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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4 : 고려의 역사 112 (제14대 헌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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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4 : 고려의 역사 112 (제14대 헌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8. 29. 02:27

 

 

 

한국의 역사 344 : 고려의 역사 112 (제14대 헌종실록 3)

 

 

제14대 헌종실록

(1084~1097, 재위 1094년 5월~1095년 10월, 1년 5개월)

 

1.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와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계속)

 

내부모순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외척세력이 정권을 좌우하면서 고려 사회는 심각한 자기 모순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신라 말 호족 세력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고려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지배계급의 이익이 극대화되도록 조직된 계급사회였다. 고려 왕조 전반기에는 왕권과 호족 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이 조화를 이루면서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한 가문이 왕실의 혼사를 독점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왕권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지배 귀족계층간의 정치적 우위를 다투는 권력투쟁을 수반하게 되었다. 이는 왕권이 호족 세력들 간의 견제 역할을 상실하면서 우월한 귀족가문이 득세하게되면 이를 제지할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왕권의 약화는 우월한 한 가문이 득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셈이었다.

 

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순간 고려 귀족사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런 분열은 견제와 균형을 근간으로 삼은 왕조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폭발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당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인주 이씨 세력은 귀족계급의 분열이 가져올 위험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봉합할 유연성과 포용성이 없었다. 게다가 인주 이씨를 견제할 귀족세력들도 수년간 권력투쟁을 통해 도태됨으로서 한 가문의 독주를 견제할 주도세력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는 인주 이씨 한 가문에게 수십년 간 권력이 집중되어 발생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런 결과 전반기 고려의 융성을 주도했던 귀족정치체제가 상호간의 견제와 균형을 상실하면서 거꾸로 왕조의 몰락을 제촉하는 한 원인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결과의 종착점이 이자의와 이자겸의 난이었다. 특히 이자겸의 난은 잠시 고려의 시직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고, 왕조 내부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초기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상실한 고려는 이런 후유증과 모순을 극복할 탄력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리자라 할 수 있는 귀족연합세력 역시 귀족연합의 폐해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혁신하는 대신 자신들을 중심으로한 권력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몰두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는 한 가문에 의한 권력독점은 방지할 수 있었지만 문제의 근본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고려는 귀족가문들에 의해 문신위주 정책을 더욱 가속화 하게된다. 이는 왕조의 건국자 태조 왕건(太祖王建)이 국시로 표방한 북진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초기의 문무의 균형있는 정책이 소멸되었음을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고려가 꾸준히 추진했던 북진정책이 사실상 소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결과 고려는 권력의 한 축인 무신들이 권력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나중에 무신의 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려는 광종(光宗) 이후부터 꾸준히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개국 초부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무훈(武勳)들을 권력의 축으로부터 멀리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의 절정은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로 955년 실시된 최초의 과거시험이었다. 유교경전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한 과거는 사실상 무신들의 정치참여를 봉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신 위주의 고려사회가 자신감을 획득한 것은 성종 이후 북방에서 흥기한 거란의 <요>와 3차례 무력 충돌에서 승리한 이후 였다. 고려는 이 승리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동북아의 중요한 정치 세력이 되었음을 인식하였고, 이를 아주 적절히 활용하였다. 그리하여 <송>과 <요>에 대하여 자주적인 북방외교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종 이후 외척세력이 득세하면서 전반기의 역동성과 현실적인 외교정책이 사라지게 된다. 군사력과 현실적인 외교력으로 무장하여 동북아의 세력 균형추로서 역할을 하고 있던 고려가 외척세력의 득세로 이 균형추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는 문벌귀족들이 정권을 잡은 뒤 자신들의 가문 이익을 위해 국가의 자주적인 정책을 포기하고 현상황에 안주함으로서 생겨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후 고려는 동북아의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무신을 정치의 한 축에서 배제함으로서 세력 균형의 중요 요소인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이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실리적인 외교를 추진한 개국초의 적극적인 북진정책이 중단된 것이었다. 이로서 고려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왕조 전반기를 마감하고 수동적이며 방어적인 후반기를 맞이하게 된다.

 

 

고려 문벌 귀족의 실체

918년 태조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는 호족(豪族) 연합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왕조였다. 그러므로 왕위에 오른 태조는 건국 초기 이들 호족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중폐비사(重幣卑辭):재물을 후히 주고 말을 낮 춰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음>의 예로 호족들을 회유하였다.

