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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2 : 고려의 역사 110 (제14대 헌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342 : 고려의 역사 110 (제14대 헌종실록 1)
제14대 헌종
헌종(獻宗, 1084년~1097년)은 고려 제14대 국왕(재위: 1094년~1095년)이다. 휘는 욱(昱), 묘호와 시호는 헌종공상정비회효대왕(獻宗恭殤定比懷孝大王). 선종과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李氏)의 맏아들이다.
생애
1094년, 승하한 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지만 나이가 어리고 소갈증으로 매우 병약하여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1년 뒤인 1095년에 이자의(李資義)가 한산후 균을 옹립하려고 했으나 숙부인 계림공 왕희(후의 고려 숙종)가 이를 미리 알고 장사 고의화를 시켜 살해했다. 이후 왕희에게 선위하고, 2년 후인 1097년 1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온릉(溫陵)이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고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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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헌종실록
(1084~1097, 재위 1094년 5월~1095년 10월, 1년 5개월)
1.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와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
선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신의 11세 된 어린 아들 욱에게 왕위를 넘긴다. 이렇게 되자 오아구너은 자연히 사숙태후 이씨에게로 ㄴ머어가 섭정이 시작되엇다. 하지만 태후의 섭정은 오래가지 못햇다.
헌종은 선종의 장남이자 제2비 사숙왕후 소생으로 1084년 6월 을미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욱이다. 1094년 5월 선종이 서거하자 그 유언에 따라 중광전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4대 왕에 올랐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헌종은 유아시절부터 소갈증(당뇨병)에 시달려 매우 병약했으며,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대신들은 왕권이 선종의 동생들 중에 한 명에게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선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계림공이 차기 왕으로 유력시 되고 있었다. 그런데 선종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병약한 아들에게 그만 선위해버린 것이다. 덕종, 정종, 순종 등이 이미 어린 아들보다는 동생에게 선위한 것을 보아왔던 신하들은 선종이 어린 아들에게 선위한 사실에 대하여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왕위를 노리고 있던 계림공 왕희를 비롯한 선종의 동생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헌종 즉위 당시에 살아 있던 선종의 동생은 계림공 왕희를 비롯하여 대각국사 의천, 조선공 왕도, 상안공 왕수, 보응승통 왕규, 부여공 왕수, 진한후 왕유 등 모두 7명이었다. 이 중에서 대각국사 의천과 보응승통 왕규는 이미 승려의 몸이었기에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나머지 5명이 편을 갈라 세력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이들 5명은 다시 인예왕후 이씨 소생과 인경현비 이씨 소생으로 나눠졌는데,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는 왕희와 상안공 왕수가 있었고 인경현비 소생으로는 왕도, 부여공 왕수, 왕유가 있었다. 그러나 서열상으로 보나 대의명분으로 보나 선종의 동복동생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왕희가 가장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대신들도 왕희를 추종하는 경향을 띠었다.
고려 최대 문벌귀족 인주(경원) 이씨 가문
고려 개국 초기 한천했던 인주 이씨 가문이 고려 전기 최대의 문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안산 김씨, 해주 최씨와 같은 당대의 명문가와 연혼을 통해 신분상승의 기반을 축적함으로서 가능할 수 있었다. 당시 이러한 세태를 짐작하게 하는 기사가 <고려사(高麗史)> 문공인전(文公仁傳)에 보인다. <공인은 아려(雅麗)하고 유순하였으므로 시중 최사추(崔思諏)가 딸로서 처를 삼게 하였다. 공인은 과거에 급제하여 직사관이 되었는데, 가세가 단한(單寒)하였으나 귀족과 연혼하여 호사를 마음대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세가 보잘 것 없었던 문공인이 해주 최씨와 연혼관계를 맺음으로서 정치권력과 경제적인 부를 성취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후 문공인은 수상을 역임하고 그의 가문은 5대에 걸쳐 3명의 수상과 여러 명의 재상을 배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을 닦게 된 것은 문공인의 실력보다는 최사추의 사위가 됨으로서 가능했던 것이다.
