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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33 : 고려의 역사 101 (제11대 문종실록 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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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33 : 고려의 역사 101 (제11대 문종실록 6)

두바퀴인생 2011. 8. 18. 02:30

 

 

한국의 역사 333 : 고려의 역사 101 (제11대 문종실록 6) 

 

 

제11대 문종실록

(1019~1083, 재위 1046년 5월~1083년 7월, 37년 2개월)

 

2. 문종의 가족들 2

 

천태종의 창시자 대각국사 의천 왕후(1055~1101년)

대각국사 왕후는 문종의 셋째 아들로 자는 의천이다. 1055년 7월에 태어났으며 11세인 때인 1065년 5월에 경덕국사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름이 송나라 철종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주로 의천이라는 자로 이름을 대신했다.

 

당시 문종은 아들 중 한 명을 출가시키기로 결심하고 아들들을 불러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누가 출가하여 부처를 공양하고 공덕을 닦겠느냐?"고 묻자, 의천이 벌떡 일어서서 자신이 출가하겠다고 대답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의천은 1065년 스승 경덕국사를 따라 영통사에 머물렀으며 , 그해 10월에 구조계를 받았다.  그는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나 짧은 시간에 화엄경을 통달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해 홀로 유학에 심취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후 대승과 소승의 경, 률, 논 삼장은 물론 유학과 역사, 제자백가들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섬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같은 높은 학문을 바탕으로 스승 경덕국사가 죽은 후에는 강의를 맡아 명성을 날렸다.

 

1067년 부왕 문종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의 직위를 받아 의천은 송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허락을 구하였다.  하지만 문종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유학의 길에 오르지 못하고 다만 송의 유명한 승려 정원법사와 편지 교류를 하였다. 그러다가 문종 사망 후인 1085년 4월 그는 모후에게 한 장의 편지만을 남긴 채 홀연히 유학길에 오른다.

 

의천이 송에 도착하여 송 황제 철종은 그를 환대하고 계성사에 머물도록 하는 한편 화엄의 대가 유성법사를 소개해 주었다. 의천은 유성과 더불어 화엄사상과 현수의 천태사상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였다. 그 뒤 상국사로 가서 운문종에 대해 배우고, 흥국사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을 만나 인도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못내 만나고 싶어했던 정원법사를 만나게 되었다.

 

정원법사를 만난 의천은 그의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기신론 등의 사상에 대하여 논하고 천태사상과 현수의 교학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또 여러 종파의 학승들과도 많은 토론을 하게 되는데, 특히 자변대사와 원소율사에게서 많은 것을 얻는다.

 

이 때 의천이 이들 학승들과 쉽게 사귈 수 있었던 것은 고려에서 가지고 간 경전들 덕분이었다. 당시 송에서는 무종의 불교 탄압과 9대에 걸친 전쟁으로 불교 관계 서적들이 거의 사라져 버린 상태였기에, 학승들은 의천이 가지고 간 지엄의 '공목장', '화엄수현기', '무성섭론소', '삼보제장문' 등과 현수의 '화엄탐현기', '기신론별기', '법계무차별론소', '십이문론소', '삼보제장문' 등과 청량의 '정원신역화엄경소', 규봉의 '화엄론관' 등에 대한 관심을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

 

의천과 중국 학승들과 토론이 지속되는 가운데 의천의 귀국을 청하는 선종의 국서가 송나라로 날아들었고, 모후 인예왕후의 간절한 염원으로 의천은 유학 1년 만에 불경 3천여 권을 싣고 고려행 배에 올랐다.

 

귀국 후 그는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를 양성했다. 또한 송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했으며, 송을 비롯하여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불교 서적 4천여 권을 수집, 흥왕사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이 때 간행된 책의 목록에는 '신편제종교총록' 3권이 편집되었다. 흔히 '의천목록'이라고 불리는 이 책에 따라 4,740권의 책이 간행되는데, 이를 <고려속장경>이라고 한다.

 

경전 간행작업을 마친 의천은 숙종 2월에 국청사가 완성되자 그곳 주지가 되었으며,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천태교학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고승이 무려 천 명이 넘었다. 의천은 이를 바탕으로 1099년 천태종을 개칭하게 되고 이로써 천태종은 명실공히 하나의 공인된 종파로 자리하게 된다.

 

원래 화엄종에 몸담았던 의천이 천태종을 개찰한 것은 천태사상의 핵심인 회삼귀일, 일심삼관의 교의가 선종과 교종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종이 도입된 신라 이후 선.교 양종은 서로 대립적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의천이 볼 때  이는 국가의 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요소로 비쳤다. 따라서 의천은 천태사상으로 선.교 양종의 화합을 이뤄 국론을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의천의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많은 타 종단 승려들이 천태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 천태종은 고려 사회에서 가장 조직력이 뛰어난 종단으로 성장하였다.

 

이 같은 종단적인 업적 이외에도 1101년 47세를 일기로 열반할 때까지 의천은 <석원사림> 250권, <대각국사문집> 23권 등 수백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으며 교웅, 징엄, 수개 등 뛰어난 고승들을 배출하여 고려의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