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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7 : 고려의 역사 115 (제15대 숙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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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47 : 고려의 역사 115 (제15대 숙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9. 1. 02:38

 

 

한국의 역사 347 : 고려의 역사 115 (제15대 숙종실록 3)

 

  

제15대 숙종실록

(1054~1105, 재위 1095년 10월~1105년 10월, 10년)

 

2. 숙종의 가족들

 

숙종의 부인은 명의왕후 유씨 1명이었으며, 그녀에게서 예종을 비롯하여 7남 4녀가 있었다. 이들 가족 중 예종을 제외한 명의왕후 유씨와 여섯 아들의 삶을 간략히 살펴본다.

 

 

명의왕후 유씨(?~1112년)

명의왕후 유씨는 정주 사람으로 문하시중 유홍의 딸이다. 정주 유씨는 태조 왕건의 첯부인을 배출한 가문으로 광종 이후에는 왕비를 배출하지 못하다가 숙종 대에 비로소 다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그러나 숙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정주 유씨 집안에서 왕비를 내는 것에 대해 조정의 반대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유씨는 숙종 4년에야 가까스로 왕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문종 대 이후 계속해서 왕비를 배출했던 인주 이씨 집안과 기타 외척들의 반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숙종이 계림후로 있던 시절에 시집왔으며, 숙종 즉위 후 칭호를 명복궁주라 하였다. 이후 다시 연덕궁주로 개칭되었다가 1099년 3월에 비로소 왕비에 책봉되었다. 숙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태후에 책봉되었으며 이 때 그녀가 거처하는 궁을 천화전이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1112년 병으로 죽으니 승릉에 장사지냈다.

 

그녀 소생으로는 예종을 비롯하여 상당후 필, 원명국사 징엄, 대방공 보, 대원공 효, 제안공 서, 통의후 교 등 7남과 대령, 흥수, 안수, 복녕 네 궁주가 있었다.

 

 

상당후 왕필(?~1099년)

상당후 왕필은 숙종의 둘째 아들로 부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1098년 숙종 3년에 수인보덕 좌리 공신 칭호와 개부 의동삼사 겸교태보 수태위 겸 상서령 관직과 상주국 훈위를 받고 상당후 직위와 식읍 2천호에 실봉 3백 호를 받았다.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1099년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시호는 순상이다.

 

 

원명국사 왕징엄(?1141년)

왕징엄은 숙종의 셋째 아들로 1098년에 출가하여 대각국사 의천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1101년 의천이 죽자 그를 이어 승통이 되었으며, 1141년에 사망하였다. 사망 후 인종은 그에게 원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대방공 왕보(?~1128년)

왕보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1102년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예종 원년에 추충광의 공신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겸교태위 수사도 겸 상서령 관직, 그리고 상주국 훈위와 대방후 작위를 받고 식읍 2천 호에 실봉 3백 호를 받았다. 이후 1109년에 작위가 공으로 승진되었다. 하지만 후에 이자겸의 모함으로 경신부로 쫓겨갔다가 그곳에서 1128년에 사망하였다. 이 때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한 후 그를 개경으로 소환하려 하였으나 이미 병마가 찌든 그는 사망한 뒤였다.

 

그가 죽엇다는 소식을 들은 인종은 그에게 중서령 관직과 대방공 작위를 추증하고 식읍 5천 호에 실봉 5백 호를 내렸다. 그에게는 아들 왕우가 있었다.

 

예종의 책문에는 그의 성격과 인품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잇다.

"인의와 충신은 이른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인데 그대는 배우지 않고도 이를 알았으며, 시서와 예악은 인간의 문화인바, 그대는 이를 학습하는 데 민첩하였다. 이욕에 관계되는 일은 말하지 않았고, 음험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가만히 있을 때는 반드시 지성으로 수양하였고, 행동할 때면 모두 절도에 맞았다. 종실에 대해서는 화목하고 우애하는 도의가 장하였고 어머니를 모실 때는 공경하고 친애하는 뜻이 깊었다."

 

 

대원공 왕효(?~1170년)

왕효는 숙종의 다섯째 아들로 1102년에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다. 예종 즉위 후에는 봉의 동덕공신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사도 겸 상서령 관직과 상주국 훈위가 내려지고 대원후에 봉해졌다. 또한 이 때 식읍 2천 호에 실봉 3백 호가 주어졌다.