 

호족이란 신라말에 대두한 신흥세력가들로 지방의 촌락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그곳에서 거주하던 지배세력이었다. 이들은 성주나 장군을 자칭하던 부류와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해상세력가, 국경지대의 수비를 위해 변경에 설치한 군영에 근거지를 둔 군진세력가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 외에 몰락한 중앙 귀족들이 일족을 거느리고 낙향하여 새로운 지반을 쌓고 세력가로 행세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라의 통제권이 약화되자 거주하던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지역의 실력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 호족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일부 유력자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중앙 정부와 유사한 행정조직을 갖추기 까지 하였다. 호족들은 세력의 크기에 따라 대호족과 중소호족으로 구분하였는데 지역에 따라 세력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대호족은 고려가 건국되면서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벌 귀족으로 변신한 반면 중소호족들은 지방에 근거를 둔 향리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들 향리 세력은 성종때 5도양계(五道兩界) 체제로 지방행정을 개편하면서 부호장(副戶長) 이하의 향직에 임명되어 속현과 진의 지배자로 계속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한 군현의 관리를 통해 중앙정부와 연결됨으로서 고려 지배 체제의 하부를 구성하게 된다. 이들 중소호조들은 과거나 특별한 공훈에 의해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벌 귀족에 편입될 기회가 주어졌지만 쉽지는 않았다.

 

대호족들은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한 무장 호족세력으로 공음전(公陰田)이나 전시과(田柴科)와 같은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일정한 지분을 왕조 내내 보장받을 수 있었다. 태조는 건국 초기 이들 호족 세력을 무마시키기 위해 정략적인 결혼으로 이들과 외척관계를 맺기고 하였다. 이를 반영하듯 태조는 모두 29명의 비를 거느렸는데 이들 모두는 건국을 도와준 유력한 호족세력의 딸들이었다. 태조가 이렇게 한 것은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 세력과 혼인을 맺음으로서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고 외척들 상호간의 견제를 통해 왕권을 안정, 강화 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족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이용하여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여 벌문 세력으로 성장함으로서 오히려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자신들의 세력을 신장시킨 호족들은 이를 바탕으로 고려 왕실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서 왕실의 위상에 심대한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고려의 문벌 귀족으로 성장한 부류는 호족 말고도 신라의 육두품 계급이 있다. 육두품은 신라의 골품제도하에서 진골 다음 가는 계급이었지만 17관등 가운데 6위인 아찬(阿湌)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였다. 이들은 이런 불평등한 신분제도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지배 계층들도 불만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 지배층은 제도에 불만을 품은 육두품 계층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당>으로 관비유학을 보내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으로 유학간 유두품 계층의 자제들은 그곳에서 능력본위의 인재등용방법인 과거제와 유교적 정치이념에 깊이 경도되었다. 이들은 선진적인 <당>의 정치 제도를 통해 신라의 골품제에 대한 모순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어 귀국하여 신라의 신분제도를 공격하는 선봉에 서게 된다. 이들 육두품 세력들 대다수는 후삼국의 혼란기에 조국인 신라보다는 고려와 후백제에 귀의하여 <당>에서 배운 선진적인 유교이념을 새로운 왕조에 적응시키려 노력하였다.

 

후삼국 정립 시기에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한 육두품 출신들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자 새로운 왕조에 참여하여 유교적 이상에 입각한 정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유교적 질서에 입각한 정치적 주장은 고려 건국의 실질적인 세력인 무장 호족 세력에 의해 억눌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지속적인 주장은 성종 이후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들 육두품 세력이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광종과 경종 연간에 호족 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통해 많은 수의 개국공신들이 제거됨으로서 가능하였다. 태조 왕건은 삼국 통일 후 왕조 건설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였는데 그 수가 2천여 명이 넘었다. 이렇게 많은 공신들 대다수가 광종과 경종 대에 제거됨으로서 새로운 관료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새로운 관료들은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기존의 세력층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신진관료들을 뽑았던 것이다.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한 신진관료들은 기존의 호족세력들과 융화되어 새로운 고려의 지배계급이 되었다. 이때 육두품 계층들이 과거를 통해 지배계급으로 편입되었다. 이들 신진관료들은 호족과 자신들끼리 연혼을 통해 혹은 왕실과 혼인을 통해 문벌 귀족화되면서 스스로 특권화 되었다. 이들이 고려 전기의 융성한 귀족문화를 선도한 계층인 것이다.

