 그들의 권력의 횡포를 방치하다 정변이 일어나 고려 왕조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점, 그래서 척준경을 이용하여 힘들게 이자겸의 난을 제압하였으나 개경 귀족들의 득세로 왕권이 미약하여 조정의 공론을 강력하게 이끌지 못했다는 점 등이 사건의 원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묘청

묘청(妙淸, ? ~ 1135년)은 고려 중기의 승려이다. 일명 정심(淨心)이라 불렸다.

 

생애

현재의 평양인 서경에서 출생했다.

 

1126년(인종 4)에 백수한(白壽翰)이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 서경에 파견되자 묘청을 스승이라 하고, 두 사람은 음양비술(陰陽秘術)을 사용하면서 백성들을 현혹시켰다. 또한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1127년(인종 5년) 묘청 등에게 깊이 현혹된 서경 출신 정지상의 추천으로 고려 인종의 고문이 되었다. 당시의 고려 정계에서는 이자겸의 난 이후에 진보적인 성향을 띤 국학파(國學派) 세력과 보수적인 한학파(漢學派) 세력으로 분파되어 있었다. 묘청은 정지상과 더불어 신진 관료들이 주축이 된 서경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는 도참설을 근거로 서경(西京) 천도 등의 정치 개혁과 금국정벌론을 펼쳤다.

 

정지상 등의 도움으로 묘청은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인 인종은 1127년(인종 5)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하였다. 그 뒤 1128년(인종 6) 묘청이 진언하여 서경에 새 궁궐인 대화궁을 짓기 시작한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1129년(인종 7)에 신궁이 완공되었다.

 

1131년(인종 9)에는 인종을 설복시켜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보살·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像)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김부식·이지저(李之底) 등 사대적(事大的)인 개경의 귀족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

 

1135년(인종 13년) 묘청은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병부상서 유담·사재소경(司宰小卿) 조창언(趙昌言)·안중영(安仲榮) 등과 함께 서경에서 거병한 뒤 군사를 보내어 절령(岊嶺) 길을 차단하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고, 곧장 개경으로 진군하겠다고 밝힌다. 이때 김부식을 원수로 하는 토벌군이 쳐들어오자, 수하에 있던 조광이 그를 살해하였다. 대위국은 1년여를 더 버티다 고려군에게 패망하여 그 자취가 사라지게 되었다.

 

평가

신채호의 평가

 

단재 신채호는 이 사건에 대하여 '일천년래 대사건(一千年來大事件)'이라고 하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크게 평가하였다. 그는 묘청과 그의 운동이 이후 사대와 주체의 기로에서 주체를 지향했다는 쪽의 평을 내렸으며, 대위국이 김부식 등의 도당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것에 대하여 매우 비통해 하는 방향의 견해를 나타내었다.

 

묘청에 대한 비판

묘청은 간신이란 비판도 있다. 경과에서 보았듯, 자신의 군대마저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묘청에게 금국정벌론은 일종의 여론호도책이며, 묘청이 권력을 얻는 방식이나 세력을 규합하는 방법은 전형적인 간신의 방법이었다고 비판한다. 묘청과 정지상 등이 원했던 것은 단지 개경 귀족 세력이 독점한 권력을 서경 세력이 차지하는 것뿐이라는 비판이다.

 

사실 서경과 개경은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2대 도시였다. 서경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 태조가 중요시하게 여긴 장소였으나, 4대 광종 이후 고려 조정은 개경 귀족 세력이 장악하게 되고, 이에 불만을 품은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이 마침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으로 기댈 곳을 찾던 인종에게 묘청과 도참설, 그리고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권력을 자신들의 것으로 하고자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묘청 일파가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서경으로 수도 이전이 핵심이었다. 기득권 세력인 개경 문벌 귀족 세력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천도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풍수지리설과 금국 정벌이었다. 인종 역시 이자겸의 난 이후 문벌 귀족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고, 기득권 세력이 포진한 개경을 벗어나고자 했다. 이렇게 양자 간에 이해와 맞아 떨어져 일어난 것이 서경 천도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개경 귀족 세력은 당연히 천도운동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 운동이 성공하면 당연히 자신들의 권력과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고생한 것은 백성들이었다.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권력투쟁은 백성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일 뿐이었으나, 그들이 일으킨 대규모 공사와 전쟁에 희생된 것은 백성들이었다. 《고려사》에는 묘청이 엄동설한에 공사 독촉을 심하게 해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당시의 신궁 공사 상황을 전한다. 그러나 농업이 생산의 근간이었던 당시 공역 동원은 농번기가 아니라 농한기, 곧 겨울에 하는 것이 상례였다. 다만 《고려사》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책이므로, 묘청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