인주 이씨 가문 역시 위의 문공인의 예와 유사한 길을 걸었다. 소성백(邵城伯) 이허겸(李許謙)이 자신의 딸을 고려 전기 명문가인 안산 김씨 가문의 김은부(金殷傅)에게 시집 보냄으로서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인주 이씨 가문은 이허겸의 소성백이라는 작위(爵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 초기에 두각을 나타낸 집안은 아니었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의 예를 따라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다섯 작위가 있었는데 이허겸의 백작위는 세 번째로 특출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허겸이 안산 김씨와 혼인을 맺자 인주 이씨 가문은 이를 십분 활용하여 부와 정치력을 축적하였다. 이 결과 손자인 이자연(李子淵) 대에 와서는 고려 최고의 귀족 가문인 왕실의 외척이 되어 최고의 가문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자연이 왕실과 외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김은부에게 시집간 이허겸의 딸이 두 자매를 낳았는데 이들이 훗날 현종비(顯宗妃)가 되는 원혜태후(元惠太后)와 원성태후(元城太后)이다. 신분제 사회이며 문벌 귀족 사회인 고려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허겸은 안산 김씨와 사돈이면서 왕비의 외할아버지가 됨으로서 왕실과 간접적인 연관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고려에서 명문있는 가문들이 왕실과 혼사를 맺어 외척이 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다. 이러한 영예를 인주 이씨 가문은 안산 김씨에게 시집 보낸 딸을 통해 간접적으로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비의 외가로 만족하던 인주 이씨 가문이 고려 문벌 귀족 가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이자연 대에 와서이다. 이자연은 현종 15년 22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뒤 중추원과 이부를 거쳐 문헌공도 최충의 뒤를 이어 53세의 나이로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이는 이자연이 가문의 후광뿐 아니라 자신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관계에 진출한 이자연은 고모부이자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의 후원을 받으며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052년 이자연은 자신의 세 딸을 문종(文宗)에게 납비(納妃)하니, 곧 인예왕후(仁睿王后), 인경현비(仁敬賢妃), 인절현비(仁節賢妃)가 그들이다. 특히 인예왕후는 아들 6형제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셋이 차례로 순종(順宗), 선종(宣宗), 숙종(肅宗)으로 즉위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 납비로 인해 인주 이씨 가문은 명실상부한 고려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으로 올라 서게 된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이자연 이후부터 그의 자손들은 모두 음직(蔭職)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고 있다. 고려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음서제(蔭敍制)는 <부조(父祖)의 음덕에 따라 관리로 서용(敍用)하는 제도>로 5품 이상의 고급 관료나 공신의 자제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소수 문벌 가문에 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신분 상승을 위해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자연은 문종에게 딸 셋을 납비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넷째 아들 이호(李顥)의 딸도 순종에게 납비하였다. 이후 인주 이씨 가문은 다섯 명의 왕과 연이어 혼사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순종은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하세하였지만 인주 이씨의 권력 기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음 왕위는 34살 먹은 순종의 동생인 선종이 이어받게 되는데 그는 인주 이씨 가문에서 3명의 비를 맞아 들인 인물이었다. 사숙태후(思肅太后)는 이자연의 둘째 아들 이석(李碩)의 딸이고, 정신현비(貞信賢妃)는 이자연의 동생 이자상(李子祥)의 아들 이예(李預)의 딸이며, 원신궁주(元信宮主)는 이자연의 장남 이정(李頲)의 딸이었다. 이 가운데 사숙태후와 정신현비는 선종이 왕이 되기 전인 국원공으로 있을 때 맞이한 부인이었고, 원신궁주는 왕이되어 맞아들인 비였다. 이들 왕과 왕비는 모두 외사촌과 고종사촌 사인인 내외종간이었기에 촌수대기도 복잡한 관계였다. 선종이 다른 명문가들의 불만을 제쳐두고 오직 인주 이씨 가문의 딸들과 혼인한 것은 그만큼 인주 이씨의 정치, 경제적 위세가 막강해진 증거였다.
이러한 인주 이씨의 약진도 선종 이후 헌종(獻宗)과 숙종 대에 왕권의 견제로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병약한 헌종이 왕위에 오른지 1년 여 만에 숙부인 숙종에게 양위를 하였다. 4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은 이자연의 외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림공으로 있던 시절 태조 왕건의 첫부인을 배출한 정주 유씨(貞州柳氏) 가문에서 아내를 맞이하였고, 이자의의 난을 제압한 반 인주 이씨 세력의 대표격이었다. 이런 이유로 숙종은 앞서의 왕들 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인주 이씨를 억누르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숙종은 왕으로 즉위한 뒤 부인인 유씨를 왕비로 책봉하려 했지만 인주 이씨를 비롯한 여타 외척세력들이 강하게 반대하였다. 숙종 재위 시 일시적으로 왕권이 강화되었지만 외척들을 억누를 정도로 강화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숙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고 뒤를 이어 예종이 즉위하면서 인주 이씨들은 다시 득세하기 시작한다. 예종은 선종과 정신현비 사이에서 태어난 경화왕후를 맞아들였지만 왕후로 책봉된지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예종은 이자겸의 둘째 딸을 맞아들여 비로 삼으니 인주 이씨는 다시 정치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게다가 비로 책봉된 문경황후가 이듬해(1109년) 왕세자를 낳으니 이자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 지는 듯 하였다.
