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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3 : 고려의 역사 111 (제14대 헌종실록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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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3 : 고려의 역사 111 (제14대 헌종실록 2)

두바퀴인생 2011. 8. 28. 02:16

 

 

한국의 역사 343 : 고려의 역사 111 (제14대 헌종실록 2)

 

 

제14대 헌종실록

(1084~1097, 재위 1094년 5월~1095년 10월, 1년 5개월)

 

1.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와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계속)

 

이런 가운데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모후 사숙태후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거처하던 연희궁을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행정 및 군사를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보았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헌종은 날이 갈수록 몸이 약해지고, 앓아오던 소갈증도 심해졌다. 이것을 기화로 선종의 제3비 원신궁주 소생으로 하여금 왕위를 이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원신궁주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큰아들이 한산후 왕윤이었다.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는 왕윤을 차기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자의는 인주 이씨로 사숙태후와는 사촌지간이엇다. 그는 호부상서로 있다가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중추원사로 승격되었으며,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특히나 인주 이씨 가문이 그를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왕숙이라 해도 어쩔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자의는 재력가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는 왕희를 지칭하며 '왕이 병이 들어 언제 세상을 하직할지 모르는데, 대궐 밖에서 왕위를 엿보는 자가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리고 한산후 왕윤을 받들어 옥새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강조하곤 하였다.

 

이렇게 되자 외척과 왕실 간에 왕위쟁탈전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고, 왕실을 대표하는 헌종의 숙부 왕희와 외척을 대표하는 이자의의 힘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병상에 누워 있는 어린 왕은 그들에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엇다. 어린 나이에 이미 소갈증을 앓고 있는 헌종을 내쫓는 것은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자의왕 왕희의 힘 대결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신하들도 두 편으로 갈라졌다. 평장사 소태보를 비롯하여 상장군 왕국모 등 대부분의 원로들이 왕실편에 서 있었고, 인주 이씨 세력을 포함한 평장사 이자위, 합문지후 장중, 중량장 곽희, 장군 택춘 등은 외척 편에 서 있었다. 두 세력 중 어느 쪽이라도 기회만 닿으면 여지없이 상대편을 쳐야만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두 세력 중 선수를 친 쪽은 왕실 세력이었다. 1095년 7월 경신일 밤, 왕희는 은밀히 평장사 소태보를 찿아가 군사를 동원하여 이자의 세력을 척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소태보는 상장군 왕국모에게 사람을 보내 이자의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으니 궁중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왕을 호위해 줄 것을 당부한다. 소태보의 연락을 받은 왕국모는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가면 양측간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우선 장사 고의화에게 약간의 군사를 내주어 이자의를 암살할 것을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고의화는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진입하여 궐내에 머무르고 있던 이자의를 선정문 근처에서 발견하여 죽이고, 그의 수하 합문지중 장중, 중추원 당후관 최충백 등을 선정문 밖에서 살해했다. 또 부하들을 이자의 집으로 보내 그의 아들 이작과 흥왕사 대사 지소를 죽였다. 이 때 이자의 편에 섰던 장군 택춘, 중량장 곽희, 별장 성보, 교위 노점, 대정 배신 등 17명이 체포되어 함께 죽음을 당했다.

 

이자의를 비롯한 그의 수하들이 모두 살해되자 권력은 왕희와 소태보 등의 왕실 세력이 장악했다. 그리고 곧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이자의 편에 섰던 평장사 이자위를 비롯하여 50여 명의 대신들이 모두 유배되었고, 원신궁주와 한산후 왕윤, 그리고 그의 두 동생들도 모두 귀양길에 올라야 했다.

 

이자의 세력이 척결되자 계림공 왕희는 중서령에 임명되어 차기 왕으로 오를 것이 확실시 되었다. 이렇게 되자 백관들은 궁궐을 비워놓고 그의 저택으로 달려가 국사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또한 왕희 주도로 대대적인 조정 개편도 이루어졌다. 소태보를 특진수사도판이부사로, 김상기와 유석을 중서시랑 및 중서문하시랑 평장사로, 임개를 수사공상서좌복야 판호부사로, 왕국모를 우복야참지정사 판 병부사주국으로, 황종각을 동지 중추원사로 세움으로써 조정은 일순간에 왕희의 지지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들은 이자의 세력을 몰아낼때 세운 공으로 한결같이 두 가지 직책을 겸직하게 된 것이다.

