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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7 : 고려의 역사 115 (제15대 숙종실록 3) 본문
한국의 역사 347 : 고려의 역사 115 (제15대 숙종실록 3)
제15대 숙종실록
(1054~1105, 재위 1095년 10월~1105년 10월, 10년)
2. 숙종의 가족들
숙종의 부인은 명의왕후 유씨 1명이었으며, 그녀에게서 예종을 비롯하여 7남 4녀가 있었다. 이들 가족 중 예종을 제외한 명의왕후 유씨와 여섯 아들의 삶을 간략히 살펴본다.
명의왕후 유씨(?~1112년)
명의왕후 유씨는 정주 사람으로 문하시중 유홍의 딸이다. 정주 유씨는 태조 왕건의 첯부인을 배출한 가문으로 광종 이후에는 왕비를 배출하지 못하다가 숙종 대에 비로소 다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그러나 숙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정주 유씨 집안에서 왕비를 내는 것에 대해 조정의 반대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유씨는 숙종 4년에야 가까스로 왕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문종 대 이후 계속해서 왕비를 배출했던 인주 이씨 집안과 기타 외척들의 반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숙종이 계림후로 있던 시절에 시집왔으며, 숙종 즉위 후 칭호를 명복궁주라 하였다. 이후 다시 연덕궁주로 개칭되었다가 1099년 3월에 비로소 왕비에 책봉되었다. 숙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태후에 책봉되었으며 이 때 그녀가 거처하는 궁을 천화전이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1112년 병으로 죽으니 승릉에 장사지냈다.
그녀 소생으로는 예종을 비롯하여 상당후 필, 원명국사 징엄, 대방공 보, 대원공 효, 제안공 서, 통의후 교 등 7남과 대령, 흥수, 안수, 복녕 네 궁주가 있었다.
상당후 왕필(?~1099년)
상당후 왕필은 숙종의 둘째 아들로 부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1098년 숙종 3년에 수인보덕 좌리 공신 칭호와 개부 의동삼사 겸교태보 수태위 겸 상서령 관직과 상주국 훈위를 받고 상당후 직위와 식읍 2천호에 실봉 3백 호를 받았다.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1099년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시호는 순상이다.
원명국사 왕징엄(?1141년)
왕징엄은 숙종의 셋째 아들로 1098년에 출가하여 대각국사 의천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1101년 의천이 죽자 그를 이어 승통이 되었으며, 1141년에 사망하였다. 사망 후 인종은 그에게 원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대방공 왕보(?~1128년)
왕보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1102년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예종 원년에 추충광의 공신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겸교태위 수사도 겸 상서령 관직, 그리고 상주국 훈위와 대방후 작위를 받고 식읍 2천 호에 실봉 3백 호를 받았다. 이후 1109년에 작위가 공으로 승진되었다. 하지만 후에 이자겸의 모함으로 경신부로 쫓겨갔다가 그곳에서 1128년에 사망하였다. 이 때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한 후 그를 개경으로 소환하려 하였으나 이미 병마가 찌든 그는 사망한 뒤였다.
그가 죽엇다는 소식을 들은 인종은 그에게 중서령 관직과 대방공 작위를 추증하고 식읍 5천 호에 실봉 5백 호를 내렸다. 그에게는 아들 왕우가 있었다.
예종의 책문에는 그의 성격과 인품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잇다.
"인의와 충신은 이른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인데 그대는 배우지 않고도 이를 알았으며, 시서와 예악은 인간의 문화인바, 그대는 이를 학습하는 데 민첩하였다. 이욕에 관계되는 일은 말하지 않았고, 음험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가만히 있을 때는 반드시 지성으로 수양하였고, 행동할 때면 모두 절도에 맞았다. 종실에 대해서는 화목하고 우애하는 도의가 장하였고 어머니를 모실 때는 공경하고 친애하는 뜻이 깊었다."
대원공 왕효(?~1170년)
왕효는 숙종의 다섯째 아들로 1102년에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다. 예종 즉위 후에는 봉의 동덕공신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사도 겸 상서령 관직과 상주국 훈위가 내려지고 대원후에 봉해졌다. 또한 이 때 식읍 2천 호에 실봉 3백 호가 주어졌다.
그 후 112년에 작위가 공으로 올랐으며, 식읍도 3천 5백 호에 실봉 350호로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이자겸의 모함으로 귀양 갔다가 1130년에 소환되었다. 이 때 인종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그대는 당세의 큰 촉망받는 사람으로 누대의 종친이다. 영남에 귀양 보낸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 이제 왕성으로 소환하고 조카로서 은정을 표하기 위하여 주택을 내리고 겸하여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니 더욱 충성을 다하여 내가 돌보는 심정을 체득하라."
왕효는 귀양에서 풀려나 40년을 더 살다가 1170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함이 있었다.
제안공 왕서(?~1131년)
왕서는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1103년에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맏형인 예종이 즉위하자 제안후에 봉해지고 식읍 2천호를 받았다. 이후 1122년에 제안공에 봉해졌다. 인종 즉위 후에 이자겸에 의해 왕숙들이 모두 모함을 당하자, 이를 모면하기 위햐여 스스로 호위병을 철거하고 문을 닫고 손님을 접견하지 않았다. 항상 술에 빠져 살면서 스스로를 감춘 덕에 귀양길을 면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하고 113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왕장이 있었는데, 의종 때 역모혐의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화병으로 횡사하였다.
통의교 왕교 (1096~1118년)
왕교는 숙종의 일곱째 아들로 1103년에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예종 즉위 후에 통의후에 봉해지고 식읍 2천 호에 실봉 2백 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생명이 길지 못하여 1119년에 23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예종은 책문에서 그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의 아우인 그대 교는 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착한 자질을 가졌고, 어려서부터 장중하여 엄연히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의 덕행이 있고, 밖에서는 준수하고 걸출하다는 명성이 전파되었다. 선군은 어린 그대를 가장 가긍히 여기며 사랑하셨고, 모후는 그대의 고독함을 어여삐 여겨 극진히 자애하셨다."
고려 숙종과 이조 세조
고려 숙종 명효대왕(明孝大王)은 고려 제15대 왕으로 문종 8년(1054) 7월에 태어나 숙종 10년(1105)에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기간은 1095년에서 1105년까지며, 문종의 3남으로 순종과 선종의 동모제(同母弟)이다.
1094년 선종의 아들 헌종(獻宗)이 즉위하매 수태사(守太師) 겸 상서령(尙書令)이 되고, 이듬해 8월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가 10월에 헌종이 제령(制令)을 내려 선위하니 왕이 재삼 사양하다가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였다. 조선 세조 인효대왕(仁孝大王)은 조선 제7대왕으로 태종 17년(1417)에 태어나 세조 14년(1468)에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기간은 1455년에서 1468년까지 14년간이었다. 세종의 2남으로 문종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실로 왕조를 바꿔 360년 만에 있었던 숙질(叔姪)간의 선양의 형식을 빌리고 실질적으로는 유혈을 가져온 왕위계승이었다. 고려 숙종과 조선 세조의 왕위계승을 사서에서는 선위라 하지만 역사는 쿠데타라 해석한다. 즉《고려사》ㆍ《세조실록》의 기록과 달리 역사적 해석은 친조카인 헌종과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본다.
먼저 숙종은 형인 선종이 세상을 떠난 후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는 세조가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친조카인 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3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고 있다. 그 형식도 실질적으로는 정변이었지만 선양(선위)의 형식을 빌려 동양의 역성혁명론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왕위계승인 선양 방식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글·사진 : 나각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문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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