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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6 : 고려의 역사 124 (제17대 인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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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6 : 고려의 역사 124 (제17대 인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9. 10. 03:25

 

 

 

한국의 역사 356 : 고려의 역사 124 (제17대 인종실록 3)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2. 인종의 가족들

 

 인종은 2명의 폐비와 공예, 선평왕후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제3비 공예왕후 임씨에게서 의종, 명종, 신종을 비롯한 대령후 경, 원경국사 충희 등 다섯 아들과 승경, 덕녕, 창락, 영화 네 공주를 얻었다. 이들 중 의종, 명종, 신종 등은 각 왕의 실록에서 다루고 네 부인과 왕경, 원경국사 충희의 삶을 간단히 살펴본다.

 

폐비 자겸의 3녀 이씨(?~1139년)

폐비 이씨는 이자겸의 셋째 딸이며, 인종 모후 덕순왕후 이씨의 친동생이다. 따라서 그녀는 인종의 이모가 된다.

 

인종이 즉위한 후 권력을 독식하게된 이자겸은 권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1124년 8월 외손자인 인종에게  자기 셋째 딸을 시집보내게 된다. 그녀는 인종의 이모가 되기에 현실적으로 혼인이 성립될 수 없는 관계였으나 이자겸의 권력에 눌린 조정 대신들은 이 결혼을 묵인했다.

 

하지만 1126년 이자겸이 축출되자 간관들이 누차 글을 올려 그녀가 인종의 이모가 되므로 왕의 배필로 삼을 수 없다고 간언하였기 때문에 폐출되었다. 아비의 권력욕에 딸은 한많은 생을 살아야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인종은 그녀를 내보내기는 하였으나, 그녀에 대한 대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소생 없이 1139년에 죽었으며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폐비 자겸의 4녀 이씨(?~1195년)

페비 이씨 역시 이자겸의 넷째 딸이며, 인종의 모후 순덕왕후 이씨의 친동생이다. 때문에 그녀 역시 인종의 이모가 된다.

 

그녀는 셋째 언니가 입궁한 다음 해인 1125년 정월 아버지 이자겸에 의해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한다. 이자겸이 그녀를 왕비로 들여보낸 것은 인종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몇 번에 걸쳐 인종의 목숨을 구해준다. 이자겸이 반역을 도모하고 왕을 죽이기 위해 독약을 넣은 떡을 보냈는데, 그녀는 그것이 독이 든 떡임을 은밀히 고백한다. 이에 인종이 떡을 먹지 않고 까마귀에게 던져주니 까마귀가 그것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또 이자겸이 독약을 보내 그녀로 하여금 왕에게 먹이게 하자 그녀는 독약 그릇을 받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져 독약을 쏟기도 하였다.

 

이자겸이 척결된 후 이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폐출된 후에도 인종은 그녀에게 토지와 저택, 노비를 주었다고 한다.

 

의종과 명종도 그녀를 매우 근실하게 대우한 것으로 전해지며 1195년 그녀가 죽었을 때 명종은 왕후의 예식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소생은 없었으며,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공예왕후 임씨(1109~1183년)

공예왕후 임씨는 중서령 임원후의 딸이며 문하시랑 이위의 외손녀이다. 그녀는 이자겸이 척결되고 그의 두 딸도 폐출됨에 따라 1126년 6월 왕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고려사>는 그녀에 대해 탄생설화를 전하고 있는데, 외할아버지 이위는 그녀가 태어나던 날 밤에 황색의 큰 깃발이 그 집의 중문에 세워지면서 깃발의 꼬리가 선경전 치미(용마루 끝 짐승 모형)를 감사고 돌며 휘날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위는 그녀가 후일 궁궐의 선경전에서 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녀가 성년이 되자 평장사 김인규의 아들 지효와 약혼했는데, 혼례날 밤에 김지효가 신부집 대문에 이르러 사경을 헤메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결혼을 사절하고 신랑을 돌려보낸 후 임원후는 점쟁이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쟁이는 그녀가 왕후가 될 운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소문은 이자겸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미 두딸을 왕에게 시집보낸 그가 임원후의 딸이 왕비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때문에 이자겸은 임원후를 즉시 개성부사로 강직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자겸이 축출되고 인종이 왕권을 회복하자 그녀는 과연 왕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127년 의종(18대)을 낳고, 1129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의종 이외에도 대령후 경, 명종(19대), 원경국사 충희, 신종(20대) 등 다섯 아들과 승경, 덕녕, 창락, 영화 등 네 공주를 낳았다.