 

조정의 백관들이 모두 왕희 지지 세력으로 교체됨으로써 사숙태후와 헌종은 도장이나 찍어주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리고 1095년 10월, 왕희의 거사 3개월 만에 헌종은 스스로 물러나야만 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지병이 악화되어 스스로 선위하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명백히 왕위 찬탈이었다. 이것은 헌종이 물러나면서 남긴 조서에 잘 나타나 있다.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왕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한 관계로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력가들에게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면서 역적 난신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나는 후궁으로 물러 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이 조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헌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백관들 역시 그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헌종이 왕위를 고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백관들의 압력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므로 헌종의 모후 사숙태후는 병약한 어린 왕과 함께 후궁으로 불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후궁으로 물러앉은 헌종은 1097년 2월 흥성궁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병명은 소갈증이지만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왕위를 찬탈한 숙종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헌종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고대 중국의 하우씨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한 것은 후세의 찬역을 염려하여 조치하였던바 그 후 유복자를 임금으로 세워 곤룡포를 입혀놓아도 세상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명분이 정해져 잇었기 때문이다.

 

현종의 세 아들은 형제끼리 서로 왕위를 전해서 순종에게까지 미쳤으나, 순종이 거상 중에 너무 슬퍼하다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어서 선종에게 선위하였으며, 선종이 죽은 다음 태자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가 헌종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러 왕대에서 형제끼리 왕위를 주고 받은 데 익숙해져 있어서 선종은 아우가 다섯이나 있는데 어린 아들을 세운다고 하면서 이것만을 잘못으로 여기니 어찌 그렇게만 생각하였는지 모르겠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근친 중에 주공과 같은 이가 없고, 신하들 가운데 곽광과 같은 사람이 없어서 나랏일을 맡아 정치를 보좌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운이 위태롭고 정치가 어렵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후세에 만일 불행한 일이 있어서 강보에 싸인 유아에게 중대하고 어려운 사업을 맡기게 될 때는 이것으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헌종의 능은 개성 돌쪽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온릉이다. 그는 결혼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처자는 없다.  

 

 

 

여진족

당시 고려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의 정세는 현종 이후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거란의 3차례에 걸친 침입을 고려가 막아냄으로서 얻어낸 귀중한 평화였다. 그러나 고려의 귀족들의 왕위문제로 인한 분열을 틈타 고려의 동북면에 거주하고 있던 동여진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초부터 관계를 가지고 있던 여진족은 만주의 동북지역에 거주하는 생여진(生女眞)과 서남쪽에 거주하는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생여진은 소수 단위로 흩어져 살고 있던 반면 숙여진은 거란이 세운 <요>에 복속하고 있었다. 여진이 한반도와 접촉하게 된 것은 <발해> 건국 후 남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친 시기에 동북으로는 함경도, 서북으로는 압록강 남안 및 평북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결과 이들 여진족은 한민족과 직접 접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는 이들 여진을 구별하기 위해 동북 방면의 여진을 동여진, 서복의 여진을 서여진 혹은 압록강 여진이라고 불렀다. 서여진은 일찍이 강동 6주(江東六州)가 고려에 편입될 때 고려와 거란의 협공으로 소멸되어 양국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동여진은 소수 단위로 흩어져 거주함으로서 고려가 이들을 복속시키기 어려웠다. 동여진은 고려의 통제 밖에서 활동하면서도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고려와 접촉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고려는 여진이 미약한 세력으로 남아있는 한 이러한 접촉을 통해 적절히 통제할 수 있었다.