 

그 후 112년에 작위가 공으로 올랐으며, 식읍도 3천 5백 호에 실봉 350호로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이자겸의 모함으로 귀양 갔다가 1130년에 소환되었다. 이 때 인종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그대는 당세의 큰 촉망받는 사람으로 누대의 종친이다. 영남에 귀양 보낸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 이제 왕성으로 소환하고 조카로서 은정을 표하기 위하여 주택을 내리고 겸하여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니 더욱 충성을 다하여 내가 돌보는 심정을 체득하라."

 

왕효는 귀양에서 풀려나 40년을 더 살다가 1170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함이 있었다.

 

 

제안공 왕서(?~1131년)

왕서는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1103년에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맏형인 예종이 즉위하자 제안후에 봉해지고 식읍 2천호를 받았다. 이후 1122년에 제안공에 봉해졌다. 인종 즉위 후에 이자겸에 의해 왕숙들이 모두 모함을 당하자, 이를 모면하기 위햐여 스스로 호위병을 철거하고 문을 닫고 손님을 접견하지 않았다. 항상 술에 빠져 살면서 스스로를 감춘 덕에 귀양길을 면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하고 113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왕장이 있었는데, 의종 때 역모혐의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화병으로 횡사하였다.

 

 

통의교 왕교 (1096~1118년)

왕교는 숙종의 일곱째 아들로 1103년에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예종 즉위 후에 통의후에 봉해지고 식읍 2천 호에 실봉 2백 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생명이 길지 못하여 1119년에 23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예종은 책문에서 그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의 아우인 그대 교는 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착한 자질을 가졌고, 어려서부터 장중하여 엄연히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의 덕행이 있고, 밖에서는 준수하고 걸출하다는 명성이 전파되었다. 선군은 어린 그대를 가장 가긍히 여기며 사랑하셨고, 모후는 그대의 고독함을 어여삐 여겨 극진히 자애하셨다."  

 

 

고려 숙종과 이조 세조

 

 

 


 

고려 숙종 명효대왕(明孝大王)은 고려 제15대 왕으로 문종 8년(1054) 7월에 태어나 숙종 10년(1105)에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기간은 1095년에서 1105년까지며, 문종의 3남으로 순종과 선종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품성은 어려서 총민하더니, 장성하여 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하였으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웅대하고 굳세며 과단성이 있었다. 오경(五經)·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 등을 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해박하였다. 고려 문종은 일찍이 그를 사랑하며 큰 기대를 하며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라 하였다. 이에 문종 19년(1065) 2월 계림후(鷄林侯)에 봉해지고, 문종 31년(1077)에 계림공(鷄林公)으로 진봉되었다. 선종 3년(1086) 2월에 수태보(守太保)에 올랐으며, 선종 9년(1092)에 서경으로 왕의 어가를 수종할 때 자운(紫雲)이 공의 장막 위에 서리니 이 기운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왕이 될 징조라고 하였다.

 

 

▲ 숙종 남경행차시 들른 삼각산 문수굴

1094년 선종의 아들 헌종(獻宗)이 즉위하매 수태사(守太師) 겸 상서령(尙書令)이 되고, 이듬해 8월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가 10월에 헌종이 제령(制令)을 내려 선위하니 왕이 재삼 사양하다가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였다. 조선 세조 인효대왕(仁孝大王)은 조선 제7대왕으로 태종 17년(1417)에 태어나 세조 14년(1468)에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기간은 1455년에서 1468년까지 14년간이었다. 세종의 2남으로 문종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을 잘하였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부왕인 세종의 한글창제에 참여하였고, 세종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불교서적의 번역을 관장하였으며 부처의 일대기인《석보상절(釋譜詳節)》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역대병요(歷代兵要)》를 찬술하고, 향악의 악보도 정리하였다.


세종은 일찍이 수양대군의 능력을 인정하고 삼각산에 올라 한양도성의 명당을 재평가하는데 그 지세를 살피게 하기도 하였다. 처음에 진평대군(晋平大君)에 봉해졌다가 세종 27년(1445)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조선 문종 2년(1452) 관습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1452년 5월 문종의 아들 단종(端宗)이 즉위하매 7월부터 안평대군을 견제하며 권람ㆍ한명회 등과 함께 정권 장악을 도모하였다. 급기야 이듬해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겸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가 되어 조정의 의결권ㆍ인사권ㆍ군사권 등을 한 몸에 갖고 군국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안평대군ㆍ김종서ㆍ황보인을 죽이고 조정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 마저 주살하였다. 그리고 1455년 윤6월 단종에게 강요하여 선위를 받아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실로 왕조를 바꿔 360년 만에 있었던 숙질(叔姪)간의 선양의 형식을 빌리고 실질적으로는 유혈을 가져온 왕위계승이었다. 고려 숙종과 조선 세조의 왕위계승을 사서에서는 선위라 하지만 역사는 쿠데타라 해석한다. 즉《고려사》ㆍ《세조실록》의 기록과 달리 역사적 해석은 친조카인 헌종과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본다.


