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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5 : 고려의 역사 123 (제17대 인종실록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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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5 : 고려의 역사 123 (제17대 인종실록 2)

두바퀴인생 2011. 9. 9. 03:26

 

 

한국의 역사 355 : 고려의 역사 123 (제17대 인종실록 2)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1. 인종의 우유부단한 정치와 고려왕조의 위기(계속)

 

 한편 연금생활을 하고 있던 인종은 왕권을 회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내의군기소감 최사전과 의논하여 이자겸과 척준경을 이간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그래서 척준경에게 교서를 내려 이자겸을 척결하도록 명령한다. 마침 당시 이자겸과 척준경은 하인들간의 사소한 다툼으로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인종은 지추밀원사 김부의를 시켜 거사를 재촉한다. 그리고 마침내 척준경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

 

이렇듯 인종이 척준경과 힘을 합쳐려 하자 이자겸은 이를 감지하고 인종을 독살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때 자신의 넷째 딸인 왕비의 방해로 실패한다. 그러자  이자겸은 다시 자객을 보내 왕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척준경은 왕이 위험하다는 전언을 받고 군사를 동원하여 이자겸과 그의 일파들을 체포.제거하게 된다. 또한 이 때 왕비로 있던 두 딸도 패출됨으로써 이자겸의 난은 종결되었다.

 

난이 종결되자 조신들은 이자겸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지만, 인종은 그가 자신의 장인인 점을 상기시키며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 그리고 이자겸을 체포한 척준경에게 공신 칭호를 내리고 중서문하 평장사에 임명한다. 하지만 조정을 수습한 인종은 이듬해인 1127년 3월 정지상의 탄핵이 있자 척준경을 암타도에 유배시켜버린다.

 

즉위 초부터 이자겸 세력에 의한 한안인 일파 축출사건으로 피비린내를 풍긴 고려 왕실은 이자겸의 난을 겪으면서 전장을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인종은 개경의 지덕이 다했다는 풍설에 따라 서경천도론에 귀를 기울인다.

 

인종이 서경 천도론에 귀를 기울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개경 세력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는 이자겸의 난 때 보여준 개경 귀족 세력의 방관적인 태도에 대하여 불만스러워 했고, 때마침 승려 묘청을 앞세운 서경 세력의 천도론이 제기되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수창궁이 완전히 불타고 개경의 민심마저 흉흉해졌기 때문에 인종은 서경 천도에 관심을 보였던 것은 당연하였다.

 

서경 천도를 결심한 인종은 1127년부터 자주 서경에 거동하여 명당인 임원역(현재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대화궁을 건설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서경 천도는 거부할 수 없는 현안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반대 세력의 입김에 밀려 천도계획은 점차 백지화되기 시작하였다.

 

묘청을 배척하는 김부식 등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으로 서경 천도반대운동을 펼쳐졌고, 대화궁이 준공 직후에 벼락으로 30여 곳이 파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게다가 인종의 서경 행차 도중 폭풍우가 몰아쳐 인마가 살상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를 빌미로 서경 천도론은 점차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결국 인종도 마침내 천도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동안 복구공사를 마친 수창궁으로 돌아가 개경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서경 천도 계획이 백지화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135년 정월, 묘청을 위시한 조광, 유참 등의 서경 세력이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이라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서경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인종은 김부식을 평서대원수에 제수하고 반란을 진압토록 했다. 왕명을 받든 김부식은 서경파의 일원으로서 개경에 남아 있던 백수한, 김안, 정지상 등을 참수하고 좌.우.중 3군을 이끌고 서경으로 진주했다.

 

김부식의 관군이 개경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길목의 많은 성들이 호응하여 관군이 불어나자 전세는 서경 세력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김부식은 여덟 차례에 걸쳐 반군을 지휘하고 있던 조광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이에 조광은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감을 인지하고 묘청, 유담, 그리고 유담의 아들 유호의 목을 베어 윤첨으로 하여금 개경으로 가져가도록 했다.

 

조광이 이처럼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개경측은 윤첨을 하옥시키고 조광의 단죄를 결정했다. 이 때문에 조광은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인종이 회유교섭차 보낸 전중시어사 김부, 내시 황문상 등을 죽였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 이덕경도 죽여버렸다. 또한 조광은 1,730칸에 이르는 성을 쌓고 관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1136년 2월 반란군은 정부군의 대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반란군의 수장 조광이 스스로 목숨을 끓으므로써 서경 세력이 주도한 '묘청의 난'은 이렇게 허무하게 종결되고 말았다. 이로써 인종은 즉위 후 처음으로 평온한 정국을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인종이 즉위 후 줄곧 신하들의 정권 다툼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중국 대륙에서도 커다란 정세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125년 거란의 요가 여진의 금에게 멸망당하고 북쪽으로 쫓겨났으며 송나라 역시 1127년 금에게 쫓겨 남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되자 중국 대륙의 패권은 금에게 넘어갔으며, 고려 역시 금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이자겸은 금이 힘을 과시하기도 전에 그들의 요구에 따라 군신관계를 맺고 전쟁을 피했다. 그러나 이자겸이 제거된 후 묘청 등이 의하여 사경천도론이 대두되면서 금을 정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하지만 서경 천도론이 힘을 잃고 서경 세력에 의해 묘청의 난이 제압된 이후 북벌론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후 금과 고려는 다소간의 국경 분쟁을 제외하고는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인종 대에는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만호은 혼란이 지속되던 시기였고, 인종은 그와중에서 가까스로 묵숨을 부지하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묘청의 난 이후 김부식 세력에 의해 정국이 안정됨으로써 후반기 10년간은 안정을 되찿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커다란 위업을 남기게 되었다.

 

하지만 정국의 어려움으로 많은 고통을 감내하던 인종은 한동안 평화기를 누리다가 1146년 2월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개경 남쪽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장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