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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19 : 고려의 역사 87 (제8대 현종실록 7)

두바퀴인생 2011. 8. 4. 09:45

 

 

 

한국의 역사 319 : 고려의 역사 87 (제8대 현종실록 7)

 

 

제8대 현종실록

(992~1031, 재위 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3. 고려 -거란 전쟁(계속)

 

거란의 2차 침입과 불굴의 용장 양규(1)

993년 80만 대군으로 제1차 침입을 시도하다 서희와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난 거란은 17년 후인 1010년과 25년 후인 1018년 다시금 2, 3차 침입을 단행했다.

 

거란의 침입 구실은 목종 폐립사건이었다. 거란에게 목종 폐립사건의 내막을 알려준 것은 동여진이었다. 여진은 당시 동서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서여진은 고려와 가까웠던 반면 동여진은 관계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1010년 초에 좌사랑중 하공진이 동여진을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보복으로 유종이 조공차 회주관에 온 여진인 95명을 죽여버렸다. 그러자 동여진 측은 거란왕에게 달려가 목종 폐립사건의 내막을 고변하게 되었고, 한편 고려 조정은 사건의 책임을 물어 하공진과 유종을 귀양보냈다.

 

여진으로부터 목종이 강조에 의해 강제로 폐립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거란왕은 그해 5월 고려 조정에 강조를 거란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1월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입이다.

 

거란의 침입이 예상되자 현종은 강조를 해영도통사로 삼고, 상장군 안소광을 도병사로, 소부감 최현민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 박충숙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를 통군사로 각각 임명하여 군사 30만을 보내 통주(평북 선천)에 주둔시켜 거란군을 방어하도록 했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제일 먼저 진출한 곳은 흥화진(평북 의주)이었다. 40만 대군으로 흥화진이 포위되자 흥화진 도순검사 양규가 낭중 정성과 부사 장작 등과 함께 방비책을 세우고 성을 고수한다.

 

성의 방비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 거란 성종은 부하를 시켜 화살로 고려군 측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그대들의 전 임금 왕송이 우리 나라를 섬긴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왕을 죽이고 어린 아이를 왕위에 올렸으므로 내가 정예부대를 인솔하고 이미 국경을 넘었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붙잡아 내게로 끌고 오면 즉시 회군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처자들을 몰살할 것이다."

 

이 편지를 받아본 고려군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답장을 하였고, 거란왕이 재차 편지를 보내 항복을 종용하였지만 고려군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왕은 전면전을 선언하고 병력 20만을 안주 남쪽의 무대로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은 강조가 머물고 있는 통주로 향했다.

 

거란의 20만 군대가 통주에 진출하자, 강조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그들과 대응하였다. 강조는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제1군은 강조의 통제하애 삼수의 요소에 배치하고, 제2군은 통주 근방 산에, 제3군은 통주성에 진을 쳤다.

 

거란군은 몇 번에 걸쳐 강조가 지휘하고 있는 삼수의 고려군을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신무기 검차를 이용한 선방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강조는 지형적인 잇점을 이용하여 거란군이 밀려오면 검차를 앞세우고 적을 공략하였다. 이 같은 고려군의 검차전략으로 거란은 더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해야 했다. 그래서 거란은 야음을 틈타 기습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야율분노가 이끄는 별동부대로 하여금 고려군의 본영이 있는 삼수를 급습하게 하였다.

 

몇 번에 걸쳐 승전을 거듭하던 강조는 자만심에 빠져 적군의 습격에 관한 보고를 받았으나 군사를 보내지 않았고, 오히려 적을 삼수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여 물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거란군이 고려군 본영을 급습하자 고려군은 당황한 나머지 우왕좌왕했고, 그 틈을 이용해 거란의 대군이 앞쪽으로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고려군은 대열이 무너지면서 거란군에 포위되었고, 결국 강조는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거란왕 앞에 끌려간 강조는 거란왕이 자신의 신하가 되길 맹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강조는 "고려 사람으로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 행영도통부사 이현운이 "두 눈으로 이미 새 세월을 보았거늘 어찌 일편담심 옛 산천만을 생각할 수 있으랴." 하면서 거란의 신하가 되길 자청했다. 이에 강조는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그 따위 말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그 소리를 들은 거란왕은 강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삼수채 전투

당시 거란은 남경통군도감을 다시 설치했고(994.3) 송의 화친 요구를 거철하면서 5여 년에 걸쳐 전쟁 준비를 했다. 거란 성종은 송에 대한 정벌을 단행(999.9~1000.1), 큰 성과를 거두었다. 거란이 송에 본격적인 공세를 펼친것은 1004년이다.

 

'전연의 맹'으로 송을 굴복시키고 송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다음해에 거란은 고려,여진,송과 통하는 길목인 압록강 하구의 보주 지역에 각장을 설치하여(1005) 고려 공략을 준비했다.

 

한편 이 시기 고려에서는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옹립한 정변이 일어났다(1009). 1010년에는 고려의 동계 지역의 한 장수가 화주에서 동여진인 95명을 몰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동여진을 통해 강조의 정변이 거란 성종에게 고변되어 알려졌다. 이에 거란 성종은 송을 굴복시킨 자만심에 대역을 범한 강조에 대한 징벌로 고려 원정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동여진은 거란 성종이 고려 정벌을 천명하자 좋은 말 만 필을 바치면서 고려 침공에 동참하게 된다.

