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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8 : 고려의 역사 126 (제17대 인종실록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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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8 : 고려의 역사 126 (제17대 인종실록 5)

두바퀴인생 2011. 9. 12. 03:08

 

 

 

한국의 역사 358 : 고려의 역사 126 (제17대 인종실록 5)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3. 이자겸의 난과 고려 조정의 혼란(계속)

 

이렇게 역모사건의 조작으로 정적을 제거한 이자겸은 권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차례로 왕과 결혼시켜 왕비로 삼게 하였다. 그녀들은 원래 인종의 이모들로 당시 풍습으로도 결혼은 금기시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이자겸은 법도와 풍습은 완전히 무시하고 힘으로 그런 억지 결혼을 시켜 무리수를 두었다. 또한 친지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매관매직으로 재산을 축적하였으며, 스스로 국공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등급을 왕태자와 대등하게 보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여 전국에서 축하문을 올리도록 하였다.

 

게다가 그의 자식들까지도 경쟁적으로 큰 집을 신축하여, 개경 거리에는 그들의 집이 나란히 인접하게 되었다.

 

<고려사>는 그들의 이 같은 재산 축적을 "그 세력이 더욱 기고만장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오가며 사방에서 음식 선물이 들어와 항상 수만 근의 고기가 썩어났다. 또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자기 집 종들을 앞세워 남의 수레를 약탈하다가 자기 물자를수송했는데 이에 백성들은 수레를 때려부수고 우마를 끌고 다니는 바람에 모든 길이 소요스러웠다."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일까?  이자겸은 역사에서 수없이 나오는 것처럼 왕의 외척이나 반정공신, 창업공신들이 권력을 독식한 후에 몰락의 길로 걸어가는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권력-축재-매관매직-큰 저택, 재산축적-부귀영화.방탕.타락-가족, 인.친척, 종들의 거드럼, 행패, 강탈 등의 과정을 통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부패지수가 높아질 수록 몰락의 기운은 빨리 찿아오는 법이다.   

 

이렇듯 권력을 남용하던 이자겸은 스스로 지군국사가 되고 싶어 왕에게 자신의 집으로 와서 책서를 수여해줄 것을 요청했고, 임명식 날짜까지 강압적으로 지정하였다. 지군국사란 한마디로 왕의 권한을 가지고 자기가 섭정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요구는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인종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이자겸을 제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져 갔다. 그래도 고려 조정에서는 이자겸의 권력 독주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양심을 갖고 있던 충신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인종에게 이자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청한 사람은 내시 김찬과 안보린이었다. 그들은 인종에게 누차에 걸쳐 이자겸을 제거해야 한다고 간청하여 동의를 얻은 뒤 동지추밀원사 지녹연을 포섭하여 왕명이라며 이자겸을 체포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지녹연은 상장군 최탁과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을 은밀히 물러 왕명이라며 이자겸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이들 무장들은 병권을 쥐고 있던 척준경과 그의 아우 척준신을 싫어하던 사람들이었다. 척준경은 예종 대에 여진정벌 전쟁에서 윤관을 도와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로 이자겸과는 사돈지간이었다. 그런데 이자겸이 권력을 독식하면서 척준경 역시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은 오탁, 권수 등의 부하 장수로 있다가 형의 배경에 힘입어 그들의 상관인 병부상서에 올라 있었다. 따라서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무장들은 척준경과 아우 준신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그때 마침 지녹연이 이자겸을 체포해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한편 이자겸 제거작업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인종은 내시 김찬을 원로 김인존과 평장사 이수에게 보내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도록 했다. 그러나 김인존과 이수는 인종의 이자겸 체포계획에 대해 원칙적으로는 당연하다고 말했지만 현실적으로는 힘이 없으니 오히려 그들 세력에게  당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인종과 이자겸의 다툼에 은근히 뒤로 한 발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이자겸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인종도 어느듯 18세 나이로 자란 청년인 만큼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목숨을 건 한판 승부수를 띄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은 사전 치밀하게 준비되지 못했고 조직적이지 못한 무장들의 섣부른 행동 탓에 더 큰 화근이 되고 말았다. 목표는 이자겸과 척준경이었다. 상대를 파악하고 상황을 분석한 다음에 철저하고 치밀한 준비로 단칼에 그들을 제압해야 했으나, 무장들은 섣부르게 주변 인물만 잘못 주살하는 바람에 이자겸과 척준경이 반격을 막지를 못했던 것이다.

 

이자겸 제거작전 1차 실패 과정은 다음과 같다.

 

1126년 2월 25일 어둠이 내릴 무렵,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과 오탁, 그리고 권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여 병부상서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 내시 척준, 지후 김정분, 녹사 전기상, 최영 등을 죽이고 시체를 궁성 밖으로 더져 버렸다.

 

하지만 내직기두 학문이 성을 타고 넘어가 중량장 지호를 통하여 이자겸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였다.

이자겸과 척준경,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 등은 사태를 접하고 처음엔 매우 당황하였다. 그들은 급히 측근 세력으로 구성된 백관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해결책을 모의한 끝에 착준경의 말에 따라 먼저 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척준경은 시랑 최석, 지후 이후진, 녹사 윤한 등에게 군사 수십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궁성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궁성문이 열리지 않자 척준경의 명령에 따라 궁성문을 부수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고함을 치며 항복을 종용했다. 이에 궁성 병력은 그들이 숫자가 많은 줄 알고 내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이튼날 아침, 척준경은 비로소 자신의 아우 척준신과 아들 척준의 시체를 발견하고 복수를 다짐했다. 그는 군졸을 불러모아 최탁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궁성을 포위할 것을 명령했다. 여기에 승려 의장이 이끄는 헌화사 승병 3백여 명도 가세했다. 이렇게 되자 궁성 병력은 졸지에 포위당한 꼴이 되어 성문 위에서 활을 쏘며 수비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불현듯 빈봉문 위에서 인종이 황색 양산을 펼쳐보이며 나타나자 척준경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왕이 이미 역도들에게 붙잡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척준경의 군사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던 것이다.

 

왕이 수하를 시켜 병졸들에게 "너희들은 왜 무기를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이에 병졸들은 척준경에게 들은 대로 "적이 궁중에 침입하였다고 해서 사직을 수위하려고 왔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인종은 그 대답을 듣고 자신은 무고하니 무장을 햊제하고 물러가라고 명령하고 내탕고를 열어 은과 비단을 꺼내 성 위에 달아내렸다.

 

인종은 시어사 이중과 사인 호종단을 시켜 군사들에게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병졸들이 왐명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척준경이 분노하여 이중과 호종단을 몰아내고 화살 공격을 명령했다.

 

이 때 이자겸은 함문지후 최학란과 도병마사 녹사 소억을 궁문 밖까지 보내서 인종에게 다분히 협박조로 궁중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궁중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종이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협의하여 궁성 공격을 명령했다. 전투 경험이 많은 척준경은 밤이 되면 오히려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날이 어둡기 전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고 말했고, 이자겸은 그의 의견에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