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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39 : 고려의 역사 107 (제13대 선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339 : 고려의 역사 107 (제13대 선종실록 1)
제13대 선종
선종(宣宗, 1049년~1094년)은 고려 제13대 국왕(재위: 1083년~1094년)이다. 휘는 운(運), 자는 계천(繼天), 시호는 선종관인현순안성사효대왕(宣宗寬仁顯順安成思孝大王). 문종과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의 아들이다.
생애
선종시대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084년에는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사졸들에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사하였다.
1085년 왕의 아우 의천(義天)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자 선종은 환영의식을 성대하게 하였는데 의천은 불경과 경서 1,000권을 바쳤고,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며, 송, 요, 일본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여 거의 4, 000여 권에 달하였는데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우고,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청에 따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사찰인 국청사(國淸寺)를 짓게 하였다. 1091년 예부의 주장으로 국학(國學)에 72현의 상을 벽에 그려 붙였는데, 그 차례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를 따르고, 그 복장은 10철(十哲)을 모방하게 하였다.
1092년 병이 들어 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고 문득 시를 지었는데 “약효가 있고 없음이야 무엇을 염려하랴. 덧없는 인생 시작이 있었으니 어찌 끝이 없으리. 오직 원하는 것은 여러가지 선행을 닦아 청청한 곳에 올라 부처에게 예를 드림이네.”라는 구절이 있어 만백성이 안타까워 하였다. 1094년 2월 열병(閱兵)을 한 뒤 재위 10년 7개월 만에 향년 46세로 승하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仁陵)이며, 시호는 사효(思孝)이다.
가계
- 사숙왕후 이씨(思肅王后)
- 헌종
- 수안택주(遂安宅主)
- 정신현비 이씨(貞信賢妃)
- 경화왕후(敬和王后) - 예종의 비.
- 원신궁주 이씨(元信宮主)
- 한산후(漢山侯)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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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선종실록
(1049~1094, 재위 1083년 10월~1094년 5월, 10년 7개월)
1. 선종의 중도정치와 고려 문화의 융성
순종이 즉위 3개월 만에 죽자 동복 아우인 선종이 왕위에 올라 문종의 정치 형태를 이어간다.
선종은 문종의 둘째 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운, 자는 계천이다. 1056년 3월 국원후에 책봉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쳐 상서령으로 있다가 1083년 7월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중서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순종이 재위 3개월 만에 죽자 고려 제13대 왕에 올랐다.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거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한편 문화적으로 앞서 있던 송과 가까이 함으로써 고려가 문화를 존중하는 국가임을 과시하고, 일본과 여진 등에 대해서도 강경책과 유화책을 고루 실시하여 어느 한 쪽에 편중되는 일이 없었다.
이 시기의 외교 부문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성종 대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거란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였다는 점과 유난히 일본과의 교류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거란에 대해서 강경 자세를 보였던 것은 고려 국력이 그만큼 극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1084년 9월 거란의 어사중승 이가급과 관련된 기사는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 해에 거란에서는 선종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 왔는데, 이가급은 사절단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 그런데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선종의 생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개경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고려 백관들이 이가급에게 '사신의 이름이 가급인데 어째서 불급이 되었을까요?"하고 놀렸다고 한다.
거란의 사신에 대해 고려 신하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와 거란의 관계가 대등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또 1086년 5월 고려는 거란에 사절단을 보내면서 거란이 당시 압록강변에 설치하고 있던 각장(일종의 국경 시장) 시설과 관련한 강력한 항의문을 전달하기 위해 상서우승 한영을 고주사로 파견한다. 고려의 항의 내용은 당장 각장 설치를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려의 이 같은 요구로 각장 설치 공사는 잠시 주춤하는 듯하다가 시일이 지나자 다시 진행된다. 이에 선종은 1088년 2월에 중추원부사 이원을 구주에 파견하여 비밀리에 국경 수비 대책을 세우게 된다. 말하자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렇듯 국경 수비책까지 마련한 고려 조정은 그해 9월에 다시 태복소경 김선석을 다시 거란에 파견하여 압록강변의 각장 설치 계획을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편지 속에는 소손녕과 서희의 담판으로 국경이 확정된 일에서부터 성종 대에 거란 태후가 입록강을 국경으로 하자고 약속한 일, 그리고 몇 번에 걸쳐 고려 조정이 국경 문제와 관련하여 항의한 일 등을 열거하면서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거란 조정으 별수 없이 각장 설치 건은 확정된 일이 아니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온다. 그리고 고려를 달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양 2천 마리와 수레 23기, 말 3필 등을 선종에게 선사했다.
이렇게 하여 문종 이후 줄기차게 계속되던 국경문제는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이는 고려가 당시 동북아 최강대국이던 거란과 맞상대하여 얻어낸 외교적 성과로 고려 국력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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