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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가을 1 : 안철수, 그는 누구인가?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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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가을 1 : 안철수, 그는 누구인가? 1

두바퀴인생 2011. 9. 6. 09:11

 

우면산의 가을 1 : 안철수, 그는 누구인가? 1

 

 

서울시장 재보선 후보로 안철수씨가 거론되면서 한국의 정치권이 술렁거리고 있다. 의학박사이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로 일약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의 젊은 지식인을 대표하는 그가 그동안 수많은 정치권의 영입 권유를 거절하고 오로지 학문과 전문가, 교수 역활에 만족하고 청교도 같은 삶을 살면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의 우상이며 닮고 싶은 사람인 것을 사실이다.

 

여당의 정치를 비판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활은 최소한 10년에서 대통령이나 서울 시장쯤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서울시의 시정도 지금까지 하드웨어 위주의 전시 행정에 치우쳤다며 도시가 병들고 시민들의 삶이 고통받고 있는 것이 바로 하드웨어 위주의 전시행정 때문이라고 했다. 소프트웨어를 도외시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주차, 교통, 재난, 주거, 소외계층, 저소득층, 환경 등 제분야에 소프트웨어가 적용되면 시민들이 편리하고 안락하게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경륜과 세, 수평, 수직적인 조직과 지원 그룹이 형성되어 있어야 하며 권모술수와 밀약, 협상을 통해 상대를 아우르고 포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 현실은 정치 모리배들의 비리와 부패로 얼룩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인 한 사람의 생각과 아이디어가 당론을 움직이기에는 한계가 있는 진흙탕 같은 정치권이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지원 그룹이 필요하며 경륜이 짧은 그에게 과연 그러한 조건이 조성될 것인지는 몰라도 권모술수와 야합, 밀약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만약 그가 스스로 자기 최면에 빠져 자만심이 앞선다면 그 뒤는 반드시 추락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서울 시장이 그리 대단한 것인가? 진흙탕 싸움꾼들 사이에서 청교도적인 삶을 살아온 그가 과연 얼마나 버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기와 선거는 같을 것 같지만 사례를 보면 아닌 경우도 많았다. 학자와 대학 교수들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복잡하게 돌아가는 현실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적인 이론으로만으로 현실 정치를 추진하기에는 추진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정과 실패를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 사람의 인재가 정치인들의 권유와 회유로, 그를 무등에 올라태우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이용당하지 않을까, 또 본인 스스로도 헛돤 망상에 빠져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쓸쓸히 추락하는 꼴이 될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서울 장터' 행사 모습, 서울 시청앞 잔디 광장

 

 

철수, 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안철수, 그는 누구인가?

안철수(安哲秀, 1962년 2월 26일 ~ , 부산 출생)는 대한민국의 의사, 벤처 사업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의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면서 14년간의 의사 생활을 했으며 최연소인 만 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역임했다. 의대 재학 중에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되고 1988년 그 취미 덕분에 우연히 컴퓨터 바이러스를 발견하여 대한민국 최초로 백신 프로그램 V1, V2와 V3를 만들었다. 이후 7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백신을 무료로 제작·배포하다가 백신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1995년에 의대 학과장을 그만두고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했다.

 

2005년 초까지 10년간 CEO로 활동하다가 경영을 그만두고 학생으로 돌아가 펜실베니아대학교 와튼스쿨에서 MBA로 들어가 경영을 배운 후 KAIST 석좌교수로 임용되면서 공대 학생들에게 경영을 가르쳤다. 2011년 현재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겸 최고학습책임자 및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애

