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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29 : 고려의 역사 97 (제11대 문종실록 2)

두바퀴인생 2011. 8. 14. 11:04

 

 

한국의 역사 329 : 고려의 역사 97 (제11대 문종실록 2) 

 

 

제11대 문종실록

(1019~1083, 재위 1046년 5월~1083년 7월, 37년 2개월)

 

1. 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성대(계속)

이 같은 법률제도의 지속적인 정착과 더불어 1076년에는 양반전시과가 개정되어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완성되고, 문무백관과 노역자의 녹봉제도가 확립되었으며, 1077년에는 정치적인 안정을 목적으로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삼아 개경에 머물게 하는 '선상기인법'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실시된 일련의 법제도 확립 작업은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력을 신장시킴으로써 고려의 대외적 위상을 한층 높였다. 이에 따라 현종, 덕종,정종 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내침을 노리던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대하여 침략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고, 오랫동안 국교를 단절하고 있던 송나라와 다시금 외교관계를 재개할 수 있었다.

 

문종은 거란에 대해 외교관습 차원의 형식적인 행동을 넘어선 그 어떤 호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거란이 강제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압록강 동쪽 영토를 찿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적대시 하였다. 그러던 중 1055년 7월, 압록강 동쪽에 거란이 성을 쌓고 다리를 놓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문종은 거란에 국서를 보내 압록강을 경계선으로 하기로 한 양국 간의 과거 조약을 근거로 거란군이 압록강 돌쪽에서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거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1057년 문종은 거란에 대해 다시 항의문을 보낼 것을 명령하고, 거란이 고려의 요구에 응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내 항의하라고 다그친다. 이 때 거란은 새로운 왕이 즉위했는데, 문종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즉위 축하 사절단에 항의문을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묵묵무답으로 일관했다. 과거 같으면 고려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가했을 것이지만 고려의 국력 신장이 부담스러워 그렇게 강력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종은 정치적 이유를 떠나 선진문화에 대한 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송나라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비록 거란의 압력으로 국교는 단절되었지만 송나라 상인들의 고려 출입을 자유롭게 허락하고, 송에서 건너오는 문물을 배우는 데도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송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결심한다. 

 

 

 

 

거란, 요나라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일찍이 고구려의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되었다. 이후 거란은 중국과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에 복속되었다. 907년 야율아보기는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요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대체로 한족과 몽골족에 동화되었고,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서요는 중앙아시아쪽으로 옮겨갔다.

                         

어원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의미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 또는 한족을 나타내는 햐타드 (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3세기 이전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인(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거란의 군주

  • 대하돌라
  • 대하마회
  • 대하굴가
  • 대하아복고
  • 이굴가(李窟哥, 590년대 ~ 669년)
  • 이진충(李盡忠)
  • 손만영
  • 이해고(재위 696~698)
  • 이실활(재위 698~718)
  • 이사고
  • 이욱간
  • 이돌간
  • 엄화군왕 이소고
  • 와가한 요련굴렬
  • 북평군왕 이과절
  • 조오가한 요련조리(이부수
  • 호랄가한 요련해락
  • 소가한
  • 선질가한 요습련지
  • 소고가한
  • 야란가한 요련굴술
  • 파랄가한
  • 흔덕근가한 요련흠덕
  • 요 태조 추숭 황제
    • 요 숙조(遼肅祖) 소열황제(昭烈皇帝) 야율누리사(耶律耨里思)
    • 요 의조(遼懿祖) 장경황제(莊敬皇帝) 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
    • 요 현조(遼玄祖) 간헌황제(簡獻皇帝)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
    • 요 덕조(遼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 야율적노(耶律的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