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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2 : 고려의 역사 120 (제16대 예종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352 : 고려의 역사 120 (제16대 예종실록 5)
제16대 예종실록
(1079~1122년, 재위 1105년 10월~1122년 4월, 16년 6개월)
3.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
동북 9성은 1107년 윤관의 건의에 따라 조직된 별무반이 고려 동북쪽의 변방 바깥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축출하고, 그 지역에 쌓은 9개 성을 일컫는다. 이 9성은 흔히 함주, 영주, 옹주, 길주, 북주, 공험진, 진양진, 통태진, 숭녕진을 가리키는데 그 위치와 지역 명칭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기록에 따라서는 열거한 9성 중 숭녕진과 진양진 대신 의주와 평융진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의 절대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다.
9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으나 당시 이곳이 여진족의 주요한 생활터전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이곳에 살던 여진인들은 금나라를 세우기 이전에는 고려에 조공을 바쳤고, 문종 대에는 고려의 일부가 되어 군현 편제를 자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숙종 대에 이르러 완안부에 영가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여진족 통합을 추진하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비록 영가시대에는 고려에 대항할 만한 힘은 갖추지 못했지만 국가적 기틀을 갖추게 되었고, 그의 조카 오아속이 그 뒤를 이으면서 여진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된다. 이 때문에 거란과 고려는 변방이 위협을 맏게 된다.
여진의 군대는 기마병 중심으로 짜여 있어 기동력이 좋고 속전속결에 능했다. 이 때문에 고려는 오아속이 추장으로 있을 때 두 번이나 싸움에서 대패하여 변방 인접의 여진 관속과 여진인 통치기관인 14개의 단련사를 내주고 가까스로 강화를 밎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이 사건 이후 고려군의 사기는 저하되었으며 변방에서 군사적 행동도 위축되었다.
2군 6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던 고려군이 여진과의 싸움에서 무력하게 무너지자 숙종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윤관의 건의에 따라 여진정벌을 위한 임시적인 군사조직인 별무반을 조직한다. 별무반은 기마병으로 구성된 신기군과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그리고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진족과 싸워 패배한 경험이 있는 윤관은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보병 중심의 군대 편제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기마병을 보완하고 항마군을 신설하는 별무반이었다.
나이 스물 이상의 모든 백성은 별무반에 의무적으로 가담해야 했다. 문무 양반에서 아전, 농민, 장사치,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이 징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 중에 말을 가진 자나 말을 다룰 수 있는 자는 모두 신기군에 편제되었고, 말이 없는 자는 보병에 편제되었다. 또한 승려들은 따로 항마군을 만들어 군사훈련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별무반은 모든 백성이 전면전을 치르기 위한 국가총력군이었다.
이렇게 조직된 별무반은 2군 6위의 정규군과 함께 1년 동안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마침내 1107년 10월 여진정벌에 나섰다. 정벌에 나선 고려군은 원수 윤관, 부원수 오연총을 위시하여 총 17만 대군이었다. 이런 대규모 군사력의 동원은 거란 2차 침공시 광군 30만, 3차 침공시 20만을 동원한 이래 수렵으로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을 소탕하기 위해 이러한 대군을 동원한 것은 전후후무한 것으로 그만큼 여진족이 강성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려군이 음력 10월의 한겨울에 출병한 것은 변방에서 여진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선제공격을 감행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토양이 척박하여 곡식이 풍부하지 못한 여진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군량미 조달이 어려운 겨울이 가장 적합한 계절이기도 했다. 게다기 눈이 내리면 기병의 활약이 둔화된다는 점도 고려한 것이었다.
윤관이 17만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자 예종도 서경을 향하여 출발했다. 왕이 좀더 전장에 가까이 다가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함이었다.
윤관과 오연총은 동북 방면에 이르러 군대를 장춘역에 주둔시키고 17만 대군임을 강조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그리고 병마판관 최홍정과 황군상을 정주와 장주 두 고을에 파견하여 여진의 추장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명목은 고려 조정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여진의 추장 허정과 라불을 석방하려고 하니 관문으로 와서 명령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여진의 추장 고라를 비롯한 4백여 명이 고려 관문에 도착하자 윤관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술 취한 틈을 타서 복병들을 시켜 모두 살해하도록 했다. 그 결과 4백여 명의 추장 무리 중 의심을 품고 관문을 넘어오지 않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여진의 추장들을 거의 섬멸시킨 윤관은 출동명령을 내렸다. 윤관 자신은 군사 5만 3천을 거느리고 정주 대화문을 나섰으며, 중군병마사 김한충이 3만 6천 7백을 이끌고 안륙수로 나아가고, 좌군병마사 문관이 3만 4천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으로 향했다.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4천을 이끌고 신덕진의 안해, 거방 두 초소의 중간 지점으로 나아갔으며, 선영별감 양유송과 원흥, 도부서사 정승용과 진명, 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은 해군 2천 6백을 인술하고 도린포로 떠났다.
