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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3 : 고려의 역사 121 (제16대 예종실록 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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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3 : 고려의 역사 121 (제16대 예종실록 6)

두바퀴인생 2011. 9. 7. 02:26

 

 

 

한국의 역사 353 : 고려의 역사 121 (제16대 예종실록 6)

 

 

제16대 예종실록

(1079~1122년, 재위 1105년 10월~1122년 4월, 16년 6개월)

 

3.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계속)

 

 하지만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독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시대 관찬지리서와 지도류는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백 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백 리설'이 형성되었다. 또 윤관이 진출한 북쪽 한계는 길주 이남에 한정되었다는 17세기 초 한백겸의 주장에 따른 '길주 이남설'이 있고, 이케우치 등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형성되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함흥평야설'이 있다.

 

이들은 조선의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이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날조라고 전제하고, <고려사> 3백 리 개척지역은 관문에서 3백 리쯤에 위치한 함흥평야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시>에 언급된 3백 리에는 의주, 통태진, 평윤진을 제외한 6성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함흥평야설에도 문제가 있다. 이 세 학설 이외에도 공험진을 경원의 아오지보라고 보는 두만강 북설도 있다.

 

이렇듯 축성 위치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9성은 설치된 이후에도 고려의 문젯거리였다. 비록 9성을 설치하여 여진정벌에 성공하긴 했으나 여진의 반격이 끓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여진은 이 같은 군사적 대응과 함께 외교경로를 통해 9성을 반환 조건으로 화의조약을 제의해왔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 내부에서는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9성 반환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김인존이었다. 그는 9성 때문에 여진과 고려 양측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언급하면서 고려가 비록 9성을 차지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거란과의 국경분쟁은 일어날 소지마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되면 고려는 졸지에 여진과 거란을 상대로 불리한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9성을 돌려주고 여진으로부터 조공을 확약받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김인존은 처음 윤관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여진정벌을 결정할 때도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논리가 뛰어나고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었기 때문에 숙종 대부터 왕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예종 역시 그를 매우 신임하고 있었지만 여진정벌만큼은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그런데 9성 건립 후 여진족의 반격으로 전쟁이 끓이지 않게 되자 예종은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다. 그때 김인존이 다시 나서서 애초에 여진을 공격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9성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 백관들의 대세도 김인존의 주장을 따르고 있었다. 박승준, 한상 등이 반환론을 공격하며 9성을 지킬 것을 주장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변방에 나가 있던 윤관도 여진측에서 강화를 제의하자 그들 교섭단을 위해 길을 열어준 상태였다. 당시 오연총이 영주성에서 대패했기 때문에 고려군은 기세가 많이 꺽여 있었다. 따라서 9성의 반환으로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병영 내부에서도 확산되고 있었다.

 

9성 반환과 관련한 움직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1109년 7월 예종은 문무 백관 3품 이상의 모든 신하들에게 가부를 물은 뒤 9성 반환을 결정하였다. 반환조건은 여진이 다시는 고려를 침범하지 않고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는 내용이었다.

 

여진과 고려 사이에 강화조약이 맺어지자 9성 반환은 기정 사실화되었고, 고려군이 각 성에서 철수함으로써 동북 9성을 사이에 둔 고려와 여진의 전쟁은 사실상 끝이난 셈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윤관과 오연총, 임언 등의 패전한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예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홍사, 임의, 이오 등이 주축이 된 이 탄핵사건은 수십 일을 끌다가 예종의 중재로 합의점을 찿았는데,  윤관에게는 죄를 주지 않고 오연총을 비롯한 몇명의 책임자에게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하지만 그들도 몇 개월 뒤에 다시 관직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에종과 윤관의 여진정벌은 이처럼 허무하게 끝이 났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여진에게 대패했던 과거의 치욕을 씻었고, 별무반을 조직했던 경험으로 정규군 이외에도 언제던지 농민군을 동원할 능력을 배양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비군인 농민을 동원할 수 있는 병농제를 도입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이후 여진이 함부로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게 된 계기도 마련하게 되었다.

 

이 같은 여진정벌과 동북 9성 건립을 주도했던 윤관은 파평 윤씨 집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앗다. 문종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 보궐을 지냈고, 숙종 대에 누차에 걸쳐 승진하여 한림학사 승지에 임명되엇다. 그리고 예종 즉위 후에 정2품 평장사를 지내며 여진정벌을 준비하여 상장군으로 활약하였으며, 종전 후에는 문하시중에 올랐다가 1111년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언인, 언순, 언식, 언이, 언민 등 아들이 있었는데, 언순은 예종 대에 남원부사를 지냈고, 언식은 글씨와 그림에 조예가 깊었으며, 언이는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김부식과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다가 풀려나 의종 대에 정당문학을 지냈다. 나머지 두 아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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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9성 최전방은 두만강 북쪽”

 
9성 바로잡기 본부 “함흥평야 주장은 식민사관”
유석재 기자

 

 

 

고려시대 윤관(尹瓘·?~1111) 장군이 개척했다는 ‘동북 9성(城)’은 과연 어디였을까? 기존 학설처럼 함흥평야 일대였을까, 아니면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포함하는 영역이었을까?