 

그녀는 당초 둘째 아들 경을 무척 사랑하여 왕태자로 삼고자 하였다. 하지만 인종은 맏아들 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 때문에 의종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명종 12년 1182년에 넷째 아들 충희가 죽었는데, 명종은 모후가 아들의 죽음을 전해듣고 충격을 받을 까봐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후에 태후가 아들의 죽음을 전해듣고 무신들이 죽인 것으로 생각하고 분을 못 이겨 병을 얻었다. 당시 다섯째 아들 왕민(신종)이 치질로 오랫동안 찿아 오지 않자 그 역시 화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이에 왕민이 황급히 모후를 찿아가자 살아 있음을 알고 겨우 근심을 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동안 건강을 유지하다가 1183년 11월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호는 순릉이다.

 

선평왕후 김씨(?~1179년)

 선평왕후 김씨는 병부상서 김선의 딸로 1127년 2월에 차비로 간택되어 입궁했다. 의종 즉위 후 왕태비 연수궁주로 호칭하였며, 명종 9년 1179년에 죽으니 시호를 선평이라 하였다. 소생은 없었으며, 능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대령후 왕경(생몰년 미상)

대령후 왕경은 공예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공예왕후가 그를 편애하여 왕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인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의종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결국 역모로 몰려 유배길에 오른다.

 

의종 즉위 후 대령후에 책봉된 그를 내관 정함이 모함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역모혐의를 받는다. 대간들과 대랍하고 있던 정함은 대간들을 척결할 방책을 모색하던 중 은밀히 산원 정개수를 유인하여 거짓으로 멱모를 고변하게 한 것이다.

 

정개수는 대성 및 대리 이분 등이 '왕을 원망하여 왕경을 추대하고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게 되는데, 의종은 이 말을 믿고 역모자를 처벌하는 한편 왕경을 귀양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간관 김존중이 관리들을 시켜 역모자들을 심문하여 증거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간들과 왕경은 귀양을 면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 그들을 심문하여 보았으나 별다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그들을 고변한  정개수는 무고혐의로 흑산도로 귀양 가고 역모 혐의가 있는 이분 역시 운제현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정함이 자신의 죄가 탄로날 것을 염려하여 또 참소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외척들과 대신들이 대령후 왕경의 집에 자주 출입한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틀림없이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번에는 이분을 심문해야 한다고 김존중도 가세했다. 그는 공예왕후의 여동생 남편인 내시낭중 정서와 의종비 장경왕후의 여동생 남편인 임극정과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경은 정서와 친교를 맺고 늘 벗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왕경이 역모의 중심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의종은 이들의 고변을 듣자 왕경을 내심 의심하였다. 게다가 재상 최유정, 문공원, 유필 등이 간관 최자영, 왕식, 김영부, 박소 등을 인솔하고 합문 앞에 엎드려 정서가 대령후와 친교를 맺고 자기 집에 불러다가 술잔치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벌을 줄 것을 청원했다. 또한 어사대에서도 정서가 종실과 결탁하기 위해 자주 밤에 모여 술을 마신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의종은 조사 결과 왕경의 종 김감을 회인으로 유배보내고 악공 최예 등은 매를 때려 유배시켰다.