이자의(李子義)의 난
1093년 5월, 선종이 재위 11년 만에 하세하자 11살 먹은 병약한 헌종이 즉위하였다. 선종 재위 시 대신들은 세자가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왕위를 동생인 계림공 왕희에게 넘겨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미 덕종, 정종, 순종 등이 왕권의 안정을 위해 어린 세자를 제치고 자신의 동생에게 선위한 전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종은 대신들의 이러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인 욱(昱)에게 왕위를 넘겨주니 이가 헌종이다. 이렇게 되자 헌종의 모후인 사숙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사숙태후는 자신의 거처인 연화궁을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일체의 정사를 대리하기 시작하였다. 사숙태후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인 헌종이 잦은 병치레로 정사를 돌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대신들 가운데 일부는 이자의의 여동생인 원신궁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헌종의 이복동생 한산후(漢山侯) 윤(昀)을 왕으로 추대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들 무리의 대표격인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자의는 재상 이자위(李子威)와 협력하여 자신의 생질인 한산후를 병약한 헌종 대신 왕으로 옹립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자의는 문하시중 이정의 아들로 음서의 혜택을 통해 벼슬에 오른 자였다. 그의 가문은 조부 이자연 대에 세 딸을 문종에게 납비하여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이런 집안 배경으로 이자의는 헌종이 즉위하자 중추원사로 승격될 수 있었다. 이자의가 자신의 생질을 왕위에 옹립하려는 야심은 당연히 왕실과 다른 문벌 귀족 가문들의 견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로인해 조정은 이자의를 지지하는 파와 왕실을 지지하는 파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문벌 귀족 계급들이 왕위 문제로 인하여 서로 대립하게 되는 시초였다.
이자의의 반대파의 정점에는 왕의 숙부이자 선종의 동생인 계림공(鷄林公) 희(熙)가 있었다. 그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소태보(邵台輔)와 협력하여 이자의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양측 간의 긴장은 헌종이 즉위하자 폭발하고 말았다. 먼저 이자의가 자신의 사병을 동원하여 선수를 쳤다. 1095년 7월 헌종 원년, 이자의가 자신이 사사로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동원하여 거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계림공은 즉각 소태보에게 연락하였다. 이에 소태보는 상장군(上將軍) 왕국모(王國髦)를 궁궐로 보내 어린 왕을 입위케 하였다. 이에 양측의 무력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무력 충돌이란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왕국모는 장사(壯士) 고의화(高義和)에게 소수의 군사를 주어 이자의를 암살할 것을 명령하였다. 고의화는 은밀히 궁궐에 입위하여 이자의를 주살하고 그의 추종자인 합문지후(閤門祗侯) 장중과 중추원 당후관 최충백을 살해함으로서 양측간에 벌어질 유혈충돌을 사전에 방지하였다.
계림공은 이자의를 처단한 뒤 그의 아들 작(綽)과 장군 숭렬(崇列)을 체포하여 살해하고, 추종자 50여 인을 체포하여 남방으로 유배시켰다. 그리고 원신궁주와 한산후, 그의 두 동생은 경원으로 추방하였다. 이 공로로 중서령(中書令)이 된 계림공은 조정을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교체하고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왕이 있음에도 계림공의 명을 따르게 되자, 그 해 11월 헌종은 왕위를 양위할 수 밖에 없었다.
이자의의 난을 제압한 지 3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난 헌종은 외형상 선위의 형식을 취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숙부가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숙종은 우선적으로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억누르고 왕권 강화에 주력하였다. 그의 이런 강경책으로 재위 초기에는 정치가 안정되어 번영을 구가하였지만 후기에 들어서면서 동북의 여진이 성장하고 거란의 요가 쇠퇴하면서 북방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정치적 격변기를 고려의 집권층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서 정치, 외교적인 부담을 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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