학창 시절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부산동성초등학교, 부산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창 시절에 60명 중 30등을 할 정도로 평범했으며 운동 등 특별히 잘하는게 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을 매일 몇권씩 읽어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게 됐다. 도서관 사서는 매일 몇권씩 대출과 반납을 하는 안철수가 장난치는걸로 의심해 대출을 거부할 정도였다. 안철수는 “당시 책의 페이지수, 발행 년월일, 저자까지 모두 다 읽고,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것마저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활자 중독증이었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교과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과학책과 소설책을 좋아해 주로 읽었다. 그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사춘기도 없었다고 말했다. 중간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해 1등을 차지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의사 생활과 백신 개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기초 의학을 전공하면서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과 생리학 교실에서 1988년 《동방 결절 내에서의 흥분 전도에 미치는 Adrenaline, Acetylcholine, Ca++ 및 K+의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1991년 《토끼 단일 심방근 세포에서 Bay K 8644와 Acetylcholine에 의한 Ca2+ 전류의 조절기전》이라는 논문으로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의대 대학원에서 심장 부정맥을 연구하는 ‘심장 전기 생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처음으로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그가 컴퓨터를 공부한 이유는 의사로써 전공 실험을 더 잘하고 특기를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컴퓨터 잡지에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한국에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자신의 컴퓨터와 50장 가량의 디스켓을 검사해보니 3장의 디스켓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었다. 프로그램의 세부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확인해보니 프로그램에 누군가 (c)Brain이라고 써놓은 것이었다. 그 바이러스는 최초로 파키스탄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떤 형제 둘이 컴퓨터 가게를 차려 자기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팔아 가게를 운영하려 했는데 하나만 팔아도 불법 복제가 되어 가게가 망하자 이 형제들이 화가 나 불법 복제를 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바이러스의 시작이었다. 이 바이러스의 원본에는 만든사람의 이름, 주소, 집전화까지 모두 표시되어 있었으나 국내에 유입된 바이러스에는 그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지워져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한국까지 오는데 3년이 걸렸다. 그 당시엔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손에서 손으로 파키스탄에서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바이러스 때문에 디스켓이 파괴되는 일이 많았으나 당시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철을 타면 디스켓이 깨진다”,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긴다”는 등의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안철수는 전공실험을 위해 열심히 배워두었던 컴퓨터 언어 공부를 막 끝낸 참이어서 절묘한 시기에 바이러스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던 중 후배가 안철수에게 찾아와 바이러스를 치료할 방법을 묻자 안철수는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후배가 이해하지 못하자 본인 자신이 직접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는데 밤을 세워 분석한 끝에 1988년 6월 10일 바이러스가 감염된 과정을 반대로 하면 치료할 수 있겠다 생각하여 ‘백신’(Vaccine)이란 이름의 앤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치료에 성공했다. 이것이 V3 최초 버전인 V1이다.

 

처음으로 문서화된 컴퓨터 바이러스 제거 프로그램은 1987년에 발표된 번트 픽스(Bernd Fix)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철수는 “세계 최초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인 V1을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고 “미국의 백신 대기업들도 V1보다 1년 늦게 만든 것들이었다”라고 말했다. 바이러스 치료가 된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안철수에게 도움을 요청을 해오기도 했다. 그 뒤로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혼자서 만든 백신을 무료로 배포했다. 이후 당시 악명을 떨친 LBC, 예루살렘 바이러스 등을 치료하는 기능이 추가된 ‘V2’, ‘V2Plus’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였다.

 

그렇게 낮에는 의사, 밤에는 백신 제작자로 7년간 이중 생활을 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만큼 나도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의사 생활과 백신제작을 모두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백신 제작을 하고, 의대에 가서는 박사 과정으로 생활했다. 당시에 한국에는 안철수 말고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돈벌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안철수가 군대에 가게될 즈음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유행했다. 미켈란젤로의 탄생일인 3월 6일에 활성화되는 바이러스로 컴퓨터의 기억 자료를 파괴시킨다. 안철수는 자신이 장교 훈련을 받는 3개월 동안 백신을 만들지 않으면 피해가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1991년 2월 6일 혼자서 밤새 백신을 만들어 PC통신을 통해 배포했으며 이것이 V3이다. 그리고 이날 아침 장교 훈련을 받기 위해 대구로 내려가 입영했다. 그러나 백신 제작에 몰입한 나머지 입대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가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미켈란젤로 바이러스는 치료하였으나 그 바이러스를 만든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는데 당시엔 자기 이름을 과시하기 위해 장난으로 바이러스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는 취직하기 위해 일부러 바이러스에 허점을 만들어놓아 검거된 후 회사에 스카웃되기도 했다. 이후 해군 장교 군의관(대위)으로 복무하다가 전역했다.