윤관 9성 역사바로잡기 운동본부(본부장 이형석)는 최근 교육부 장관 앞으로 ‘교과서 수정 건의서’ 한 통을 보냈다. ‘동북 9성의 최전방거점인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에 있었으며, 이를 명백히 밝힌 내용을 8차 교육과정의 교과서 개편 때 반영해 식민사관의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북 9성’은 1107년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창설한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섬멸한 뒤 새로 개척한 땅에 쌓은 성이다. 하지만 그 위치에 대한 해석은 분분했다. 조선시대 한백겸(韓百謙) 등의 실학자들은 ‘길주(吉州) 이남 함경남도설’을 제시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은 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 일대라고 했고, 이것은 오랫동안 정설이 됐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자 방동인(方東仁) 전 관동대 교수, 김구진(金九鎭) 전 홍익대 교수 등은 “9성의 최북단은 두만강 북쪽이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고려사’ 지리지에 “여진을 쳐서 9성을 설치하고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 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두만강에 접한) 경원(慶源)의 북쪽 700리에 공험진이, 동북쪽 700리에 선춘현이 있다”고 기록했고 ▲‘동국여지승람’ 회령도호부편도 “공험진은 백두산의 동북쪽에 있다”고 한 것 등이 그 핵심 근거였다. 일본 학자들이 이 기록들을 모두 무시하고 9성의 위치를 억지로 함흥 일대에 비정, 그 영역을 축소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 학계의 입장은 모호하다. 윤용혁 공주대 교수(고려시대사)는 “정설이 없는 상태다. 두만강 이북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그 전후 고려의 국경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북쪽으로 올라가 있어 의아하다”고 말했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지도 없이 “동북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고만 기술했고, 대부분의 사회과부도가 ‘함흥평야설’을 따르는 가운데 일부는 “위치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고 써 놓았다. 반면 북한에선 ‘두만강 이북설’이 정설이다.

공험진·선춘령이 두만강 이북에 있었다고 해도 그 위치가 확실한 것은 아니며, ①연길·용정 일대 ②영고탑(寧古塔·지금의 영안·寧安) 일대 ③돈화(敦化) 일대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최근 연변 일대를 몇 차례 답사했지만 선춘령의 명확한 위치는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 '윤관 9성 역사바로잡기 운동본부'의 이형석 본부장, 고려시대 윤관 장군이 개척한 '9성'은 종래 함흥평야 일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 최전방인 공험진과 선춘령이 두만강 북쪽에 있었다며 교과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석재 기자

 

▲ 사회과부도 교과서의 '윤관 9성' 표기는 오류라고 주장하는 이형석씨는 지도를 통해 공험진과 선춘령의 위치를 설명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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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북서쪽 경계는 만주지역”

     

     

    [동아일보] ■ 복기대 교수, 中역사서들 통해 확인

    명나라가 1388년 고려와의 접경지역에 설치한 지역 군사령부인 철령위(鐵嶺衛)의 위치가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에 나와 있는 한반도의 원산이 아니라 중국 랴오닝(遼寧) 성 번시(本溪) 시 부근이라는 학설이 제기됐다. 이는 고려의 영토가 기존 압록강∼원산 이남이 아니라 최소한 북서쪽 경계는 한반도를 벗어난 만주지역이었음을 뜻한다.

    복기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 국학과 교수(상고사)는 17일 고조선학회(회장 서영대 인하대 교수) 정기학술대회에서 중국 역사서에서 발견한 자료를 근거로 논문 ‘철령위 위치에 대한 재검토’를 발표한다. 현행 국사교과서(89쪽)에는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가 원산에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영토를 회복한 것을 설명하면서 철령위도 그곳에 있었다고 표시하고 있다.

    복 교수는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철령위 자리를 오늘날 함경도 원산만 일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공격에 나선 이성계는 함경도가 아니라 중국 요동으로 향했다”며 “이 모순을 발견하고 중국 지리 역사서를 확인한 결과 철령위의 위치를 랴오닝 성 번시 시 부근으로 새로 설정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明군사령부 ‘철령위’ 위치

    원산만 아닌 랴오닝성 번시市”

    日학자들 잘못된 고증대로

    고려영토 한반도內로 인식


    명나라가 1461년 편찬한 지리서인 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철령위에 대해 “도사성(都司城) 북 240리에 있다. 옛날에는 철령성이었고 지금의 철령위 치소(관청 위치) 동남 500리에 있었다.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 홍무 21년(1388년)에 철령위를 그곳에 설치했다가 26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복 교수가 확인했다.

    도사성은 오늘날 랴오닝 성 랴오양(遼陽) 시이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240리 떨어진 톄링(鐵嶺) 시에 철령위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톄링 시의 이름은 철령의 중국어 발음으로 옛 지명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다. 아울러 처음 설치된 철령위는 이곳에서 동남쪽 5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추정하면 이는 오늘날 번시 시 인근이라고 복 교수가 말했다. 복 교수는 청나라에서 발행한 중국 랴오닝 성 역사서인 ‘성경통지(盛京通志)’와 중국 기전체 사서 24사 중의 하나인 명사(明史)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음을 확인했다.

    복 교수는 “지금까지는 일본학자들이 고증한 철령위 위치(원산) 등으로 인해 고려시대 국경선이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넘지 못하고, 북쪽으로는 함경도 중부지역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며 “고려사에 기록된 대로 고려시대 국경선은 한반도 안쪽이 아닌 북으로는 멀리 선춘령(두만강 북쪽으로 700리)이었고 서쪽으로는 중국 요동지역이었다는 것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