 

여진은 본래 문화가 미개하여 예부터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족속이었다. 그런데 송화강 지류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생여진 가운데 완안부完顔部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1102년 세력확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완안부의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을 대표하여 고려에 사신을 보내는 외교적 무례를 저질렀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러한 외교적 무례에 대하여 응징을 해야한다는 주장과 이들을 제압할 무력이 미비함으로 받아들여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였다. 내부의 분열로 힘을 결집할 수 없었던 고려는 결국 이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그동안 고려에 예속되어 있던 생여진의 세력이 고려와 대등하게 되었거나 더 강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결과 1103년 고려는 여진의 요구로 이들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이제 고려와 여진은 일방적인 관계에서 외교적으로 동등한 관계로 바뀌게 되었고, 이를 주도한 완안부의 추장 영가의 위신은 한껏 신장되었다.

 

영가의 뒤를 이어 추장 자리에 오른 오아속(烏雅束)은 영가의 정책을 계승 추진하였다. 오아속의 이런 움직임에 예부터 유목민의 자유로운 삶을 고수하려는 생여진의 일부가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이들 불만 세력은 1104년 완안부를 떠나 부모의 나라인 고려에 내투하려 하였다. 이들 세력이 고려에 복속하려 남하를 시작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오아속은 이들을 추격하여 고려와 여진의 국경선이라 할 수 있는 정주의 천리장성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여진의 대규모 군대가 국경지역으로 남하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고려에서도 이를 좌시할 수 없어 정주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함흥평야 부근에서 신중하게 대치하던 양국의 병사들은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 평야지대에서 보병 중심의 고려군과 기병 중심의 여진이 접전을 벌인 결과는 고려의 참담한 패배였다. 이에 고려는 여진에게 강화를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는 이 패배로 인해 <요>의 3차 침입 이후 어렵게 유지되던 동북 아시아의 평화가 일시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여진에게 당한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여 기병이 중심이되는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여 복수의 시간을 기다렸다. 군사력을 정비한 고려는 1년 뒤인 1105년 대규모의 반격을 개시하였다. 윤관을 중심으로 한 기병 중심의 원정군은 신속하게 함흥평야 지역으로 침입하여 여진이 군사력을 정비하기 전에 작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구성(九城)을 축조하였다.

 

고려의 신속한 군사 작전으로 함흥평야 지역을 상실한 여진은 필사적으로 이 지역을 탈환하고자 하였다. 여진이 공격해 올 때 마다 반격에 나선 고려는 의외로 군사 작전이 수월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화를 청하러 온 여진의 사자 사현(史顯)이 <만약에 9성을 돌려주고 생업을 편안토록 하여 주시면 우리들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고 대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삼가 세공(世貢)을 닦을 것이며 또한 감히 돌조각일지라도 경상(境上)에 던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애원함으로 예종 4년 7월, 고려는 어렵게 탈환한 9성의 환부를 결정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고려는 군사적 방어의 어려움을 핑계로 어렵게 확보한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 우위권과 세력균형의 잇점을 명분과 바꾸는 실책을 범하였다. 여진은 명분뿐인 굴종을 약속하고 이 지역을 확보하게 됨으로서 아직 미약한 여진이 <요>의 세력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근거지를 두고 세력을 신장시킬 시간을 벌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이러한 외교적, 정치적 실책은 1115년 이곳에 근거지를 둔 완안부의 아골타(阿骨打)가 <금金>을 건국함으로써 실증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외교적 실책의 대가를 고려는 톡톡히 지불해야만 했다.

 

 

이자겸李資謙의 난

동북아 정세는 <금>의 건국으로 <고려> <송> <요>의 삼각구도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의 축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국가는 <금>이었다. <요>는 계속 무능한 왕들이 즉위함으로서 초기의 위세를 상실하였고, <송>은 관료들이 파당을 이루어 정쟁을 일삼는 관계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고려> 또한 인주 이씨의 전횡으로 개국 초기의 자주성을 상당히 손상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려>와 <요>를 공격하고 송을 고립시켰다. 한 때 이 지역의 강자였던 <요>는 <금>의 공격을 받자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는 나약함을 보여 주었다. <요>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받은 고려는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관료파들이 거부하였다. 이들 관료파들의 지원요청 거부는 다시 한 번 고려에게 찾아온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균형추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동북아의 세력 균형은 균형의 추가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았다. 요는 고려와의 3차례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서 송을 공격할 추진력을 상실하였다. 고려는 독자적으로 요를 공격할 수 없었지만 송과의 외교적 관계를 통해 요를 양쪽에서견제할 수 있는 동맹을 형성하였다. 이 결과 <고려> <송> <요>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금>이 <요>를 공격하면서 이런 구도가 붕괴되었다. 고려는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금>을 견제할 유일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세력 균형이 아니라 자신들의 보전에만 이용하려 하였다.

