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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8 : 고려의 역사 116 (제16대 예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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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8 : 고려의 역사 116 (제16대 예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9. 2. 03:19

 

 

 

한국의 역사 348 : 고려의 역사 116 (제16대 예종실록 1)

 

제16대 예종

 

예종(睿宗, 1079년 ~ 1122년, 재위: 1105년 ~ 1122년)은 고려 제16대 국왕이다. 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 시호예종명렬제순문효대왕(睿宗明烈齊順文孝大王)이다. 숙종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 柳氏)의 아들이다.

 

약력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써 1107년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정벌하여 섬멸하고 이듬해에는 천리장성 동북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과 9성 방비의 어려움,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로 인하여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반환하였다.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으며 1112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이자겸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하였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金)이라 칭하자, (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거부하였고 1116년, 청연각과 보문각을 짓고 학사를 두어 경서를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부흥시켰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바로 아악(雅樂)이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고 1119년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였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의 공신인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으며 2년 뒤인 1122년 4월에 승하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도이장가

  • 主乙完乎白乎 (주을완호백화) 心聞際天乙及昆 (심문제천을급곤)
  • 魂是去賜矣中 (혼시거사의중) 三烏賜敎職麻又欲 (삼오사교직마우욕)
  • 望彌阿里刺 (망미아리자) 及彼可二功臣良 (급피가이공신량)
  • 久乃直隱 (구내직은) 跡烏隱現乎賜丁(적오은현호사정)

 

가계

  • 경화왕후 이씨(敬和王后 李氏) - 선종의 딸.
  • 순덕왕후 이씨(順德王后 李氏) - 이자겸의 둘째 딸.
    • 인종(仁宗)
    • 승덕공주(承德宮主)
    • 흥경공주(興慶宮主)
  • 문정왕후 왕씨(文貞王后) - 종실 진한공 유의 딸
  • 숙비 최씨

 

 

 

 

  

제16대 예종실록

(1079~1122년, 재위 1105년 10월~1122년 4월, 16년 6개월)

 

1. 예종의 영토확장 노력과 여진의 성장

 

숙종시대부터 급속도로 성장한 여진이 예종 시대에 이르러 더욱 강대해지면서 중국 대륙은 전운에 휩싸인다. 이러한 여파는 고려 변방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예종은 성장하는 여진의 남하를 막는 동시에 거란에게 잃었던 압록강변을 되찿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때문에 예종 초기에는 여진과 끓임없는 전쟁으로 어수선한분위기가 지속되지만 압록강변을 회복한 다음부터는 전쟁을 종결하고 안정을 되찿음으로써 여러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예종은 숙종과 명의왕후 유씨의 맏아들로서 1079년 문종 33년 정월 정축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우, 자는 세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에 밝고 시를 좋아해 학문이 깊었으며, 침착하고 낭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1094년에 겸검교사공 주국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술을 받았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태위에 올랐다가 아버지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인 1100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부왕 숙종이 왕위에 오를 때 이미 17세 나이가 되었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즉시 왕태자에 책봉되지 못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숙종으 조카 헌종의 왕위를 찬탈한 입장인지라 아래로 동생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왕태자를 지목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숙종은 장남 왕우보다는 차남 왕필을 태자로 세우려 했던 것 같다. 숙종은 1098년 12월 신묘일 차남 왕필로 하여금 검교태보 수태위 겸 상서령에 임명하였는데, 이는 왕필로 하여금 왕위를 잇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장남을 제쳐놓고 차남에게 상서령을 내렸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종실 내의 힘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듬해 왕필은 어린 나이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에 숙종의 이복동생 부여후 왕수가 어떤 죄에 관련되어 유배되었다. <고려사>는 부여후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역모죄일 가능성이 높다. 부여후 왕수의 죄로 그의 아들 왕명도 귀양살이를 하며 내사관들의 감시를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역모죄가 아니라면 대를 이어가며 귀양살이를 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선종과 숙종의 전례에 따라 당시 고려 사회는 동생이 왕위를 잇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태자감으로 지목되었던 왕필이 죽자 많은 사람들이 부여후 왕수가 차기 왕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 왕수는 문종의 맏딸이자 숙종의 누이인 적경궁주의 남편이기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왕면을 차기 왕으로 세우려고 했을 수도 있다. 신라의 풍습에 따라 성골 왕족을 우대하던 당시의 고려 왕실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여후 왕수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귀양길에 올랐다. 그리고 두 달 뒤에 숙종은 자신의 장남 왕우를 왕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왕우는 1105년 10월 숙종이 죽자 2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고려 제16대 왕 예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