대화문을 나선 윤관은 한나절을 진군하여 문내니촌에 다다랐다. 고려군이 그곳에 도착하자 여진군은 기세가 꺽여 마을을 버리고 보동음성으로 들어가서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윤관은 임언과 최홍정에게 군사를 내주고 마을을 공략하여 잔병들을 패주시키고 성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성 앞에 이르자 여진군이 결전을 다짐하며 고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군은 먼저 항복을 종용했으나 여진은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고려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에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서로 공방전이 수차례 전개되었으나 전혀 진전의 기미가 없자 윤관은 척준경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날이 저물면 사태가 더 위급하게 될 터이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과 함께 협력하여 전진을 돌파해줘야겠네."
윤관의 명령을 받고 척준경이 대답했다.
"제가 일찍이 장주에서 종군하다가 과오로 죄를 저지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장군께서 저를 장사라고 하며 조정에 특청하여 용서받았으니, 오늘이야말로 저의 몸을 희생하여 국가에 보답하겠습니다."
척준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갑옷을 입고 방패를 앞세우며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전진으로 달려가 적장 몇 명을 쳐죽였다. 그러자 고려군은 다시 기세가 되살아나 그 틈을 이용하여 윤관은 휘하부대와 좌군을 출동시켜 적을 일시에 궤멸시켰다.
이렇게 첯 승리를 장식하자 윤관은 척준경에게 비단 30필을 주어 포상하고, 김부별과 이준양으로 하여금 이위동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위동의 여진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고려군이 역습을 받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군 진영으로 너무 깊숙히 파고든 여진은 1천 2백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대패하였다.
한편 김한충이 이끄는 중군은 고사한을 비롯한 35개 촌을 격파하고, 김덕진이 이끄는 우군은 고아탄 등 32개 촌을 격파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윤관의 선봉부대도 대내파지촌을 비롯한 37개 촌을 격파하여 2천여 명을 죽이고, 5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예종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승전보를 가지고 온 녹사 유영약에게 그 자리에서 7품 벼슬을 주고 좌부승지 심후와 내시형부원외랑 한교여를 전선으로 파견하여 윤관과 오연충 및 장군들을 격려하는 조서를 띄웠다.
적지 1백여 개 촌락을 장악한 윤관은 각 방면에 부하 장수들을 보내 국경선을 정하는 작업을 하였다. 동으로는 화관령까지, 북으로는 궁한이령까지, 서로는 몽라골령을 국경으로 정하고 일관 최자호를 몽라골령으로 보내 터를 잡고 950칸에 달하는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이것이 영주성인데 윤관은 성내에 호국인왕사와 진동보제사라는 두 절을 짓도록 하였다. 또 화관령 아래에는 992칸의 성을 쌓고 웅주성이라 하였으며, 오림금촌에는 774칸의 성을 축조하여 복주성이라 하였고, 궁한이촌에는 670칸의 성을 축조하여 길주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진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윤관이 오연총과 함께 군사 8천을 이끌고 길이 좁은 가한촌의 병모가지 길을 지나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급습을 받았다. 이 때 고려군은 대부분 거의 죽거나 흩어지고 윤관을 비롯한 겨우 10여 명만 고립되어 적과 항전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오연총은 화살을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윤관은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가까스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그때 기적처럼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척준경이 용사 10여 명을 인술하고 돌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척준경이 윤관과 오영총을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돌진할 때 그의 아우 낭장 척준신은 형을 만류하며 말했다.
"적진이 견고하여 돌파는 불가능합니다. 뛰어들면 죽음이 불 보듯 뻔하니 가지 마십시오."
하지만 척준경은 아우에게 늙은 아버지를 부탁하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으며 적에게 포위된 윤관과 합류하였다.
척준경이 고군분투하며 적과 싸우고 있는 동안 최홍정과 이관진은 윤관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군을 인솔하여 병모가지 길로 진군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적군은 포위를 풀고 골짜기로 빠져 나가기 시작하였고, 그 덕에 윤관과 오연총, 척준경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많은 부하를 잃고 지친 몸으로 영주성으로 돌아온 윤관은 척준경을 불러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제부터 자네를 내 자식과 같이 생각할 터이니 자네는 나를 아비와 같이 여겨달라."
이 사건 이후 척준경은 공을 인정받아 합문지후에 임명되었으며, 계속해서 공을 세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진의 반격은 거세졌고, 고려군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윤관이 수천의 군사만으로 영주성을 지키고 있는데 여진군 2만이 쳐들어왔다. 이에 수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한 윤관은 임언과 상의하여 성을 지키며 수비에 전념하도록 결정했다. 그런데 척준경이 성밖으로 나가 적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척준경은 결사대를 지원하는 군사 수십 명을 뽑아 성밖으로 나갔다.
고려군이 성밖으로 나오자 여진도 여진도 군대를 출동시켰다. 양쪽 군대가 혈투를 벌이인 끝에 여진군 19명이 목숨을 잃자 사기가 떨어진 여진은 겁을 먹고 물러났다.
척준경이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윤관은 몇 차례의 어려운 고비를 넘긴 끝에 1108년 정월까지 북방 동계에 6성을 완성하여 공험령에 비를 세우고 국경으로 정하게 되었다. <고려사>는 이 성을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윤관이 점령한 지역은 면적이 3백 리이며 동쪽으로는 대해에 접했고, 서북방으로는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와 정주 두 고을에 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해 3월에 이 6성에 의주, 통태진, 평윤진 세 성을 더해 9성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윤관의 동북 9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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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위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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