 

거란의 2차 원정군의 규모는 약 40만 명이었다. 고려도 30만 명의 군사를 이끌로 통주에 주둔하게 한다. 이로써 고려는 평시의 주진군과 방수군 10만 명을 합하여 약 40만 명에 가까운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게 된다.

 

2차전시 거란군은 강동 6주인 흥화진, 통주, 곽주 등에서 고려군과 싸우게 된다. 통주와 곽주 길목은 횡적인 능선과 하천, 애로 지역 또는 고개를 동시에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대의 기동력을 어렵게 한다.

 

평주와 개경에 이르는 긴 구간의 협곡이 있어 기동이 어렵다. 이중 예성강에서 개경 사이의 협곡은 200~300m의 고지 사이에 위치하며 좌우 능선이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능선이고, 협곡 중간에 300m 이상의 고개가 있었다.

 

흥화진 전투는 11월 17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흥화진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거란 성종은 11월 23일 배후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무로대 일대에 20만 명을 잔류시키고 흥화진을 우회하여 통주방향으로 진출했다.

 

11월 18일 별도의 거란군이 귀주 인근까지 진출하게 된다. 고려측에서는 통주에서 출병한 최사위 등이 거란군과 싸웠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북계 동로를 이용한 거란군의 남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동로을 이용한 거란군의 진출은 저지 된것으로 보인다.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전개되는 '통주전투'는 '삼수채 전투'와 '통주성 전투'로 구분된다.

 

삼수채 전투는 통주성 밖에서 이루어진 전투로 흥화진에서 남진한 거란군과 고려의 강조군이 청강의 3개 지류가 합쳐지는 합수목 일대에서 치루어졌다.

 

11월 25일에 강조의 고려군은 통주성을 나와 삼수채 지역에서 하천과 산을 이용하여 진을 배치했다. 한 부대는 강조의 인솔 아래 3개의 하천 지류가 모이는 통주 서쪽에 주둔토록 했고, 또 한 부대는 근처의 산에, 나머지 한 부대는 성을 등지고 진을 쳤다. 강조는 검차를 이용하여 수차례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전투를 결정적인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 초반의 우세에 자만한 강조가 전장에서 장기를 두는 등 거란군을 한꺼번에 유인.몰살하겠다며 더 많은 거란군이 몰려올 때까지 기다리라면서 부하 장수들의 보고에 부분적인 공격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거란군은 정면 공격으로는 성과가 없자 야간 기습을 감행하기로 하고 야율분노로 하여금 강조가 있는 고려군 본영을 기습하기로 하였다. 어둠이 깔린 심야에 은밀히 접근한 거란군이 일시에 고려군 본영을 기습하였다. 자만심에 빠져 있던 강조에게 부하 장수들이 거란군의 야습을 보고해도 부대를 내보내지도 않았고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런 거란군의 내습을 받은 고려군 진영은 대혼란에 빠졌다. 결국은 본영이 무너지면서  거란의 야율분노는 고려군 총사령관 강조를 생포하고 고려군 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

 

 

고려군의 신무기 검차

 

수레의 전면에 설치된 방패에 검을 꽂아 만든 무기.

 

 


차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제작 운용되었다. 검차는 고려 현종 1년(1010)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개발되어 큰 효과를 보았다.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군의 공격로상에 검차를 배치하여 기병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거란군은 하루에 10여 차례씩 공격을 퍼부었지만 다수의 사상자만 내면서 패배하게 되었다. 그 구조와 형태는 《풍천유향》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길이가 2.7m(9척) 되는 두 개의 나무로 수레 채를 만들고, 앞뒤에는 나무를 가로대고 축을 받게 하여 외줄의 두 바퀴를 달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았다. 그리고 두 수레 채 중간 부분에 각각 바퀴 하나씩을 달아 속에 넣어 두었는데, 수레를 끌고 갈 때에는 두 개의 바퀴만을 사용하고, 수레를 멈추고 있을 때에는 속에 넣어두었던 두 바퀴를 내려 네 바퀴를 이용하여 고정시켰다. 수레 맨 앞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이중으로 꽂아 놓았고, 짐승의 얼굴 모양을 한 세 겹의 방패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검차 1대에는 25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포수 2명과 대장 2명은 대포수를 겸하여 대포를 장진하고 발사하는 것을 전적으로 책임졌다. 검차의 양 옆에는 병사를 각각 10명씩 배치하여 한결같이 원앙진법에 따라 검차의 수레를 끼고 싸우게 하였다.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무기는 1번과 2번은 방패와 요도, 3번과 4번은 창과 활, 5·6·7·8번은 조총과 요도, 9번과 10번에게는 화전과 당파를 주었으며, 검차의 총책임자인 차정 1명이 수레 뒤에서 좌우로 독전하였다. 검차는 평지에서 4명의 병력이 밀고 갈 수 있으며, 할지라도 6명이면 가능했다. 검차의 전면에는 짐승의 얼굴을 한 모양의 방패를 세 겹으로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막도록 하였으며, 외면에는 귀면문을 그려 넣어 적의 말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옆에서 대포를 발사하여 연기와 화염이 나오도록 하며, 따로 구멍을 뚫어 적의 상황을 탐지하게 하였다. 또한, 검차 앞과 위에는 길고 아래는 짧은 칼을 꽂아 적의 병력과 군마를 막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