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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22 : 고려의 역사 90 (제8대 현종실록 10) 본문
한국의 역사 322 : 고려의 역사 90 (제8대 현종실록 10)
제8대 현종실록
(992~1031, 재위 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6. 고려 최초의 실록 '칠대실록' 편찬 과정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사초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에 따라 현종은 사료를 복원하기 위해 황주량에게 명령하여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을 편찬하도록 했다. 이것이 고려 최초의 실록인 '칠대실록'이다.
어명을 받은 황주량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료를 수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실적 근거가 없는 내용은 나이 먹은 노인들에게 물어서 보충하였다.
자료 수집 작업에 완료되자 1013년 9월 황주량은 최충, 윤징고, 주저 등과 함께 수찬관에 임명되어 실록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1년 후인 1034년(덕종 3년) 총 36권으로 편찬이 완료되었다.
'칠대실록' 편찬 이후 고려는 각 왕대마다 실록을 편찬하는 전통이 생겼다. 실록 편찬 방식은 처음엔 사관인 수찬관이 직접 편찬하는 당나라 방식을 택하다가 인종 대에 편찬된 제16대 '예종실록' 이후에는 실록 편수관을 따로 두는 송나라 방식을 택하게 된다.
이렇게 편찬된 '고려실록'은 이자겸의 난 때에 불에 탈 뻔하기도 하고, 원나라 침입 때는 원에 빼앗기기도 하였으나 가까스로 보존되어 조선 초에는 태조에서 공양왕에 이르는 고려 34대 왕의 실록이 모두 편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진왜란 때 춘추관이 불타면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려실록이 있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현종 실록 편찬에 관한 사항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실려 있는 '최충의 찬'에 인용된 사실을 감안할 때 현종실록은 최충 등에 의해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최충이 수국사로 재직하였던 1037년에서 1055년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황주량
고려 초기 문신. 본관은 황주(黃州)로 짐작된다.
1004년(목종 7)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013년(현종 4) 수찬관(修撰官)이 되어 역대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어사중승(御史中丞)·호부상서(戶部尙書)·정당문학(政堂文學)·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를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
1043년(정종 9)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의 호를 받아 수태보(守太保) 겸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지위에 올랐다. 또한 학문적 재질이 뛰어나 3차례나 지공거(知貢擧)를 맡기도 하였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추증되고, 정종묘정(靖宗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경문(景文).
최충
최충(崔沖, 984년~1068년)은 고려의 문신(文臣) 겸 학자이다. 본관은 해주로 그 시조 최온(崔溫)의 아들이다.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005년(목종 8)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현종 때 습유보궐·한림학사·간의대부 등을 지내고, 덕종 초에 우산기상시·동지 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형부 상서·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정종(靖宗) 때 상서좌복야·참지정사·판서북로 병마사·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와 같이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고 1013년 국사수찬관으로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변방에 병마사로도 나갔다.
1047년 문종의 즉위와 함께 문하시중으로 도병마사가 되었고, 대흉년을 만난 서북(西北) 지방 백성이 부역에 시달리는 것을 금지케 했으며, 동여진(東女眞)의 변경 침입에 대해 강경책을 쓰도록 주장하여 시행되었다.
1053년(문종 7) 중서령(中書令)으로 퇴관한 후로는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학도들이 운집해 오자 1055년 송악산 밑에 사숙(私塾)을 세우고 유학을 강의했으니 바로 구재학당으로 후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린다. 구재학당에서는 우수한 제자를 많이 배출했으며, 이후 다른 유학자들이 이를 본받아 사학을 개설하고 문헌공도를 포함하여 12공도라 하였다.
평가
그는 한국의 교육을 진흥시켜 당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리었다. 사후(死後) 정종의 사당에 함께 모셨다가 그 후에 선종의 사당에 함께 배향(配享)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일컬음을 받았으며, 당시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했다.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그의 작품이라고 하는 시조 2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 등에 전함.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일(白日)은 서산(西山)에 지고, 황하(黃河)는 동해(東海)로 들고, 고래(古來) 영웅은 북망(北邙)으로 든닷 말가. 두워라 물유성쇠(物有盛衰)니 한(恨)할 줄이 잇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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