 

고려가 균형추의 역할을 포기한 것은 당시 고려 내부의 모순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왕의 외척인 이자겸이 자신의 가문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적인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과 굴욕을 감수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관료파들은 이런 이자겸의 상황인식이 자신들의 권력기반에 손해될 것이 없다고 판단함으로서 이자겸의 노선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실권자 이자겸은 호부랑중(戶部郞中) 이호의 장남으로 음서로 관계에 진출한 자로서 예종이 즉위할 때까지 관계에서 뚜렷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둘째 딸이 예종비로 들어가 왕세자를 낳게 되자 지위가 크게 올라 재상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왕의 외척으로 정치에 개입하게 된 이자겸은 조정에서 숙종 때 발탁된 신진관료 한안인(韓安仁)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자겸이 재상의 반열에 들기까지는 많은 곡절이 있었다. 숙종때는 순종비였던 누이 장경궁주가 벌인 불미스런 일에 연루되어 합문지후의 벼슬에서 쫓겨났던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순종이 즉위한지 3개월 만에 하세하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장경궁주는 외궁으로 물러나와 혼자 생활하게 되었다. 이를 몹시 외로워한 장경궁주는 급기야 미천한 궁노와 불미스런 일을 벌이다 발각되었다. 신분제 사회인 고려에는 근친혼이 왕실을 중심으로 성행했지만 계급이 다른 부류와는 사통私通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장경궁주의 사건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숙종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이를 기화로 숙종은 인주 이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이자겸을 합문지후의 직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이자겸이 이런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예종 대에 들어와서 이다. 예종 4년 이자겸의 둘째 딸이 왕비에 간택되고 이듬해에 후일 인종仁宗이 되는 왕세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이로인해 이자겸은 왕세자의 외조부로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권력에 복귀한 이자겸은 숙종 때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한 지방관료 출신인 한안인과 사사건건 충돌하였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사람의 균형이 깨지게 된 것은 1122년 4월 예종이 승하하고 이자겸의 외손인 14살의 인종이 즉위하면서 부터이다. 예종은 외척과 관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킴으로서 왕권이 손상되는 것을 막는 노련한 정치술을 보여주었지만 어린 인종은 이자겸의 전횡을 막아내기에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였다.

 

이자겸은 어린 인종을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을 납비하였다. 이 결혼으로 인종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자매간이 되는 두 이모를 아내로 맞이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니 왕의 외조부인 이자겸은 두 번이나 외손주의 장인이 되는 우스꽝스런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인종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외조부, 외조모가 자기 아버지의 외조부모와 같은 형국이 되었다. 다시 말해 외조부와 진외증조부가 동일인이 된 셈이었다.

이렇게 일반의 비웃음도 무시하며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무리수를 둔 이자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帶方公) 보(俌)가 한안인과 손을 잡고 모반을 꾀했다고 무고하여 정적인 두 사람을 살해하고 반대파 50여 인을 유배 보내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자겸은 차기 왕위계승후보자와 정적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수습한 이자겸은 중서령(中書令)에 가자(加資)되었다.

 

이제 조정에서 이자겸을 견제할 세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자식들과 친족들에게 요직을 맡기고,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척준경拓俊京과 사돈을 맺어 권력이 왕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막내아들 의장(義莊)을 현화사(玄化寺) 수좌로 삼고 불교에까지 자신의 세력을 이식시켰다.