 

고려는 귀족, 중인, 상민, 천민의 4계급으로 구분된 신분제 사회였다. 귀족에는 유산계급, 지식인, 관료들이 속하였다. 하급관리와 기술관, 그리고 향리는 중인계급의 몫이었다. 고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민계급에는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사회의 맨 밑바닥을 차지하는 천민 계급에는 노비, 화척, 진척, 재인, 무격, 향소부곡민이 속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계급질서는 신라의 골품제처럼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천민도 탁월한 군공을 세우면 귀족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민과 천민계급이 귀족으로 올라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려사회를 구성하던 상층의 문벌 귀족들은 의종 24년에 일어난 무신의 난으로 도태되었다. 대신 이 자리를 권문세가(權門勢家)라 불리우는 새로운 지배계층이 차지하게 된다. 이들은 고려 전반기의 문벌귀족과는 다른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무신정권 때부터 서서히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다.

 

권문세가의 한 갈래로 무신세력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문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다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경제적인 부를 장악한 계급이었다. 이 부류의 대표로는 무신 정권 최고의 실력자였던 최충헌(崔忠獻)으로 대표되는 우봉 최씨(牛峰崔氏)와 김취려의 언양 김씨가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또 다른 갈래는 무신 정권 시 등용된 신관인新官人 계층으로 이들은 종래으 문벌 귀족에 들지 못했던 하급 관리와 향리의 자제들로서 무신란 이후 기존의 통치질서가 무너진 가운데 과거를 통해 출세의 길로 들어선 자들이었다. 이들의 대표적인 가문으로는 여흥 민씨(驪興閔氏)와 횡천 조씨(橫川趙氏)가 있다. 그리고 전기의 문벌 귀족 가문 가운데 많은 가문이 종래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권문세가로 변모하였다. 이들 문벌 세력들이 온전히 남아 세력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왕실의 보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의종이 무신란으로 쫓겨나면서도 왕실은 보전되었는데 이는 고려 최고의 문벌 가문이 그대로 존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새로운 무신 정권도 귀족 지배 체제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미천한 신분의 무신 집권자들이 앞을 다투어 재래의 귀족 가문과 혼인하기를 원하였다. 이 결과 무신란 이후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정안 임씨, 최충헌 일가와 인척관계를 맺은 정주 김씨 가문은 무인 집권 시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들 문벌 귀족들은 급변하는 고려 후기 사회 속에서도 자신들을 체제에 적응시키고 변환하는 노력을 통해 재편되는 계급 질서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가 <원>에 복속한 이후 친원파로 득세한 자들이 권문세가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정규적인 관인의 진출로를 따라 출세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원>의 지배체제에 영합하여 급속하게 권문세가로 나아간 부류였다. 이들 4부류의 권문세가들이 하나의 새로운 실체로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충열왕 대(忠烈王代)였다. 이런 사실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에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의 지정은 권문세가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완성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문벌 귀족의 특징

고려 전반기를 주도했던 문벌 귀족들은 불교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유학을 통해 정치이념을 제공 받았다. 문벌 귀족은 앞에서 보았듯이 개국 이래 번성해 온 호족출신과 과거제를 통해 성장한 문신계열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호족출신의 문벌들은 불교와 전통적인 풍수지리를 신봉한 반면, 문신귀족들은 유교를 최고의 선으로 삼았다. 지배계층의 이런 사상의 병립현상은 고려 전기를 다양하면서도 융통성있는 사회로 변모시키는데 일조 하였다. 이는 유교가 조선에서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유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사회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고려가 신앙생활의 원리로 불교를 숭상했고, 정치이념과 인간적 윤리 도덕 규범으로는 유교를 택함으로서 예견된 것이었다.

 

태조 왕건과 고려를 함께 건국한 개국 공신들은 신라 말에 급격히 융성하기 시작한 선종 불교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선종은 경전에 얽매여 있는 교종에 비해 사상적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종은 신라의 골품제에 비판적인 계층에 의해 수용되어 융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고려를 건국하자 선종의 자유분방한 사상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도를 창출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개국 공신들은 자신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어준 선종에서 다시 교종으로 선회하고 말았다. 이 결과 불교는 서민적인 선종풍에서 귀족적인 교종풍의 화엄종이 융성하게 되었다.

