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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6 : 고려의 역사 114 (제15대 숙종실록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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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6 : 고려의 역사 114 (제15대 숙종실록 2)

두바퀴인생 2011. 8. 31. 02:08

 

 

 

 

한국의 역사 346 : 고려의 역사 114 (제15대 숙종실록 2)

 

  

제15대 숙종실록

(1054~1105, 재위 1095년 10월~1105년 10월, 10년)

 

1.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즉위한 숙종의 10년 통치(계속)

 

부여후 왕수의 역모사건에 대하여 <고려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아마 숙종이 마흔이 넘은 나이였기에 형제계승 전례에 따라 부여후가 차기 왕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숙종에게는 이미 17세나 된 장남 왕우가 있었기에 부여후가 왕위를 잇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수는 왕위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세력을 키우다가 결국 역모혐의를 쓰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왕수가 귀양길에 오른 지 두 달 만인 1100년 정월, 숙종은 자신의 맏아들 왕우를 태자로 책봉하여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또한 그는 양주 땅의 남경(한성)을 새롭게 건설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1101년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최사추, 어사대부 임의, 지주사 윤관 등에게 명령하여 궁궐 조성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최사추 등은 그해 10월 을미일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저희들이 노원역, 해촌, 용산 드지에 가서 산수를 살펴본 즉 도읍을 정하기에 합당치 않고, 오직 삼각산 면악 남쪽의 산수 형세가 옛 문헌의 기록에 부합되오니 청컨대 삼각산 주룡의 중심 지점인 남향관에 그 지형대로 도읍을 건설하소서."

 

최사추의 보고에 따라 숙종은 남경 건설 사유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이듬해 3월 직접 왕궁지를 순행한 다음 궁궐 축성을 명령했다.

 

이 무렵 전국에 송충이 피해가 극심하여 삼림 훼손이 심해지고 농작물에도 막대한 피해가 초래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또한 동북면에서는 북방의 여진족이 더욱 강성해져 변방이 위태롭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숙종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1102년 4월 동여진 추장 영가가 보낸 사절을 맞아들인다.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동여진에서 사절을 보내 은그릇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들을 요청하자 이를 허락하였으며, 1103년 7월에는 여진에 붙잡혀 있다 풀려난 고려인 의원의 보고에 따라 여진의 국력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인식하고 정식으로 사절을 보내 국교를 맺는다. 하지만 여진의 내정이 불안한 탓에 변방에선 계속 전운이 감돌았고, 결국 1104년 정월 동여진 추장 오아속 부대가 내전을 치르면서 정주 관문 밖에 군사를 집결시키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임간을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여진군을 물리치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간은 여진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기마병 중심의 여진군을 이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임간을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탄핵하고, 다시금 윤관을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으로 임명하여 다시 여진족과 대적케 하였다. 그러나 윤관 역시 여진군과 싸워 많은 군사를 잃고 그들과 화의 조약을 맺는 것으로 일단 전운을 잠재웠다. 윤관의 동북 9성 개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뒤에서 다시 논하겠다.

 

숙종 대의 정치.외교는 이렇듯 전반기에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여진족의 국력 강화에 따라 불안이 기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 대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안정궤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덕택으로 주목할 만한 문화적인 성과를 남겼다.

 

1096년에는 6촌 이내의 혼인을 금지하게 되는데, 이는 유학자들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려 왕실은 광종 이후 지속적으로 성골  왕족을 중심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6촌 이내의 족내혼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유학을 숭상하던 유림들은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리를 중시하고 족외혼을 가족제도의 기본 요건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숙종 대에 6촌 이내에 결혼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유림들의 힘이 강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는 족외혼을 권장하던 송나라의 입김도 한껏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6촌 이내 금혼령은 백성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별로 지켜지지 않았음으로 이 법은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다만 이때부터 우리 민족이 조금씩 족내혼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생겼을 뿐이다.

 

1097년에는 주전관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을 주조하고 이듬해에는 고주법(돈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화폐인 '해동통보' 1만 5천 관을 주조하여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1101년 3월에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여 인판사업을 확대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는 61명의 선비와 21명의 현인들을 문선공(공자)의 묘에 배향함으로써 유학의 사상을 더욱 고양하였다. 그리고 1102년에는 은나라 성인 기자의 분묘를 찿아 사당을 세우고 능을 조성하였다.

 

이 같은 유학 진흥책과 함께 원효와 의상을 국사로 추증하고 그들의 공덕을 새겨 동방의 성인으로 높임으로써 불교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1103년에는 송나라의 의관 모개 등에게 흥성궁을 사관으로 내주고 의사를 양성토록 하였으며, 1101년부터 시작된 남경의 궁궐 조성작업이 1104년 5월에 완결되자 같은 해 8월에 왕이 직접 남경으로 내려가 누각과 원림을 유람하고 연흥전에서 반야경 도량을 베풀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업적 이외에 군사적으로는 기마병 중심의 여진에 대항하기 위해 별무반을 조직하게 된다. 윤관의 주장에 따라 설치된 별무반은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과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이 있었으며, 고려는 이들 별무반을 통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한다.

 

숙종 대는 이와 같이 정치, 외교적으로 전환기에 놓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안정되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숙종은 이런 정세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1105년 고구려 동명왕의 묘역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었다. 그리하여 환궁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돌아오는 노상의 수레 안에서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재위 10년 만의 일이었다.

 

숙종의 능은 개경 송림현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영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