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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21 : 고려의 역사 89 (제8대 현종실록 9)

두바퀴인생 2011. 8. 6. 02:35

 

 

한국의 역사 321 : 고려의 역사 89 (제8대 현종실록 9) 

제8대 현종실록

(992~1031, 재위 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3. 고려 -거란 전쟁(계속)

 

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맹활약

 

거란은 2차 침입에서 회군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걸었다. 첯 번째는 고려 국왕의 거란 입조이며, 두 번째는 강동 6주의 반환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왕이 와병 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란에 입조하지 않고 대신 형부시랑 진공지를 보냈다. 또한 강동 6주 반환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차지하겠다고 공식 천명하고 압박을 가하는 한편, 야율행평과 이송무를 잇따라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014년 소적렬을 보내 통주를 침략했다가 흥화진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하지만 거란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이듬해 정월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 옆에 고려 침략을 위해 성을 구축했다. 이에 고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였으나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흥화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 장군 고적여, 조익 등에 의해 격퇴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에 걸쳐 다시 통주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여진이 거란을 도와 배 20척을 이끌고 구두포를 침략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실패하여 퇴각해야 했다.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은 1015년 4월 다시 야윯애평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려도 강하게 반발하여 야율행평을 억류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그해 9월 다시 이송무를 보내 같은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는 냉담했다.

 

거란과 전면전을 예상한 고려는 우선 거란의 후방 병력을 묶어 놓기 위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언질을 준다.

 

마침내 거란 성종은 1016년 야율세량과 소굴렬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하였고, 이들이 침략하였으나 고려군 저항에 밀려 퇴각하자 이듬해 소합탁을 보내 다시금 침입을 감행했으며,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제3차 침략을 해왔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했다. 고려군 상원수는 서경 유수이며 평장사인 강감찬이 맡았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나가 쇠가죽으로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으로 하여금 흩어지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흥화진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소배압은 무모하게도 개경을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이에 부원수 강민첨이 뒤를 추격하여 자주(평난 자산)의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고,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이 남하해온 거란군을 대동강 근방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섬멸하였다.

 

아렇듯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입성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이듬해 정월에는 자신의 직할대를 이끌고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했다.

 

 이 때 강감찬은 이미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도성으로 돌아가 방어하도록 해둔 상태였다. 또한 소배압이 무모할 정도로 빠르게 개경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성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하라고 명령하여  초토화작전을 전개했다.

 

이 때문에 막상 개경 근처까지 도착한 소배압의 병력은 탈진한 상태에서 고려군의 저항, 후방의 불안 등으로 개성 공략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거란군이 회군하려는 기색을 탐지한 강감찬은 곳곳에 아군을 매복하여 급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 구주(귀주)에서 소배압의 거란군과 강감찬의 고려군이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양 진영이 팽팽히 맞선 채 대등한 형세를 이뤘지만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더구나 그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였는데,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고려군이 맹렬히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섬멸시켰다.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적장 소배압을 포함하여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중국 중원 대륙까지 점령하고 송나라로부터 '전연의 맹'까지 받아냈던 요나라인 거란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패배였으며,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거란으로 돌아간 소배압은 분노한 거란왕으로부터 중징계를 받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흔히 '구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을 이끈 인물은 강감찬 장군이었다. 그의 조상은 경주로부터 금주(시흥)으로 이주해와 금주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산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며,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강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그는 성종 대에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문인이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등을 역입하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 서경유수 겸 내문하사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구주대첨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그는 전란 이후에는 개경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으며,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몇 번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여 현종의 허락을 받아 쉬기도 하였으며, 1030년에는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2년 후인 1032년에 고려 역사와 한민족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