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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35 : 고려의 역사 103 (제11대 문종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335 : 고려의 역사 103 (제11대 문종실록 8)
제11대 문종실록
(1019~1083, 재위 1046년 5월~1083년 7월, 37년 2개월)
3. 문종시대를 이끈 양대 산맥
동방의 공자 최충(984~1068년)
최충(崔沖)은 984년에 태어났으며 호는 성재, 월포, 방회 등을 사용하였고, 자는 호연이다. 해주 최씨 온의 아들이며 그는 21세 때인 1005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우습유에 올랐으며, 1013년에 황주량 등과 같이 '칠대실록' 편수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그후 한림학사, 예부시랑, 간의대부, 형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문종 즉위 후에는 평장사로 있다가 곧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문하시중에 임명된 그에게 가장 먼저 부여된 일은 형법을 제대로 세우는 일이었다. 1047년 4월 왕은 최충과 율사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법률이란 형벌을 판단하는 규정이다. 그것이 분명하면 형벌에 억울하고 지나친 것이 없을 것이요, 분명치 못하면 죄상에 대한 경중이 옳게 처리되지 못할 것이다. 현행 법률에 어떤 것은 잘못된 것이 많으므로 내 이를 못내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바이다. 시중 최충으로 하여금 여러 법관들을 모아 상세한 교정을 하도록 하되 타당하게 할 것이며, 몇 번이나 교정을 하였는지도 기록하여 철저하게 고증, 시정토록하라."
시중 최충은 왕의 명령을 받고 율사들과 함께 형법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당시까지 허술하게 되어 있던 많은 법규들이 고쳐지고, 죄수에 대한 심문을 할 때는 반드시 형관 3인이 함께 들어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이 마련되었다.
문종은 이외에도 많은 법제를 신설하고 개편하였는데, 여기에는 최충의 조언이 많이 작용한다. 문종은 즉위년 8월 경신일 아침 조회를 마치고 당시 시중으로 있던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을 불러 정치적 당면 과제를 질문한 바 있다. 아마 이 때 최충은 법제도의 확립이 정치의 관건이라고 역설했을 것이다. 이는 시중 최제안이 죽고 최충이 시중으로 오른 후 곧바로 법제 개편 작업에 돌입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시중에 오른 최충은 한 때 도병사로 북방에 나가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그는 문종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를 하였다.
"동여진의 추장과 염한 등 86명은 자주 변방을 침범한 자들인데 지금 그들을 붙잡아 관아에 가둬둔 지 이미 여러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랑캐란 원래 사람의 외모에 짐승의 마음을 가진자들인즉 형벌로만으로는 그들의 버릇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인의로도 교화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류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제 집을 그리워하는 심경도 깊을 것이며, 이로 인해 반드시 원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비용을 들이며 굳이 그들을 잡아둘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오니 그만 돌려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최충이 이 같은 건의에 따라 동여진의 추장을 비롯한 86명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최충의 이 건의문은 그의 사상과 가치관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준다. 비록 약한 적이라고 해도 힘으로 누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그의 판단에서 아주 실리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또 인간을 형벌로만 다스리는 것은 자칫 원한을 사게 할 수 있으니 차라리 풀어주어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한편 적을 만들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 역시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자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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