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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0 : 고려의 역사 118 (제16대 예종실록 3) 본문
한국의 역사 350 : 고려의 역사 118 (제16대 예종실록 3)
제16대 예종실록
(1079~1122년, 재위 1105년 10월~1122년 4월, 16년 6개월)
1. 예종의 영토확장 노력과 여진의 성장(계속)
하지만 예종의 영토확장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은 좀체로 가라앉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모반사건으로 이어졌다. 1112년 8월 누군가가 역모에 대한 고변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승려로 있던 왕숙인 승통 왕규가 상서우승 김인석, 전주목사 이여림 등과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역모 사건의 고변으로 승통 왕규를 포함한 상서우승 김인석, 전주목사 이여림, 전중소감 하언석, 형부상서 임신행, 대경 이중평, 형부 원외랑 이일숙, 장군 김택신 등 수십 명이 귀양길에 오르고 그 중 일부는 참형에 처해졌다.
고려가 이렇게 내부 문제로 아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중국 대륙에서는 급속도로 역학구도가 변하고 있었다. 여진은 꾸준히 성장하여 마침내 1115년 금을 건국하였고, 추장 아골타는 황제를 자칭하며 고려에 대하여 형제지국을 맺을 것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고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진의 팽창에 따라 압록강변에서 거란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거란은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원병을 요청해 왔으나, 고려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거란의 원병 요청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발해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동경 유수 소보산을 죽이고 고구려의 왕족 고영창을 황제로 세워 대원국을 건국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폐지하고 압록강변의 내원성과 포주성의 양민들을 받아들여 영토확장의 기회를 노린다. 그리고 얼마 후 금나라가 이 두성을 공략하자 예종은 추밀원에 지시하여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하고, 포주성은 고려의 옛 성이며 영토이니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금나라는 고려가 자체 힘으로 포주성을 차지해도 무방하다고 통보해 온다.
금나라의 묵인을 받은 고려는 자체적으로 외교 경로를 모색하며 가까스로 내원과 포주에 머무르고 있던 거란의 통군상서좌복야 야율령과 연락을 취하였다. 이에 야율령은 고려에 쌀을 원조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내원성과 포주성을 포기하면 굳이 쌀을 원조받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며 두 성을 고려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야율령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기 백성들을 140여 척의 배에 실어 데리고 가면서 내원과 포주를 고려에 양도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이렇게 하여 고려는 1117년 2월 거란에게 빼았겼던 내원성과 포주성을 되찿게 되었다.
두 성을 되찿은 고려는 포주를 의주방어사로 고치고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관방을 설치함으로써 영토를 압록강까지로 확장하였다. 또한 1119년 12월에는 천리장성을 세 자 높여 여진의 내침에 대비했다. 이 때 여진의 변방군관이 군사를 보내 이를 방해하려 하였으나 고려는 성벽의 수리를 통고하고 장성을 높이는 작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진과 고려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으나 여진의 아골타가 고려의 장성작업을 묵인함으로써 전쟁위기는 넘긴다.
한편 서쪽으로 밀려난 거란은 고려에 공문을 보내 함께 여진을 칠 것을 강권하지만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이렇듯 중립정책으로 변방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영토확장의 행운도 얻은 예종은 변방의 안정을 꾀하면서도 꾸준히 문화정책과 민심안정책을 실시했다.
1109년에는 국학에 학과별 무전강좌인 7재를 설치하여 관학의 진흥을 꾀했으며, 1116년에는 청연각과 보문각을 짓고 학사를 두어 경적을 토론하게 하였고, 1117년에는 송나라에서 대성악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궁중음악인 아악의 시초이다. 또 1119년에는 국학에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관련부서에 명령하여 국학 7재의 정원을 유학과 60인, 무학과 17인으로 하며 뛰어난 선비를 뽑아 학관을 삼고 학풍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리고 1120년에는 팔관회를 열고 개국공신인 신숭겸, 김락 등을 추도하여 손수 <도이장가>를 짓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민심 안정책으로 각 지방에 감사를 내려보내 탐관오리를 축출하였으며, 쌀 속에 다른 이물질을 넣어 파는 자들을 색출하여 중벌로 다스리기도 하였다. 또한 요순시대의 정치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감옥을 비우기도 했으며, 1112년에는 혜민국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질병을 돌보게 하고, 1113년에는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여 민간 예의의 원칙을 정착시켰다.
급변하는 격동기 속에서 예종은 이렇듯 밖으로는 중립외교를 통하여 영토 확장책을 실시하고 안으로는 요순정치를 구현하며 태평성세를 꿈꾸는 왕이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가 항상 시인임을 자처하며 어디서든 선비들과 시를 지어 화답하고, 송나라의 선진적인 문화를 숭상하며 유학의 발전에 주력했으며, 동시에 토속신앙과 불교를 조화롭게 발전시켜 고려 문화의 질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종의 정치에 대해 실록을 편찬한 한 사관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영토를 넓히는 데 뜻을 두고 변방에서의 전공을 요행수로 기대하여 외적과 혼극이 계속되었으며, 송나라 문화를 흠모하여 호종단(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와 와서 벼슬함)을 신임하여 자못 그의 말에 미혹됨으로써 실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사를 발동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원한을 참고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인접지대의 백성들을 감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귀순하게 하였으며, 홀아비와 과부들을 돌보아주고 늙은이들을 공경하였다. 또한 학교를 설치하여 선비들을 양성하였으며, 청연각과 보문각을 두어 날마다 문신들과 함께 육경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전쟁을 중단하고 문화를 숭상하여 예악으로써 아름다운 풍속을 조성하려 하였으니, 일찍이 한안인은 예종 17년간의 정사를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운명의 순간은 다가왔다. 1122년 3월 그의 등에서 자그마한 종기가 하나 발견되는데, 그 후로는 병상에 눕더니 한 달만에 4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재위 17년 만의 일이었다.
예종의 능은 개성 남쪽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유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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