 

권세가 날로 커지자 이자겸은 자신의 부주부(副注簿)인 소세청(蘇世淸)을 사사로이 <송>으로 보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며 자신을 <지군국사(知軍國使)>로 자칭하는 방자한 짓도 서슴치 않았다. 왕을 무시하고 외교문서에까지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다는 것은 도를 넘어선 행위였다. 이런 이자겸의 방자한 행동에 인종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를 눈치챈 이자겸은 차츰 딴 마음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런 시기와 맞물려 개경에는 <십팔자득국(十八字得國)>이란 참설이 나돌았다. 이는 오얏리자를 파자하면 십팔자가 되니 이는 이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이자겸은 이 참설을 빌미로 자신의 외손자이자 사위인 인종을 독살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자겸의 이런 계획은 자신의 딸인 왕비 때문에 실패하였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인종은 이자겸의 재종형이되는 평장사(平章事) 이수(李壽)를 불러 의논을 청하니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1126년 2월25일, 이수의 신중론에도 불구하고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여 이자겸 일파인 척준신, 척신, 김정분, 전기상 등을 죽여 시체를 궁성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이자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급히 측근들을 불러 들였다. 여기서 척준경은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 없다>란 의견을 내고 최식, 이후진, 윤한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의 신봉문(神鳳門)으로 향하였다. 이때 이자겸의 아들인 승려 의장도 현화사의 중 3백여 명을 이끌고 와 척준경과 합세하였다.

 

척준경은 병사와 중들에게 최탁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선동하여 궁궐을 포위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자겸을 몰아내기 위해 거사한 최탁의 궁성병력이 오히려 포위 당한 형색이 되어 버렸다. 척준경은 머뭇거리지 않고 궁궐에 난입하여 불을 지르고 왕의 호위군사와 격전을 벌였다. 왕의 호위군사들이 숫적 열세에 몰리자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기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양부(兩府)-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추밀원(樞密院)-에서 반대할까 두려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왕의 마음을 눈치챈 평장사(平章事) 이수가 양위는 안된다고 극력 반대함으로서 인종은 가까스로 흩어진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이자겸 일파에게 패배한 인종은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일어섰던 최탁을 비롯한 무장들이 살해되고 많은 근신들이 유배되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난으로 궁궐이 불탔다는 명목으로 인종을 자신의 사저(私邸)로 옮기게 했는데 이는 사실상 연금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인종은 이자겸에게 정사에 관련된 결재권을 빼앗기고 행동도 제약을 받게 됨으로서 왕실의 권위는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이제 고려는 외형적으로만 왕씨의 나라였지 내부적으로는 이자겸의 나라나 다름없었다. 이제 이자겸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런 위급의 순간에 왕실을 구한 사람은 내의(內醫) 최사전이었다. 최사전은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척준경과 이자겸을 이간시킴으로서 난을 수습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척준경은 원래 서리출신으로 동여진 정벌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한 사람으로 뼛속까지 귀족인 이자겸과는 출신부터가 다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척준경과 정략적으로 사돈을 맺었던 것이다. 이는 이자겸에게는 권력의 안정을 척준경에게는 가문의 위망을 얻는 것이어서 서로에게 손해될 것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최탁의 난을 제압한 뒤 권력을 양분하여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에 선 이 두 사람은 양가의 종들이 사소한 다툼을 벌임으로서 공조체제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발단은 두 집안 종들이 길거리에서 사소한 말다툼 끝에 감정이 격해지자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의 종이 척준경이 난리의 와중에 신봉문에 나와 병사들을 설득하던 인종에게 화살을 쏜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아무리 명목뿐인 왕이라 하더라도 왕에게 쇠붙이를 들이댄 것은 분명 대역죄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이 다툼으로 두 집안 사이가 험악하게 되었고, 척준경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깊이 근심하게 되었다. 이를 간파한 최사전은 인종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한 다음 왕의 교서를 가지고 척준경을 은밀히 방문하였다. 여기서 최사준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던 최준경을 달래고 회유하여 이자겸을 제거할 것을 부탁하였다. 척준경은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곧 마음을 결정하고 이자겸을 공격하여 몰락시켰다. 졸지에 권좌에서 쫒겨난 이자겸은 죄질이 대역죄에 해당했지만 왕의 장인인 관계로 사형을 면하고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 이자겸은 유배지에서 실의에 빠져 그해 12월에 사망하였다. 이자겸을 몰아낸 일등공신 척준경은 잠시 권좌에 머물렀지만 이듬해 3월,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암태도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근 1백여 년간에 걸쳐 권력을 농단하였던 인주 이씨 가문에 의한 외척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