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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24 : 고려의 역사 92 (제9대 덕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324 : 고려의 역사 92 (제9대 덕종실록 1)
제9대 덕종
덕종(德宗, 1016년~1034년)은 고려 제9대 국왕(재위: 1031년~1034년)이다. 휘는 흠(欽), 자는 원량(元良), 시호는 덕종선효강명광장경강대왕(德宗宣孝康明廣章敬康大王). 현종과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의 첫째 아들이다.
생애
덕종은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이 압록강에 가설한 부교(浮橋) 및 보성(保城)을 파괴할 것과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요 흥종이 이를 거부하자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또한 국경 지대인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파천(派川)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8월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압록강에서 영원(永遠)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까지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東汝眞人)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하고,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로, 황주량을 수국사(修國史)로 삼아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능은 숙릉(肅陵)이나 현재위치는 알 수 없으며 개성 북쪽 교외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계
덕종은 3명의 비를 두었는데 경목현비를 제외한 두명은 현종의 딸이자 그의 이복누이다.
- 경성왕후 김씨(敬成王后) - 현종과 원순숙비 김씨(元順淑妃)의 딸.
- 경목현비 왕씨(敬穆賢妃) - 왕가도의 딸. 원질귀비의 여동생.
- 상회공주(殤懷公主)
- 효사왕후 김씨(孝思王后) - 현종과 원혜왕후 김씨의 딸.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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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덕종실록
(1016~1034, 재위 1031년 5월~1034년 9월, 3년 4개월)
1. 덕종의 짧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덕치(德治)
현종 후기의 안정은 덕종 대에도 이어진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이은 덕종은 나이답지 않은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명민한 정치를 펼쳐나가지만 병약한 탓에 왕위에 오른지 3년여 만에 생을 마감했다.
덕종은 현종의 장남으로 제3비 원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1016년 현종 7년 5월 을사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흠, 자는 원량이다. 1020년 5세의 나이로 연경군에 책봉되었다가 어린 나이로 고려 제9대 왕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그는 면저 선대 왕들에게 즉위를 고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죄다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또한 각지방에서 진상된 말을 대신들에게 나눠줌으로써 화합정치를 표방하였다.
즉위 2개월 뒤에는 유소를 중군 병마원수로 삼고 장극맹을 병부상서로, 홍빈을 형부상서로, 이유섬을 공부상서로, 김종현을 우간의대부로, 황보영을 어사잡단으로, 문사명을 전중어사로, 손위를 전중승으로, 박의부를 감찰어사로 임명하는 등 백관들을 전폭 교체했다.
조정의 백관이 안정되자 덕종은 거란에 유교와 김행공을 파견하여 압록강에 설치한 다리를 철거하고 억류한 고려 신하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거란은 이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고려는 거란에 대해 사절단 파견을 중지하고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거란은 고려의 사절단이 중지되자, 1032년 정월에 사신을 보내려 하였으나 고려의 거부로 입국하지 못했다. 고려는 압록강 다리를 철거하고 억류 중인 신하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하겠다며 삭주 영인지(영흥)과 파천에 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했다.
한편 1032년 3월에 거란의 정국 혼란으로 고선오, 고진성, 최윤부, 이윤형 등 20명에 달하는 중앙관료 출신들이 고려로 망명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거란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그해 4월에 다시거란 관료 출신 해가, 내을고 등 27명이 귀순해오자 이들도 받아들였으며, 6월에는 거란에 머무르던 우응, 약기 등이 발해인 50여 명을 거느리고 망명해 옴에 따라 이들도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거란 관료들의 망명을 적극 받아들였다.
이처럼 덕종은 현종과 마찬가지로 거란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정권다툼으로 밀려난 거란인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정국을 진단하고 내부 사정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입장이 이처럼 강경하게 나오자 1033년 10월 거란은 정주를 침략하여 군사적인 압력을 행사하려 하였으나 고려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군사적으로 도발하지를 못하였다.
현종대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외침 속에서 국력을 한층 신장시킨 고려는 덕종 대에는 군사적으로 강성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성종 대 이후 꾸준히 성장한 과거 출신 신진관료들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안정의 기반이 되었다.
정치.외교 이외에 덕종은 교육 분야에서도 새로운 전환을 모색한다. 즉위 년인 1031년 윤10월 처음으로 국자감에 시험제도를 도입하여 국자감을 명실상부한 고려 제일의 교육기관으로 부상시켰던 것이다.
국자감에 입학시험을 설정했다는것은 성종 재에 추진되던 지방교육기관 육성계획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 이전에는 단순히 힘 있는 집안 자제들이 형식적으로 거쳐가던 국자감에 실험제도를 도입하여 인재를 실력에 따라 뽑을 수 있게 되었다.
즉위 초에 이렇듯 고려의 안정을 위해 몇가지 주목할 시도를 하긴 했으나 덕종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1034년 9월 갑작스럽게 약해진 몸을 유지하지 못하고 병석에 누운 그는 아우 평양군 형에게 선위하고 19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재현은 <고려사>에서 덕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덕종은 부모 상을 당하여서는 자식으로 효를 다하였고,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아버지가 하던 일을 그르치지 않았으며 원로들인 서눌, 왕가도, 최충, 황주량, 등을 신임하여 조정에서는 사로 기만하는 일이 없었다. 이 덕분에 백성들은 편안한 삶을 누렸으니 비록 봉황이 날아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시호에 덕자를 붙인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로다."
덕종의 능은 개경 북쪽 교외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숙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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