 

대학생때 만난 부인은 1년 후배로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이었다. 처음에는 봉사 진료를 하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도서관에서 자리 잡아주는 사이로 지냈고 쉬는시간에 커피도 마시면서 사랑을 키웠다. 안철수는 “당시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의과 대학교에서 굉장히 유명한 커플이 되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함께 대학 생활을 했고 당시 궁핍한 학생이었던 안철수는 아무것도 없이 같이 살자며 프로포즈를 했다. 생각과 가치관도 비슷했고, 같은 공부에 같은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벤처기업 CEO 생활

의사 생활과 백신 개발을 하는 생활을 7년 정도 했는데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매년 2배씩 증가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의대 교수로 재직하려면 지도 학생을 받아야 하는데 지도 교수가 학생 몰래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학생은 불행한 것이라 생각하여 반년간의 고민 끝에 의사 생활을 포기하고 더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백신 제작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그러나 돈벌이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7년 동안 모아놓은 모든 백신 자료들을 가지고 비영리 공익 법인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려고 정부 부처를 다니며 관계자들을 설득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던중 소프트웨어 업체 관계자가 찾아와 기업을 만들라는 조언을 해왔고 안철수는 그 의견에 동의하여 1995년 3월 15일 창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안철수연구소이다.

 

기업을 만들더라도 백신을 개인에겐 무료로 보급하고, 기업들에만 사용료를 받아 기업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가졌으며 안철수연구소는 현재도 개인에게는 ‘V3 Lite’라는 이름으로 무료 배포하고 있다. 안철수는 사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4년 간은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월급날은 매월 25일이었는데 월초부터 직원들의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이었고 자신이 월급을 받지 않고 직원들의 월급을 줄 때도 있었다. 그렇게 회사가 적자로 힘들던 시절인 1997년, 회사 창립 2년 만에 미국의 거대 백신업체 맥아피에서 1000만 달러에 인수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안철수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갔다. 보통 재벌그룹 회장 정도가 되면 직접 발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당시 인수에 의욕을 가졌던 맥아피 회장은 안철수 앞에서 직접 발표를 하며 인수를 제안했으나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회장은 이전에 자신에게 회사를 매각했던 일본인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시켜줬다. 일본 대표는 “당시 회사가 적자나서 힘들었으나 많은 돈을 받고 회사를 팔고난 후 걱정도 없이 잘 지낸다”라며 안철수에게 회사를 팔라고 설득했으나 안철수는 끝내 거절했다. 당시 맥아피는 전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안철수연구소 때문에 한국에 진출하지 못했고 이를 인수한 후 안철수연구소를 폐기하고 미국 백신으로 한국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서 이러한 인수를 제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회사를 매각한다면 그 후에 직원들이 해고되어 실업자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던 것이었다. 그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감정을 소비하는 후회는 원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1999년 4월 26일 CIH 바이러스(체르노빌 바이러스) 사건이 일어나면서 적자가 나던 회사는 흑자로 전환됐다. CIH 바이러스로 인해 30만대 가량의 컴퓨터가 파괴되어 기업과 공공기관 등에서 수천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바이러스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변화하게 되어 백신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직원이 50명 가량이었는데 하루 종일 전화가 걸려와 업무가 마비될 수준이었고 컴퓨터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매출은 급증했고 1999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한글과컴퓨터에 이어 두 번째로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했고 이후 세후 순익 100억원 돌파는 안철수연구소가 최초로 달성했다.

 

유학·교수 생활과 이후

2005년 당시 회사의 경영 사정은 매우 좋았으나 다른 벤처 기업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안철수는 자신의 능력을 산업 전반에 쓸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1년간 고민했고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회사를 창립한지 만 10년이 되는 날인 2005년에는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직을 사임했고 대신 이사회 의장 자리를 맡았다. 당시 발표날까지 직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회사 경영하던 당시에 안철수는 직원들에게 주식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으며 혼자서 이룬 성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원들과 나눈 것이었다. CEO를 그만두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MBA2년 과정을 밟았다. 같은 시기에 딸도 미국에서 유학했는데 그 이유는 안철수의 부인이 나이 마흔에 ‘법’을 배우고 싶다며 의사를 그만두고 미국 로스쿨에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5년을 공부한 아내는 캘리포니아 주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안철수도 뒤늦게 미국 MBA 석사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가족이 도서관에 모두 모여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 때가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라고 말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08년 4월 30일 귀국한 안철수는 KAIST 경영학과 교수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다가 2011년 6월부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에 있다.

 

2005년에는 포스코의 사외이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2010년에는 포스코 이사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2010년부터 안철수연구소의 사내벤처로 출발한 소셜네트워크게임 업체인 노리타운스튜디오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으며, 2010년 6월부터 현재까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제2기 민간위원 직을 수행하고 있다. 2011년에는 학교법인 포항공과대학교의 이사로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