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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16 : 고려의 역사 84 (제8대 현종실록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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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16 : 고려의 역사 84 (제8대 현종실록 4)

두바퀴인생 2011. 8. 1. 02:06

 

 

 

 

한국의 역사 316 : 고려의 역사 84 (제8대 현종실록 4)

 

 

제8대 현종실록

(992~1031, 재위 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2.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 신장(계속)

 

그러는 와중에 또 여진족이 침입하여 고려는 또다시 전운에 휩싸였다. 동여진의 여진족 군대가 전함 1백여 척을 이끌고 경주를 급습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란에 익숙해 있던 고려군이 강력하게 저항하여 여진은 곧 격퇴되었다. 고려는 여진을 압박하여 침략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012년 5월에도 동여진이 다시 경상도 일대에 침범하였지만 문연, 강민첨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처럼 거란, 동여진 등의 주변국과 잇따른 전쟁을 겪으면서 고려는 국방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고, 한편으로 전쟁에 따른 피해 복구를 위해 거란과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란왕은 고려왕이 직접 고란을 예방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강동의 6개 성을 탈취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고려는 몇 번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여 거란왕을 달래며 현종이 와병 중이라 거란에 입조하지 못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1013년 5월 여진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오다가 대장군 김승위가 이끄는 군대에 패하여 퇴각하였다.

 

이후에도 거란은 몇 번이나 강동의 여섯 성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고려 침략을 감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소손녕의 형)이 이끄는 거란군 10만이 다시 침략을 감행해왔다.

 

거란의 대군이 밀려올것을 예상한 고려는 20만 병력으로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거란군에 대적케 했다. 흥화진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의 일차접전이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하였다. 하지만 거란군의 일부가 개경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강민첨이 별동대 병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하지만 소배압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어느듯 개경 백 리 밖까지 진주해오자 고려군과 거란군 사이에 일대 접전이 불가피해졌다. 이 때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주력부대가 거란군 후방을 교란하며 압박을 가해오자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소배압은 병참과 퇴로가 우려되어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퇴각하던 거란군은 구주(귀주)에서 강감찬의 고려군에게 거의 몰살당하고 말았다. 1019년 2월 초하루날 벌어진 이 전투가 유명한 '구주(귀주)대첩'이다.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외곽에 성곽을 축조하고 거란군에 의해 훼손된 강동 6성과 각 지방의 성곽을 정비하여 국방에 만전을 기하였다. 또한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과거제를 활성화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인재를 우대하고 문인을 양성하여 국가의 재목들을 길렀다.

 

한편 거란왕은 전쟁에서 대패한 소배압을 징계하고, 1019년 5월에 동경 문적원소감 오장공을 보내 고려에 화친을 제의해 왔다. 또한 동여진 추장 나사불도 같은 해 6월 부하들을 이끌고 입조하여 화의를 약조하였으며, 서여진의 추장 아리불도 7월에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말을 바치며 화의를 다짐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고려는 탐라, 흑수, 말갈 등의 소수민족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위용을 과시하며 변방의 안정을 되찿아갔다.

 

사회가 안정되자 현종은 전란 중에 소실된 문화재와 서적들을 복구하기 시작하였고, 황주량을  하여금 사초를 복원하도록 명하여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는 한편, 황룡사를 비롯한 사찰을 증수하였고, 6천여 권의 대장경을 펀찬토록 하였다. 이 때 편찬된 실록이 고려 최초의 실록이며, 또한 이 때 편찬된 대장경이 후에 원나라 침입 중에 만들어지는 팔만대장경의 모태가 된다.

 

이 같은 현종 대의 국력 강황에 힘입어 고려는 13세기까지 거란, 여진 등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현종은 비록  많은 수난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고려의 위상을 대외에 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무 많은 고초를 겪은 탓인지 1031년 5월 재위 22년 만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현종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나라를 잘 다스릴 때에도 환난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아야 하며,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시종일관 삼가는 마음을 늦추지 않도록함으로써 천도를 받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나는 현종에게 아무런 흠집도 찿을 수가 없구나."

 

현종의 능은 송악산 기슭에 있으며 능호는 선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