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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37 : 고려의 역사 105 (제11대 문종실록 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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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37 : 고려의 역사 105 (제11대 문종실록 10)

두바퀴인생 2011. 8. 22. 02:38

 

 

 

한국의 역사 337 : 고려의 역사 105 (제11대 문종실록 10)

 

제11대 문종실록

(1019~1083, 재위 1046년 5월~1083년 7월, 37년 2개월)

 

3. 문종시대를 이끈 양대 산맥

 

문종의 오른팔 이자연(1003~1061)

 

문종시대부터 인종 때까지 최대의 권문세가를 뿝으려면 당연히 경원 이씨 집안이다. 경원 이씨를 권문세가에 올려 놓은 사람은 이자연이라는 인물이다.

 

이자연은 인주(경원) 사람으로 이허겸의 손자이며 죄복야를 지낸 이한의 아들이다. 1003년에 태어난 그는 당시의 권문세가였던 현종의 장인 김은부의 처조카였기에 이미 막강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1024년 3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031년 우보궐이 되엇다.

 

그 후 1024년 이부낭중, 어사잡단, 우승선을 거쳐 지중추원사, 중추부사 등을 지내다가 문종 대에 들어와서 1047년에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050년 마침내 평장사에 올라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내사시랑 평장사에 오른 그는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다. 그리고 세 딸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조정의 실세가 되었고 임금의 장인이자 실무직 최고위직인 평장사에 오른 그와는 권력을 견줄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입궁한 그의 큰 딸이 1052년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면서 그는 다시 문하시랑 평장사를 거쳐 1055년에는 재상직인 시중에 오르게 된다. 최충의 뒤를 이어 그가 시중이 된 것이다.

 

최충이 물러나고 이자연이 시중이 되면서 문종의 왕권은 더욱 강화된다. 

 

최충이 유림을 이끌었던 데 비해 이자연은 불교 쪽 인사들과 가까웠고, 그것은 문종의 행동 반경과도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이자연이 시중이 된 다음에 문종은 두 가지 면에서 강한 의욕을 보였는데, 하나는 불교를 융성시키기 위해 흥왕사를 짓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송과의 국교를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이자연이 시중이 된 1055년 10월 문종은 다음과 같이 명령하엿다.

"옛날 재왕들이 불교를 숭상하여왔음을 문헌들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우리의 태조 이후는 대대로 사원을 세워 행복과 경사를 축원하여 왔다. 그런데 내가 왕위를 계승하여 어진 정치를 실시하지 못한 관계로 재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의 힘을 빌려서 나라를 행복하게 하려 하노니 해당 관리로 하여금 적지를 선택하여 사원을 건설토록 하라."

 

문종의 이같은 명령이 있자 문하성 관료들은 산천의 기맥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문종은 그들의 말을 묵살하고 거대한 사찰 건립 작업을 명령한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흥왕사이다. 대궐에 비견할 만한 크기에 주위에 성을 쌓고 가운데 금탑을 세운 어마어마한 사찰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묘하게도 이것은 이자연이 실세로 등장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뤄진다. 더군다나 이자연은 사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아들 소현이 이미 출가하여 금산사의 주지로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후에는 그의 손자, 증손자까지 출가 행렬이 이어졌던 것을 보면 이자연의 사원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후에 그의 손자 이자겸이 사원 세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주도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자연의 사원에 대한 투자와 무관하지 않다.

 

문종과 이자연이 사원 세력을 키울 당시 사회 전반은 최충의 선도로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따라서 문종이 사원 세력을 성장시킨 것이 단순한 신앙심의 발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문신들이 유학도를 중심으로 힘을 형성하자 문종과 이자연은 불교를 융성시켜 그들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문종이 또하나 집착하고 있던 일은 송과의 국교 정상화였다. 이에 대한 열망은 집권 초기부터 엿 보이지만 그것이 직접 언급되는 시기는 1058년 문종 12년이다. 문종은 원래부터 거란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055년 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고 압록강에 다리를 설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난 다음부터 문종은 거란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3년 뒤엔 정식으로 송나라와 국교를 맺으려고 한다. 하지만 내문하성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밀려 이 일은 미뤄진다. 그러나 10년 뒤에 송나라가 정식으로 국교 재개를 요청해오자 그는 강력하게 밀어붙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문종의 이 같은 대송 국교 정상화 의지를 부채질한 사람은 바로 이자연이였을 것이고, 이자연의 힘이 뒤에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문종은 감히 이 같은 과단성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햇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송과 국교를 정상화하던 시기에는 이미 이자연은 죽고 없었다. 하지만 그의 11명이나 되는 아들들은 건재하였고 그들이 떠받치고 있는 사원 세력과 경원 이씨 가문이 문종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자연과 그의 자식들은 문종 집권 후반기를 주도한다. 경원 이씨 집안의 권력 장악은 1061년 이자연이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거기에는 문종에게 시집간 세 왕비의 역활이 지대하였다. 이자연의 맏딸 인예왕후는 순종, 선종, 숙종등을 낳았기 때문에 적어도 이 시기에 경원 이씨 세력에 필적할 정치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경원 이씨 세력의 팽창은 너무 지나친 나머지 왕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급기야 왕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자 반란까지 서슴치 않는다. 이것이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의 난으로 경원 이씨는 완전히 위축되고 이자연이 형성해 놓은 경원 이씨 가문의 정치적 아성도 점차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