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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26 : 고려의 역사 94 (제10대 정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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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26 : 고려의 역사 94 (제10대 정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8. 11. 02:43

 

 

 

한국의 역사 326 : 고려의 역사 94 (제10대 정종실록 1) 

 

제10대 정종

정종(靖宗, 1018년~1046년)은 고려 제10대 국왕(재위: 1034년~1046년)이다. 는 형(亨), 는 신조(申照), 시호정종홍효안의문경용혜대왕(靖宗弘孝安毅文敬容惠大王). 현종과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의 둘째 아들이자 덕종의 동생이다.

 

생애

서경개경팔관회를 열어 대사면령을 내림으로써 백관과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황주량, 최제안, 최충, 유지성 등을 각각 예부, 이부, 형부, 공부상서로 기용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능은 주릉(周陵)이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가계

동복형인 덕종은 왕위 계승문제로 이복 누이를 비로 맞이한 것과 달리 정종은 왕비들을 왕족이 아닌 다른 귀족가문과 혼인하여 이 때부터 근친혼에서 벗어난 것으로 알 수 있다.

  • 용신왕후 한씨(容信王后)
  • 용의왕후 한씨(容懿王后)
    • 애상군(哀殤君)
    • 낙랑후(樂浪侯)
    • 개성후(開城侯)
  • 용목왕후 이씨(容穆王后)
    • 도애공주(悼哀公主)
  • 용절덕비 김씨(容節德妃)
  • 연창궁주 노씨(延昌宮主)

 

 

 

 

 

 

제10대 정종실록

(1018~1046, 재위 1034년 9월~1046년 5월, 11년 8개월)

 

1. 정종의 실지책과 고려의 안정

정종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려 사회는 거란 침입으로 야기되었던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기를 정착시킨다. 국교를 단절하고 있던 거란과 다시 외교관계를 맺고 사회 전반에 팽배해진 위기의식을 불식시키는 한편, 사회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일련의 안정책을 단행하게 되는 것이다.

 

정종은 현종의 차남이자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101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형, 자는 신조이다.  5세 때 내사령과 평양군에 책봉되었고 1034년 9월 19세의 어린 나이로 임종에 직면한 친형 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0대 왕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서경과 개경에 팔관회를 열고 대사면령을 내려 백관과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황주량, 최제안, 최충, 유지성 등을 각각 예부, 이부, 형부, 공부상서로 기용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또한 온건파인 황보유의를 내사문하평장사로 임명하여 거란과의 화의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평북 창성에 성을 쌓아 주민을 이주시키고 덕종 대에 시작된 천리장성 축조에 박차를 가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이에 대해 거란에서는 통첩을 보내 장성 축조를 중지할 것과 국교를 정상화 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자국의 국방을 위해 성을 쌓는 것은 당연하며, 거란에 억류된 고려 사신들을 돌려보내고 거란이 무력으로 차지한 압록강 지역을 돌려주면 자연스럽게 국교는 정상화 될 것이라고 논박하였다. 

 

이처럼 고려가 타협책과 강경책을 동시에 구사하자 거란은 압록강에 수군을 보내 고려에 대한 무력시위를 감행한다. 하지만 이것이 먹혀들지 않자 결국 화의책으로 억류 중인 사신들을 돌려보냄으로써 1038년 4월 양국의 외교관계는 정상화 된다. 이에 따라 고려는 상서좌승 김원충을 거란에 파견하고 그해 8월부터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이로써 거란과 고려의 대치관계는 일단락되고, 이후부터 거란이 멸망하는 13세기까지 양국 간의 평화가 지속되었다.

 

평화기가 시작되었지만 고려는 장성 축조작업을 중단하지 않았고, 1044년 마침내 압록앙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한다.

 

천리장성의 완성으로 고려는 거란, 여진 등의 북방족의 내침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방어선과 전초기지를 마련하였고, 또한 북방문화에 의한 고려 풍속 침해를 막아낼 수 있는 문화 방비벽 역활을 하게 되었다.

 

이 같은 국방력의 증대는 고려 사회를 외침에 대한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내부기강 확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039년에 노비종모법을 제정하고, 1045년에는 악공과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1046년에는 장자상속법을 마련하는 등 정종은 변방의 안정을 바탕으로 일련의 사회 안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하지만 정종의 치세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너무 어려서 왕위에 올라 기력을 쇠진한 탓에 몸이 병약해졌고, 나약한 몸으로 정사에 몰두하다가 1046년 초에 결국 중병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리고 그해 5월 이복동생 낙랑군 휘에게 선위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재위 11년 8개월 만이었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정종의 치세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고 있다.

"거란은 탐욕스럽고 사나워서 신의를 맺을 상대가 아니므로 태조가 이것을 깊이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란이 발해를 배신했다는 이유 때문에 국교를 단절한 것은 잘한 일은 아니었다. 현종은 국사를 바로잡기에 급급하여 외교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고, 덕종은 나이가 어렸으니 전쟁을 조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왕가도가 거란과의 화친을 끓자고 주장하였으니 이것은 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백성을 안심시키는 황보유의의 의견보다도 못하였다.

 

정종은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우리측 대부 최연가를 거란에 파견하였고, 4년에 거란측 사신 마보업이 우리 나라에 왔다. 이 때부터 옛날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여 그들을 감동시켰으니, 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책략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정종이 선대 왕의 유업을 계승하여 국가를 보전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종의 능은 개경 북쪽 교외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주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