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헌종의 나이는 겨우 11세였다. 헌종은 유약하여 몸에 병이 있었던 까닭에 모후 사숙태후가 국사를 오로지 하였다. 이때 종실에는 10명의 왕자 가운데 이미 세상을 떠난 두 왕과 세 왕자 그리고 승려가 된 3형제를 제외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다섯 왕자가 있었다. 즉 계림공 희, 금관후(金官侯) 걸(杰), 조선공(朝鮮公) 도(燾), 부여후(扶餘侯) 수, 진한후(辰韓侯) 유(愉)가 그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후일 숙종이 되는 계림공 희가 있었다. 또 외척으로 헌종의 이모제(異母弟) 한산후 균의 외척인 중추원사 이자의(李資義)가 대벌족으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세종 이후 문종에 이어 12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단종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 과정에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존재 및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의 갈등 고리에 이를 견주어 보는 것도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이때 계림공은 명복궁(明福宮)에 있으면서 이자의의 한산후 균을 추대하고자 하는 음모를 미리 알고 궁궐에 들어와 이자의를 참하고, 그 당여 17ㆍ18인을 살해하였으며, 그 무리 50여인을 남쪽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 이어 숙종이 즉위한 후에는 원신궁주(元信宮主) 이씨(李資義 누이)와 그 아들 한산후(漢山侯) 형제 2인을 경원군(慶源郡)으로 유배 보냈다. 이 정변은 외척 이자의가 후원하는 왕제 한산후 균과 큰 숙부 계림공을 중심으로 한 왕위계승에 대한 쟁탈전이었다.

 

 


 고려 숙종과 조선 세조 정권의 성립과 치적을 비교하여 역사의 반복과 순환의 성격을 독자 스스로 판단해보길 바란다.

먼저 숙종은 형인 선종이 세상을 떠난 후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는 세조가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친조카인 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3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고 있다. 그 형식도 실질적으로는 정변이었지만 선양(선위)의 형식을 빌려 동양의 역성혁명론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왕위계승인 선양 방식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정변에 의한 왕위계승의 상황도 비교된다.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로, 문종에 이어 그 장자 순종, 차자 선종, 그리고 선종의 원자 헌종의 세 왕을 이어 즉위하였다. 숙종의 부왕인 문종에게는 13명의 아들이 있었다. 조선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세종에 이어 문종과 그의 원자 단종에 이어 즉위하였다. 세조의 부왕인 세종에게는 8대군 10군의 왕자들이 있었다. 고려 헌종이 왕위에 오를 때 숙부 5명이 쟁쟁하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조선 단종이 왕위에 오를 때 수양ㆍ안평ㆍ임영ㆍ금성ㆍ영응대군 등 5명의 숙부가 쟁쟁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변으로 숙종은 헌종의 외척 이자의와 그 아들 및 일부 당여를 살해하고 유배도 보냈으며 후에 왕의 동생인 한산균과 그 생모인 원신궁주를 유배 보냈다. 그리고 헌종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 단종의 후원세력을 제거하고 후에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하여 사육신을 비롯한 수십 명의 신료와 금성대군 및 외척을 제거하고 단종을 유배하고 급기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숙종은 민심의 안정과 정권의 안정을 위해 기자묘와 동명성왕묘를 알현하였다. 즉 역대 시조묘를 찾아 자기 정권의 정통성을 홍보하고, 남경(지금의 서울) 경영을 통하여 국운의 연장을 기원하기에 이르렀다고 해석된다. 아울러 국방의 안전과 교역의 풍요로움을 얻는데 기여함으로써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또한 조선 세조가 계유정난 이후 민심안정을 위해 국방 여진의 발호를 막고, 6조 직계제 등을 시행하여 정권의 안정을 꾀하면서, 왕실과 자신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원각사를 중창하고 불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며, 이로써 민심의 안정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려 숙종은 조선의 세조와 유사한 행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린 왕이 즉위하여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 외척과 신권(臣權, 宰相權)이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나게 되는 일반적 상황을 배경으로 이해된다. 나아가 신권에 대응하여 왕권의 수호자적인 위치에 있는 전왕(前王)의 형제가 일정한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는 상황과 연계되어 왕위계승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전왕의 숙부는 형이나 부왕의 권력을 계승하여 새로운 왕권 강화를 통하여 신권을 누르고 민심안정을 꾀하며 중앙집권적 권력을 강화하였던 것이다.

 

글·사진 : 나각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