 

반면 문신 귀족들은 불교보다는 유학의 경전에 깊이 경도되었다. 이들 문신들은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가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를 건의하면서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이 정계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공신들의 권력이 비대해 지는 것을 염려한 왕실의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왕실에서는 문신세력이 공신들의 권력을 견제하여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건의문에서 유학적인 기풍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20조에서 <석교(釋敎)를 행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본이요, 유교(儒敎)를 행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근원입니다. 수신은 내생(來生)의 자(資)요 치국은 금일의 요무(要務)로서, 금일은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인데도 가까움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함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도 <불법을 숭상하는 것이 비록 선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부언함으로서 당시 유교를 정치 지도 이념으로 삼은 문신 귀족들의 사상적 한계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승로는 건의문에서 유학이 정치의 근간이 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태조는 하세하는 자리에서 훈요십조를 통해 불교와 풍수지리를 잘 지키도록 당부하는 유교(遺敎)를 남겼다. 특히 불교와 관련해서는 선종과 교종 양쪽을 다 같이 존중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불사를 잘 지켜 거행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찰은 도선의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지덕이 쇠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창건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면서도 종교적 균형을 잃지 말도록 당부하고 있다. 태조의 이같은 유시는 고려 5백 년을 관통하는 지침이 되었다. 물론 최승로의 건의로 인해 태조가 <훈요십조>에서 당부하였던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국가적 불교행사가 성종 6년부터 현종 원년까지 일시 중지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유교적 지도이념이 고려의 지도 이념으로까지 발전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 예로, 유교를 지도이념으로 채택한 문신들은 예의(禮儀)에 입각한 윤리도덕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고려에서 성행하던 근친혼을 금지시키려 노력 하였다. 일단 이들의 노력은 문종 12년 4촌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판문을 시작으로 선종 2년에는 2촌간인 동부이모자매(同父異母姉妹) 사이와 숙종 원년에는 6촌간인 재종자매(再從姉妹) 간의 혼인을 금지하는 조치로까지 발전하였지만 지배 최상층인 고려 왕실의 예에서 보듯 금지조항은 아무런 법적 재재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문신들은 유교정신에 입각하여 왕실의 권위가 국가 전체에 고루 스며드는 중앙집권적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들의 이런 주장은 성종 때 처음으로 중앙의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였다. 이로 인해 개국 초부터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던 중소호족들의 지위가 심대한 타격을 입게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관리의 길을 걸었지만 대부분은 종래의 독자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향리로 격하되었다.

 

지방의 호족들이 정리되면서 고려의 지배층은 문신귀족,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여 관료의 길을 걷게되는 중소호족출신 귀족, 개국에 공을 세운 대호족과 신라의 육두품 계열의 귀족들이 지배 상층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고려를 이끌어가는 문벌귀족의 핵심계층이 된다.

 

고려 초기 문벌 귀족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의 다양성은 모든 분야에서 유연한 탄력성을 발휘하였다. 고려가 통일 신라와 함께 한국사에서 국제적인 성격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다양성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지배 계층 가운데 문신 계열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하였다. 반면 훈신계열과 지방에 근거지를 둔 호족세력은 불교와 통일 신라 시대 이래 고수되어 왔던 전통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들 지배 세력 사이에서 유교적 가치관과 전통적 가치관이 충돌함으로서 통치이념의 정립을 위한 두 세력 사이의 투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조짐은 인주 이씨의 족벌체제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기간동안 팽배하기 시작하여 결국 <묘청(妙淸)의 난>으로 폭발하였다. 최후의 승리자는 문신 계열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사회를 유학에 의한 통치체제로 변모시켜 결국 다양하고 탄력성 있던 고려의 사회를 단일성의 사회로 변모시켜가기 시작하였다.

 

문신 귀족은 자신들의 뿌리가 신라의 골품제에 반기를 들었던 계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고착화 과정에서 자신들이 새로운 신분제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모순에 직면하였다. 이들은 이런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저한 신분제 사회를 고수함으로서 결국 <무신의 난>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들의 몰락은 단순히 문신 귀족의 몰락이 아니라 문종 이후 지속되었던 <고려의 황금기>가 종언을 고하는 신호였다. 이제 고려는 다양하고 탄력있는 창조적 사회의 탄력을 포기하고 소수 계층을 위한 문화적 독점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무신의 난 이후 등장한 권문 세가에 의해 더욱 촉진된다. 문화적 독점은 민중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 그대로 사치를 위한 사치의 문화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고려의 하층사회에서는 기존에 이루어 놓은 문화를 자신들의 삶 속에 고착시키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런 작업은 몽고의 침입과 고려 말의 혼란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조선의 문화를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하층사회의 이런 노력도 조선이 유학을 국시로 한 단일한 사상적 지도이념을 택하게 됨으로서 발전의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