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354 : 고려의 역사 122 (제17대 인종실록 1)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354 : 고려의 역사 122 (제17대 인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9. 8. 02:16

 

 

 

한국의 역사 354 : 고려의 역사 122 (제17대 인종실록 1)

 

제17대 인종

 

인종(仁宗, 1109년 음력 10월 28일 ~ 1146년)은 고려 제17대 국왕 (재위: 1122년 ~ 1146년)이다. 는 해(楷), 는 인표(仁表), 시호인종극안공효대왕(仁宗克安恭孝大王). 예종과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맏아들이다.

 

생애

1109년 예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1115년(예종 10) 음력 2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122년 음력 4월 아버지가 죽자 14살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이 염려되었으나 외조부인 평장사 이자겸이 옹립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즉위 초에는 이자겸이 정권을 틀어쥐고 인종을 위협하였다. 심지어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 즉 인종의 이모들을 모두 인종에게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까지 되었다. 일부 신하들은 이러한 이자겸의 횡포에 반기를 품고 이자겸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이자겸이 과거 윤관의 부하 장수인 척준경과 손을 잡고 권세를 부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자겸은 심지어 인종을 자신의 집에 가두고 자신이 공공연히 왕이 될 것이란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곧 멀어지고 그사이 척준경은 인종과 가까워진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궐내에 침입하여 궁실을 방화하여 왕은 남궁(南宮)에 파천하였으나, 최사전(崔思全)·척준경(拓俊京) 등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잡아 영광에 귀양 보내고, 이듬해 척준경도 귀양 갔다.

 

인종은 개경의 터가 좋지 않은 것 같아 고심하고 있던 차에 승려 묘청이 인종에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 주장하였고, 역시 고려가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왕을 황제로 높이고 연호를 써야 한다는 자주적 사상을 인종에게 설득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 북부의 금나라가 고려를 심히 견제하자 김부식 등 개경파는 이에 크게 반대하였고, 어떻게든 인종이 개경에 머물게 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묘청이 인종의 신임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자 인종은 점차 묘청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1135년(인종 13년) 묘청이 서경에서 대위국을 건국하고 국왕인 고려 인종을 초청하니, 이것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다. 김부식을 서경정토대장(西京征討大將)으로 보내어 이듬해 평정하였다. 인종은 또한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여 1145년 완성을 보았다.

 

1146년(인종 23년) 음력 2월 향년 38세에 태자(太子)에게 왕위를 물리고 병으로 죽었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장릉(長陵)이다.

 

평가

어려서부터 재능과 기예가 있어 음률과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국가 재정을 절약하여 환관(宦官)들을 감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문운(文運)을 일으키고 김부식 등에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가계

  • 폐비 이씨 (이자겸 3녀,이모)
  • 폐비 이씨 (이자겸 4녀,이모)
  • 공예왕후 임씨(恭睿王后 任氏, 1109년~1183년)
    • 의종
    • 대녕후(大寧侯)
    • 익양후(翼陽侯) : 명종
    • 원경국사(元敬國師)
    • 평량공(平凉公) : 신종
    • 승경궁주(承慶宮主) - 공화후 영에게 하가
    • 덕녕궁주(德寧宮主) - 강양공 감에게 하가
    • 창락궁주(昌樂宮主) - 신안후 성에게 하가
    • 영화궁주(永和宮主) - 소성후 공에게 하가
  • 선평왕후 김씨(宣平王后)
    • 장인:이자겸
    • 외조부:이자겸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1. 인종의 우유부단한 정치와 고려왕조의 위기

 

예종이 죽고 14세의 어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은 권력암투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한다. 이 때문에 인종은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묘청이 이끄는 서경 세력과 김부식 중심의 개경 세력 사이에 끼어 수동적인 정치로 일관한다.

 

인종은 예종의 맏아들이자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1109년 10월 기해일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구, 이름은 해, 자는 인표이다. 그는 1115년 2월 7세의 나이로 왕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122년 4월 예종이 죽자 14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7대 왕에 올랐다.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정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과 한안인을 중심으로 한 관료 세력이 서로 정권을 다투고 있었다. 예종 대에 이들은 왕의 중립 정책으로 말미암아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어린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에 한안인은 이자겸의 권력 독점을 비방하다 궁지에 몰려 스스로 휴직을 신청하게 된다. 하지만 한안인은 측근 세력을 중심으로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게 되고, 이를 눈치챈 이자겸은 그들을 모두 역모로 몰아 숙청시킨다. 이것이 '왕보의 역모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122년 12월 예종의 아우 왕보는 역도의 우두머리라는 명목으로 경산부로 추방되고, 중서시랑 평장사 한안인과 합문지후 이중약이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추밀원 부사 문공미, 보문각학사 정극영, 지어사대사 이영 등 수백 명이 유배되엇다.

 

이로써 한안인파를 제거한 이자겸은 조정을 장악하고 권좌에 오른다. 하지만 그에게 힘이 편중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왕권이 미약하게 되어 인종은 유명무실한 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절대권력을 얻은 이자겸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고, 그 뒤에 다시 넷째 딸까지 왕비로 삼게 한다. 또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문하시랑 평장사 척준경과도 사돈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되자 왕권은 고스란히 이자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이자겸 세력 제거계획을 완성한 인종은 원로 김인존과 평장사 이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사에 대한 문의를 하게 되는데, 그들은 원칙론에는 찬성하지만 힘이 열세인 점을 감안해 신중론을 펼친다. 그러나 인종은 승리를 장담하는 김찬 등의 말을 믿고 거사를 명령한다.

 

인종의 명령을 받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은 최탁, 오탁, 권수 등의 무장들과 의논하여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와 척준경의 아우 병부상서 척준신과 아들 내시 척순을 죽이고, 시체를 궁성 밖으로 내던졌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척준경은 군사 수십 명을 이끌고 와 궁성을 포위했다. 이에 궁성 수비군과 척준경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궁성 세력은 수 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인종은 근신 10여 명과 함께 궁궐을 버리고 산호정으로 피신하였다. 패색이 짙어지자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내주려고 의사를 비쳤다. 그런데 조신들의 극렬한 반대를 의식한 이자겸이 선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고, 그때 이자겸의 재종형 이수가 선위를 강하게 반대하여 인종은 가까스로 왕위를 넘겨주는 사태는 모면하였다.

 

하지만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나섰던 최탁, 오탁, 권수 등의 무장들은 살해되었고, 지녹연과 김찬을 비롯한 왕의 측근들도 모두 유배되었다. 또한 인종은 이자겸에 의해 사저에 연금되엇으며, 정사의 결재권을 빼앗기고 음식물을 통제 당하고 행동을 제약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왕을 연금시킨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권력을 독식하며 정사를 농단하였고, 이에 따라 그들과 측근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