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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18 : 고려의 역사 86 (제8대 현종실록 6) 본문
한국의 역사 318 : 고려의 역사 86 (제8대 현종실록 6)
3. 고려-거란 전쟁(계속)
제3차 고려-거란 전쟁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고려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귀주대첩
강감찬은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전쟁 결과
1019년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으며, 이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을 하지 않게 되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송-요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한편 고려도 서북지역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하기도 힘들어졌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과 개경 수비를 위해 나성을 쌓는다.
한편,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맹활약
거란은 2차 침입에서 회군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 걸었다. 첯 번째는 고려 국왕의 거란 입조이며, 두 번째는 강동 6주의 반환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왕이 와병 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란에 입조하지 않고 대신 형부시랑 진공지를 보냈다. 또한 강동 6주 반환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차지하겠다고 공식 천명하여 압박을 가하는 한편, 야율행평과 이송무를 잇따라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014년 소적렬을 보내 통주를 침략했다가 흥화진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하지만 거란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이듬해 정월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 옆에 고려 침략을 위한 성을 구축했다. 이에 고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였으나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흥화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 장군 고적여, 조익 등에 의해 격퇴당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에 걸쳐 다시 통주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여진이 거란을 도와 배 20척을 이끌고 구두포를 침략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실패하여 퇴각해야 했다.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은 1015년 4월에 다시 야율행평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려도 강하게 반발하여 야율행평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그해 9월 다시 이송무를 보내 같은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여전히 냉담했다.
거란과 전면전을 예상한 고려는 우선 거란의 후방 병력을 묶어 놓기 위해서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언질을 준다.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6년 야율세량과 소굴렬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하고, 이들이 고려군의 저항에 밀려 퇴각하자 이듬해에 소합탁을 보내 다시금 침입을 감행했으며,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략을 해왔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하였으며 상원수 평장사 강감찬이 지휘를 맡았다.
강감찬은 군대를 이끌고 흥화진으로 나아가 쇠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가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북병으로 하여금 흩어지는 거란군을 공격케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흥화진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소배압은 무모하게도 개경을 향해 계속 남쪽으로 진군했다. 이에 부원수 강민첨이 뒤를 추격하여 자주(평남 자산)의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고,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이 남하해온 거란군을 대동강 근방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섬멸했다.
이렇듯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입성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이듬해 정월 그는 자신의 직할대를 이끌고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했다.
이 때 강감찬은 이미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고 도성으로 돌아가 방어토록 해둔 상태였다. 또한 소배압이 무모할 정도로 빠르게 개경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성밖의 백성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막상 개경 밖에 도착한 소배압의 병력은 탈진한 상태에서 개경 공략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거란군이 회군하려는 기색이 보이자 강감찬은 곳곳에 고려군을 매복시켜 급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 구주에서 소배압의 거란군과 강감찬의 고려군이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양 진영이 팽팽히 맞선 채 대등한 형세를 이뤘지만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더구나 그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였고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고려군은 맹렬히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섬멸했다.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적장 소배압을 비롯해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니, 거란 역사상 가장 비참한 패배였다. 또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거란으로 돌아간 소배압은 분노한 거란왕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흔히 '구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을 이끈 인물은 강감찬이었다. 그는 경주로부터 금주(시흥)으로 이주해와 금주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상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며,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그는성종 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인이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신기상시, 중추사 등을 역임하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의 서경유수 겸 내사문하사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구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준 그는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으며,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몇 번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여 현종의 허락을 받아내 쉬기도 하였으며, 1030년에는 다시 현종의 부름을 받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1032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강감찬
강감찬(姜邯贊, 948년 ~ 1031년)은 고려의 문신이다.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고, 본관은 금주(衿州) 또는 진주, 어릴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금주(지금의 낙성대)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강감찬(姜邯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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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년 ~ 1031년 | |
![]() 낙성대공원에 있는 강감찬 동상 | |
별명 | 은천(아명), 인헌(시호) |
태어난 곳 | 서울시 낙성대 |
복무 | 고려 |
최종 계급 | 문하시중(門下侍中), 수태사 겸 중서령 (守太師兼中書令) |
주요 참전 | 구주대첩 |
기타 이력 | 추충협모 안국공신 |
생애
강감찬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의 아들로 금주에서 고려 제3대 정종 948년 11월 19일에 태어났다. 성종 때인 983년 갑과에 장원 급제하고 예부시랑이 되었다.
요나라의 1차 침입
993년 요나라(거란)의 성종이 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친선 관계를 차단할 목적으로 소손녕(蕭遜寧)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서희(徐熙)의 활약으로 물러가게 되었고, 고려는 서희의 담판의 결과로 강동 6주를 획득할 수 있었다.
요나라의 2차 침입
1010년(현종 1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40만 군으로 서경(西京)을 침공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여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 하공진(河拱辰)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갔다. 요가 돌아가던 중 양규(楊規)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를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이듬해인 1011년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 등을 지내고,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하였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로 보인다.
요나라의 3차 침입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 행영 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구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구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에 봉해져 식읍 5백 호를 받은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에 봉해지고, 식읍 1천 호를 받았다.
사후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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