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345 : 고려의 역사 113 (제15대 숙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345 : 고려의 역사 113 (제15대 숙종실록 1)
제15대 숙종
숙종(肅宗, 1054년~1105년)은 고려 제15대 국왕(재위: 1095년~1105년)이다. 초명은 희, 휘는 옹(顒), 자는 천상(天常), 시호는 숙종문혜강정명효대왕(肅宗文惠康正明孝大王). 문종과 인예왕후 이씨의 아들로 순종과 선종의 동복아우이다.
생애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 제자서(諸子書), 사서(史書) 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 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 라고 하여 문종 때 계림공에 책봉되었는데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1095년에 즉위하였다.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고 1097년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활구(闊口)를 주조하였고 이듬해에는 고주법(鼓鑄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백관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1099년 김위제(金謂磾)의 주장에 따라 남경을 중시하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성하였으며 1102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 라고 숙종에게 아뢰자 숙종은 서경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1103년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추장이 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해 2월에 임간(林幹)이 정주에서 패하였고, 3월에는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을 계획하였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처음 설치하였다.
윤관은 “신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아뢰니 드디어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軍),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과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을 두어 별무반이라 칭하고 여진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서경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영릉(英陵)이다.
가계
- 명의왕후 유씨(明懿王后)
- 예종
- 상당후(上黨侯) 왕필(王佖)
- 원명국사(圓明國師)
- 대방공(帶方公)
- 대원공(大原公) 왕효(王侾)
-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
- 통의후(通義侯)
- 대녕궁주(大寧宮主)
- 흥수궁주(興壽宮主)
- 안수궁주(安壽宮主)
- 복녕궁주(福寧宮主)
고려의 역대 국왕 |
---|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대종) · 성종 · 목종 · (안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
제15대 숙종실록
(1054~1105, 재위 1095년 10월~1105년 10월, 10년)
1.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즉위한 숙종의 10년 통치
나이 어린 헌종을 밀어내고 숙종이 즉위함으로써 고려 조정은 대대적인 숙청적업에 돌입하지만 숙청적업이 완료되자 점차 안정을 되찿게 된다. 그러나 여진족의 성장으로 변방이 불안해짐에 따라 외교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그 때문에 군사제도의 개편이 단행되는 등 고려 사회는 국제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안감힘을 쓴다.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순종과 선종의 동복아우이다. 105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희'였으나, 거란의 9대 왕 천조제와 이름의 발음이 같다하여 천조제 즉위년인 1101년 3월에 '옹'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천상'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질이 강하여 매사에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경자사 등 많은 서적을 읽어 학문에 밝았고, 이 때문에 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문종은 어린 그에게 "후일에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아마도 네거 될 것 같구나."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아꼈으며, 1065년 그를 계림후에 책봉했다. 1077년에는 계림공으로 승진되었으며, 선종 3년 1086년에는 수태보 벼슬을 받았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소태사 겸 상서령에 올랐고, 이듬해 소태보와 왕국모의 도움으로 외척 이자의 세력을 몰아내고 중서령에 올라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측근 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고려 제15대 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을 넘긴 42세였다.
숙종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반대 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르던 날에도 이자의의 누이동생 원신궁주 이씨와 그녀의 아들 한산후 그리고 나머지 두 아들까지 모두 경원군으로 귀양보냈다. 숙종은 이처럼 처음부터 매우 강한 인상을 풍기며 측근 세력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숙종은 조정 개편을 단행하여 이자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가장 공이 컸던 소태보를 문하시중에 앉히고, 김상기와 임개를 각각 문하시랑 장사와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하였다. 또한 상장군 왕국모를 수사도로, 유석을 수사공으로 삼고 손관, 최사추, 김선석 등 측근 세력들을 모두 요직에 앉힘으로써 먼저 왕권을 안정시켰다.
이렇게 하여 숙종 대 초반기는 매우 안정된 정치가 이뤄진다. 하지만 후반기에 가면서 여진족이 성장하고 거란의 힘이 약해짐에 따라 변방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고,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점차 전재을 염려하여 새로운 외교관계를 모섹헤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숙종은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가장 총애하여 상서령을 삼았던 둘째 아들 필이 어린 나이로 횡사하고, 이복동생 부여후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소문이 무성하여 1099년 그를 역모죄로 경산부(경북 성주) 양목군에 귀양을 보내야 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347 : 고려의 역사 115 (제15대 숙종실록 3) (0) | 2011.09.01 |
---|---|
한국의 역사 346 : 고려의 역사 114 (제15대 숙종실록 2) (0) | 2011.08.31 |
한국의 역사 344 : 고려의 역사 112 (제14대 헌종실록 3) (0) | 2011.08.29 |
한국의 역사 343 : 고려의 역사 111 (제14대 헌종실록 2) (0) | 2011.08.28 |
한국의 역사 342 : 고려의 역사 110 (제14대 헌종실록 1) (0) | 2011.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