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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7 : 고려의 역사 125 (제17대 인종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357 : 고려의 역사 125 (제17대 인종실록 4)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3. 이자겸의 난과 고려 조정의 혼란
인종 대의 정치적 혼란은 근본적으로 권력이 이자겸과 그 주변 세력들에게 집중된 것에 기인했다. 따라서 예종이 이자겸을 믿고 어린 태자에게 왕위를 넘겨 줄 때 이미 고려 조정의 혼란은 예견되고 있었다.
예종의 죽음 당시 조신들은 어린 태자보다는 왕의 아우들 중 한 명에게 선위하는 것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예종은 자신의 맏아들 구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싶었다. 이 과정에서 왕의 아우들이 지지하는 세력과 태자를 지지하는 세력 간에 서로 논쟁이 벌어지며 파당을 이루었다. 왕의 아우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한 세력은 한안인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관료들로서 안정을 희구하는 사람들이었고, 어린 태자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한 세력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 및 그 주변사람들이었다.
이들 두 세력이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한 예종은 이자겸의 힘을 믿고 14세의 어린 태자 구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나라보다 자식, 자신의 혈통을 내세우려는 인간의 욕심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미 태자를 왕으로 내세우기 위한 이자겸의 치밀한 공작은 자신의 딸인 예종비를 통해 암암리에 예종을 설득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예종이 자신의 아들을 부탁할 정도로 이자겸을 신임했던 것은 단지 그가 자신의 장인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닌듯하다. 오히려 예종이 믿었던 것은 당시 고려 사회에서 경원 이씨(인주, 지금의 인천)의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집안 때문이었다.
경원 이씨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인주(인천) 지방의 호족 세력으로 이허겸의 외손녀가 현종의 비로 책봉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허겸은 안산 김씨 김은부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는데, 김은부의 세 딸이 모두 현종의 왕비가 된 것이다. 또 그 두 딸의 아들들이 덕종, 정종, 문종이다.
이런 까닭으로 경원 이씨는 고려 귀족 사회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허겸의 손자 이자연이 세 딸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보내고, 그 첯딸 인예왕후 이씨의 소생들인 순종, 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경원 이씨는 비로소 고려 귀족 중에 가장 힘 있는 외척으로 발전한다. 또 순종, 선종의 왕비 6명 중 4명이 경원 이씨 출신일 정도로 외척으로서 지위도 굳히게 된다.
하지만 선종이 어린 헌종에게 선위하여 왕숙이던 숙종에게 왕위를 강탈당하는 과정에서 이자연의 손자 이자의가 축출되는 바람에 경원 이씨는 한 때 몰락의 위기를 맞이한다. 문종, 순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왕비를 배풀했던 경원 이씨는 숙종 대에는 왕비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자연에게는 11명이나 되는 아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호부낭중을 지낸 이호도 끼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문종의 맏아들 순종에게 시집보내 외척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순종이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죽는 바람에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순종의 왕비로 입궁한 그의 딸 장경궁주가 순종 사후에 노비와 간통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그의 아들 이자겸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는 불운을 맞이한다.
여동생의 간통 사건으로 파직된 이자겸은 원래 음서로 벼슬에 오른 인물이며, 최충의 손자 최사추의 사위이기도 했다. 왕비의 오빠라는 이유로 과거를 통과하지 않은 그에게 첯 번째 재수된 관직은 합문지후였다. 음서로 오른 그에게 초직으로 합문지후를 내렸다는 것은 아주 파격적인 대우였다. 합문의 관리 합문지후는 정4품의 벼슬로 의전을 주관하며 때론 왕명을 전달하는 중요한 직책이기 때문이다.
파직된 후 이자겸은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자신의 둘째 딸(순덕왕후)을 예종에게 시집보내면서 다시금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벼슬이 참지정사, 상서좌복야 등을 거치면서 정2품 문하평장사에 이르렀고, 이 때 소성군개국백에 봉작됨과 아울러 자신의 여러 아들들도 함께 승진되는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예종 대에 그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예종은 철저하게 중립정치를 구현하면서 외척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자겸은 당시 관료들을 이끌고 있던 한안인과 보이지 않는 권력다툼을 벌이며 자신의 외손자 태자 구가 왕위에 오르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종이 종양으로 병석에 눕게 되어 한 달 만에 죽고, 어린 인종이 왕위를 이으면서 이자겸은 절대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자겸의 힘에 의지하여 왕위에 오른 인종은 정사를 모두 그에게 맡기다 시피하게 된다. 이자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력을 독식하기 위해 정적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이자겸의 정적은 크게 두 부류였다. 첯째는 예종의 아우 왕보로 대표되는 종실 세력이었고, 둘째는 한안인으로 대표되는 지방 출신 관료 세력이었다. 왕보를 비롯한 예종의 아우들은 덕종, 선종, 숙종의 선례에 따라 어린 태자 대신 자신들 중에서 한 명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안인 세력 역시 외척 이자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염려하며 종실 세력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못마땅한 태도로 일관하며 그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지켜본 이자겸은 곧 왕보와 한안인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한안인이 이자겸의 독단적인 처사를 비방하면서 시작되었다. 한안인은 이자겸이 나라의 최고 재상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모두 제집에서 처결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비방했다. 또 이자겸이 최유적을 급사중으로 임명하자 한안인은 내급사중으로 있던 장흥추에게서 최유적이 이자겸에게 노비 20명을 뇌물로 주고 급사중으로 벼슬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이를 사실인 것처럼 공석에서 발표해버렸다.
이자겸이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하며 이 문제를 어사대에서 해명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커지자 한안인은 부랴부랴 꽁무니를 빼고 휴가를 신청한 후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한안인이 칩거하자 한때 그와 함께 예종의 총애를 받던 문공미와 그의 사촌 아우 정극영, 매부 지어사대사 이영 등이 자주 그를 방문하였다. 이를 지켜본 최홍재라는 인물이 이자겸을 찿아가 한안인과 문공미가 붕당을 맺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한다. 최홍재는 예종 시절부터 한안인과 문공미 두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회에 이자겸의 힘을 이용하여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홍재의 역모설을 들은 이자겸은 인종에게 한안인과 문공미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으며 왕숙인 대방공 왕보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는 곧 인종의 왕명을 받아 한안인을 비롯한 문공미, 정극영, 이영 등과 그 주변 인물들을 모두 잡아들엿다.
이 사건으로 한안인은 승주 감물도로 귀양갔다가 도중에 이자겸의 심복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 죽였다. 대방공 왕보도 귀양길에 올랐고 문공미, 이영, 정극영 등 한안인과 자주 만났던 인물들과 한안인 형 안중, 동생 연륜, 종제 한충, 처제 임존, 사위 이정 등 연루자 50여 명이 유배되었고, 그들과 친분이 있는 수백 명의 관료들이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
이처럼 한안인 세력 등이 조정에서 대를 이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자만심에 빠져 자신이 추락될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이자겸의 권력 독주에 대해 비방과 비난만 했지, 상대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하고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방심하였던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권력자에게는 정적이 있기 마련인바, 절대권력자와 가까운 자에게 함부로 정쟁을 일삼는 행위는 결국 그로 하여금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정적인 노림수를 당하게 되는데, 그로인해 애굿은 그의 가족과 인.친척, 동료, 제자들까지 수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가는 정쟁을 하는 경우는 항상 상대방의 힘과 공격을 예상하고 항상 상대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면밀한 감시와 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비하지 못했고, 평소 상대를 누를 수 있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을 찿아내 언제라도 역공을 펼칠 수 있는 대비를 못했던 것이 한안인의 어리석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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