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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28 : 고려의 역사 96 (제11대 문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328 : 고려의 역사 96 (제11대 문종실록 1)
제11대 문종
문종(文宗, 1019년~1083년)은 고려의 제11대 국왕(재위 1046년~1083년)이다.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시호는 문종강정명대장성인효대왕(文宗剛定明大章聖仁孝大王)이다. 현종(顯宗)과 원혜왕후(元惠王后) 김씨(金氏)의 셋째 아들이다.
생애
1022년 낙랑군으로 봉해졌으며, 1037년 내사령에 임명되었다. 형인 정종이 세상을 뜬 후, 왕위를 계승했다.
업적
재위 37년간 고려의 문물 제도는 크게 정비되어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 유교, 미술, 공예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괄목할 수준을 드러내 문화가 크게 발전되었다.
문종은 즉위하자마자 문하시중 최충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서산(書算)을 정리하게 함으로써 각종 법을 만드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불교를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세웠고, 태자 왕후(王煦)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니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다. 유학도 장려하여 이 무렵 최충의 9재(九齋)를 선두로 12도(十二徒)의 사학(私學)이 발달하였다. 지방에서도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리의 수가 늘었다.
국방과 외교에도 힘써 동여진(東女眞)이 북변을 침략하자 이를 토벌하여 동여진에 대한 초기의 정책은 다소 강경했으나 이후 점차 회유책을 썼고, 특히 송나라, 이슬람 등과 친선을 도모하여 교역이 융성하였다.
1056년 일본 사신이 개경을 방문하였다. 빈민 구휼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능은 개성시 장풍군에 위치한 경릉(景陵)이다.
가계
문종의 왕비는 인평왕후와 인목덕비를 제외한 나머지 왕비는 이자연의 딸들이며 특히 이복누이인 인평왕후는 왕족출신이라 다른 왕비들과 달리 원비로 책봉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부터 인주 이씨의 권력독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인평왕후 김씨(仁平王后) - 현종과 원성왕후의 딸.
- 인예왕후 이씨(仁睿王后) - 이자연의 첫째 딸.
- 순종(고려 제 12대 왕)
- 국원후(國原侯) : 선종(고려 제 13대 왕)
- 계림공(鷄林公) : 숙종(고려 제 15대 왕)
- 대각국사 의천
- 상안공(常安公)
- 도생승통(道生僧統)
- 금관후(金官侯)
- 변한후(卞韓侯)
- 낙랑후(樂浪侯)
- 총혜수좌(聰惠首座)
- 적경궁주(積慶宮主)
- 보령궁주(保寧宮主)
- 인경현비 이씨(仁敬賢妃) - 이자연의 둘째 딸.
- 조선공(朝鮮公)
- 아들: 강릉공 온 (江陵公 溫) - 의종의 비인 장경왕후, 명종의 비인 광정왕후, 신종의 비인 선정왕후의 아버지.
- 부여공(扶餘公)
- 진한공(辰韓公)
- 조선공(朝鮮公)
- 인절현비 이씨(仁節賢妃) - 이자연의 셋째 딸.
- 인목덕비 김씨(仁穆德妃)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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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문종실록
(1019~1083, 재위 1046년 5월~1083년 7월, 37년 2개월)
1. 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성대
정종시대에 마련된 안정을 기반으로 문종은 정치, 사회, 문화, 외교,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을 일궈낸다. 3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된 이러한 발전은 이른바 '고려의 황금기'를 열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고려 문화와 대외 위상은 한층 격상된다.
문종은 현종의 셋째 아들이자 원혜태후 김씨 소생으로 1019년 현종 10년 12월 계미일에 출생하엿으며 이름은 휘, 자는 촉유이다. 1022년 현종 13년에 낙랑군에 책봉되었고, 1037년 정종 3년에 내사령에 올랐다가 1046년 5월 정유일 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1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혈기 왕성한 28세였다.
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사리에도 밝아 주변의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막상 왕위에 오르자 그의 뛰어남은 한층 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즉위하자 그는 곧 스스로 검소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금은으로 장식한 용상과 담두(발디딤판)를 동과 철로 바꾸고 금은실로 된 이불과 요는 견직으로 교체하였다. 또한 환관의 수를 10여 명으로 줄이고, 내시 역시 20여 명에 한정시켰다. 그리고 변방에 공훈을 세운 자를 포상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시중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을 불러 정책 방향을 문의하며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이렇듯 정열적인 면모를 보이며 시작된 문종의 정치는 이듬해 4월 사망한 시중 최제안의 후임으로 최충을 시중에 앉히면서 본격화되어 왕총지, 이자연 등의 재상을 거치면서 무르익는다.
문종의 정치력은 일차적으로 법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통해 드러난다. 안정된 법제 확립이 사회 안정의 첯 번째 요건이라고 판단한 그는 1047년 6월에 법률가들을 불러 모아놓고 법률 중에 현실성이 결여되고 모순된 것들을 찿아내어 시정할 것을 명령하게 되는데, 이 결과 가장 먼저 형법이 대폭 정비되었으며, 2년 후인 1049년에는 정5품 이상의 고급 관료들에게 양반 신분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속이 가능한 일정한 토지의 지급을 보장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 마련되었다.
또한 재해시에 세금을 면제받는 '재면법(災免法)'과, 전답의 피해분에 대해 직접 조사를 통해 세금을 면제시키는 '담험손실법'도 맍들어졌다.
이외에도 1062년에는 죄수의 신문에는 반드시 형관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공정한 조사가 이뤄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도 생겼고, 1063년에는 국자감 학생들의 재학 연한을 제한하는 '고교법'도 생겼다. 고교법 마련에 따라 유생은 9년, 율생은 6년으로 재학 기간이 제한됨으로써 자질이 부족한 학생들이 국자감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또 1069년에는 '양전보수법'을 마련하여 결의 면적을 확정지음으로써 공평하고 원활한 세금징수가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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