 

그런데 대간들이 합문 앞에 엎드려 또다시 정서 등을 벌할 것을 청원하니, 의종은 귀양갔던 이분은 소환하고, 정서는 장형을 가하여 동래로 귀양 보낼 것을 명령했다. 또 함께 어울리던 양벽은 회진에, 김의련은 청주에, 김감은 박도에 각각 귀양 보냈다. 또 최유정은 왕경에게 그릇을 빌려주었다는 죄로 남경유수로 강직되었으며, 잡단 이작승은 남해 현령으로 강직되었으니 이들 두 사람으 모두 정서의 매부들이었다. 재상 최유정은 참으로 얄굿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157년 왕경에게도 귀양령이 떨어졌다. 계속 모후의 눈치를 보던 의종이 왕경의 유배형을 미루어 오다가 마침내 그를 천안부로 유배시켰던 것이다. 이 때 최유정은 다시 충주목사로 강직되었으며, 임극정은 양주 방어사로, 정서의 매부 우부승선 김이영은 승평군사로, 이작승은 남해 현령으로 강직되었다. 또 정서는 유배지를 동래에서 거제도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의종은 모후를 의식한 나머지 모후 공예왕후 임씨를 먼저 보제사에 머물게 한 다음 은밀히 밀사를 보내 왕경과 역모 혐의자들을 추궁토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신하들의 상소에 밀려 하는 수 없이 왕경의 유배형을 승인한 것처럼 꾸몄다.

 

그러던 어느날 의종을 죽이려는 화살 하나가 궁중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의종은 놀라 범인 색출을 명했으나 좀처럼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자 이에 의종은 노발대발하면서 대신들을 닥달하며 문책조서를 내리기에 이른다.

 

의종의 문책이 극에 이르자 안절부절 못하던 대신들은 대령후 왕경의 종 나언, 유성, 황익 등을 지목하고 참혹하게 고문하여 거짓으로 자백을 받아낸다. 그리고 곧 그들을 참형에 처했다. 이처럼 권력층 집안의 종이나 노비들은 유신들과 권력층의 싸움에 파리목숨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 후 왕경은 줄곧 귀양살이를 하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사망연대와 유배지 생활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원경국사 충희(?~1182년)

원경국사 충희는 인종과 공예왕후의 넷째 아들이며, 다른 이름은 현희이다. 일찍이 출가했던  그는 승통의 자리에 있었는데, 둘째 형 명종이 즉위한 후 역모혐의를 쓰고 유배될 뻔하였다.

 

1177년 흥왕사의 승려 하나가 고변하기를 "승통 충희가 은밀하게 승려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음모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이 때문에 관원들이 충희의 시종들을 국문하였으나 증거를 얻지 못하고 플려났다.

 

1180년 모후 공예왕후가 유종(유방종기)을 앓았는데, 충희를 불러 간호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충희가 많은 궁녀들과 간통하고, 심지어는 공주와 간음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에 우사간 최선이 글을 올려 충희의 추행을 고하고 그를 대궐에서 내쫓을 것을 상소하였다.

 

하지만 명종은 "뜻밖에도 사간이  우리 형제를 이간질하는구나." 하면서 오히려 최선을 파면시켜 버렸다.

 

이 사건 이후 대간에서 감희 충희에 대한 간언을 하지 못했고, 신하들은 충희에게 뇌물을 주고 벼슬을 부탁하는 사태가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종은 충희를 벌하지 않았다. 이는 모후 공예왕후를 근심시키지 않으려는 명종의 배려 때문이었다. 이를 볼 때 충희는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방탕한 못된 짓을 서슴치 않게 지절렀던 모양이다.  

 

충희는 명종 13년 1183년에 방탕했던 생을 마감하였는데, 명종은 이 때도 모후가 놀랄 것을 염려하여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중에 명종은 모후로부터 무신들과 결탁하여 충의를 죽였다는 의심을 사기도 하였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공예왕후는 자식들이 많았지만 자식들 교육 하나는 잘 시킨 모양이다. 의종이나 명종 등 모든 자식들이 모후에 대한 극진한 존중과 배려를 항상 드러내고 있는 모습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