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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31 : 고려의 역사 99 (제11대 문종실록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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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31 : 고려의 역사 99 (제11대 문종실록 4)

두바퀴인생 2011. 8. 16. 09:59

 

 

 

 

한국의 역사 331 : 고려의 역사 99 (제11대 문종실록 4) 

 

 

제11대 문종실록

(1019~1083, 재위 1046년 5월~1083년 7월, 37년 2개월)

 

1. 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성대(계속)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신하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유학 열풍이 일어났지만 문종은 불교 발전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력을 동원하여 흥왕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절은 1055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약 13년 만에 완성되었으며 총 2천8백 칸의 규모로 대궐 크기와 비슷했다고 한다. 그는 또 여기에다 금 144근, 은 427근을 들여 금탑을 조성하기도 하고, 절 주변에 성을 쌓아 재난시에 방어벽 역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계행이 청정한 1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흥왕사는 문종 대 이후 고려 불교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숙종 대에는 흥왕사 금탑에 송나라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보관하도록 했다.

 

흥왕사 창건 이외에도 문종은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공식적으로 부활시키고 많은 불교 행사를 치렀으며, 타락한 승려들을 환속시켜 사찰을 천정도량으로 되돌리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또한 스스로도 청정한 생활을 하며 매월 세 번 이상 꼭 절을 찿아가 기도를 하면서 백성들의 불심을 자극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세 아들을 출가시키는데, 그 중의 하나인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도입되어 대대적인 선불교운동이 일어났다.

 

문종이 어렇듯 불교에 열정을 쏟은 것은 스스로 종교적인 가치관에 따른 점도 있으나 한편으론 신앙으로 민심을 사로잡고 불교를 통해 자신의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포석이 깔려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당시 대신들은 유학에 몰두하고 있었는 데 비해 일반 백성들은 불교를 숭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학의 지나친 부흥으로 대신들의 힘이 극대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민심을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불교를 융성시키는 것보다 좋은 방책은 없었다.

 

철저한 법치주의를 주장하며 법제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문종이지만, 그는 곧장 예외를 인정하고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는 포용력 있는 왕이기도 하였다. 비록 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일도 그다지 무리가 따르지 않는 한도에서는 법을 고집하지 않았고, 대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판단될 때에는 과감하게 자신의 고집을 꺽는 군주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때론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며 무서운 추진력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불교융성책과 흥왕사 창건 그리고 송나라와 국교 정상화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러한 문종의 정치적 넓이와 인격은 고려 사회를 건국 이래 최고의 황금기로 끌어올렸다. 수많은 인재와 뛰어난 신하, 그리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불교문화, 자연스럽게 퍼져간 학문에 대한 열정과 사회의 융성, 이 모든 것들은 그의 뛰어난 정치력과 폭넓은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죽음의 날은 다가왔다. 1082년 인절현비 이씨가 죽고, 이듬해 4월 이홉 전째 왕자 왕침이 죽고난 다음 실의에 빠진 문종도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5월부터 일어나지 못하다가 7월에는 태자 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생을 마감하였다. 이 때 향년 65세로 재위 37년 2개월째였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문종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쓸모없는 관원이 줄어 사업은 간편하게 되었고,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으며 창고에는 해마다 묵은 곡식이 쌓이고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때를 태평성세라고 일컬었다."

 

능은 개경 불일사 남쪽 산기슭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경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