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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15 : 고려의 역사 83 (제8대 현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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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15 : 고려의 역사 83 (제8대 현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7. 31. 02:06

 

 

 

한국의 역사 315 : 고려의 역사 83 (제8대 현종실록 3)

 

 

제8대 현종실록

(992~1031, 재위 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2.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 신장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란의 침입으로 몽진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미 수난에 이골이 난 그는 계속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종 대 이후 과거로 등용된 인재들과 함께 고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고려는 성종 이후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은 992년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 안종 왕욱과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사별하고 성종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으며, 1003년 목종 6년에 12세의 나이로 대량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009년 2월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위되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 곧 교방(음악을 가르치던 곳)을 혁파하고 목종 대에 늘어난 궁녀 1백여 명을 해방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유윤부를 문하시중으로 삼고, 유방현을 평장사로, 강조를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진적을 형부상서로, 채충순을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로, 김려를 병부상서로, 문인위를 공부상서로 각각 임명하여 조정을 일신하였으며, 연등회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는 한편, 동북 변방으로 이주시켰던 남도 출신 양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민심을 진작시키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현종은 즉위 초부터 전란에 휩쓸려 고초를 겪어야 했다. 거란이 목종의 폐위를 구실 삼아 고려를 침략하였기 때문이다.

 

여진족의 고변으로 목종 폐립의 내막알 알게 된 거란은 1010년 7월 급사중 양병과 대장군 나율윤을 파견하여 목종 살해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이에 따라 진적과 윤여를 거란에 파견하여 목종 폐립사건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거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란과 고려 양국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병력 30만으로 하여금 통주(평북 선천)에 진출시켜 거란군을 대적케 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마침내 거란은 왕이 직접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해 왔다.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은 먼저 고려군 전초 기지인 흥화진을 포위하고 도순검사 양규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종용하면서 목종을 죽인 강조를 거란에 압송하면 회군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거부하자 거란군과 고려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거란군 40만 중 20만은 인주 남쪽 무대로에 주둔하고 나머지 20만이 통주로 밀려들었다. 이에 통주에 주둔하고 있던 강조가 병력을 이끌고 응전하였지만 자만심에 빠져 적을 가벼이 보고 평지 전투로 승부를 내려고 진영을 갖추고 검차를 앞세워 수차례 접전을 벌여 승리를 하자 자만심에 빠져 거란군을 유인하여 몰살을 시키겠다며 적의 동향을 가벼이 보고 대비를 소홀히 한 결과 고려군 본영에 대해 야습을 감행한 거란군의 전술에 말려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거란왕 앞에 끌려가 항복을 권유받고 신하되기를 거부하다가 죽었다. 거란군은 고려군 수장이 포로로 잡히자 사기가 충천하여 그 여세를 몰아 남하하였고, 이 때부터 전면전이 전개되었으나 수장을 잃은 고려군은 지휘부가 흔들리면서 혼란에 빠졌고 제대로 응전도 못하고 밀리기만 했다. 

 

고려는 거란의 대군을 맞아 반격을 개시했지만 역부족으로 한 달만에 곽주와 서경을 내주고 거듭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거란군은 개경까지 밀어닥쳐 궁궐이 소각되고,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 이 때 현종은 이미 개경을 빠져 나와 경기도 광주에 머물러 있다가, 거란군이 계속 남하해 옴에 따라 장곡과 인의(전북 태인)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어 남해안의 나주로 피신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병참선의 신장과 전선 후방에서 양규 등 고려군의 압박으로 입성 7일 만에 개경에서 물러났으며, 다시 점차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고려군과 전면전에서 이미 기진맥진하였고 후방에서 고려 장수 양규와 김숙흥이 이끌던 1천여 명의 병력과 7차에 걸친 싸움끝에 수만의 군사를 잃은 상태였다. 애석하게도 전투 중에 양규와 김숙흥은 전사하였지만 그들의 끈질긴 게릴라식 공략으로 거란군은 더 이상 고려에 머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거란군이 퇴각하자 현종은 전주, 공주 등을 거쳐 2월 중순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왕성에 도착한 현종은 백관을 다시 세우고, 전란 중에 공을 세운 자를 포상하고 거란에게 협조한 자를 징계하였으며, 백성들 중에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직을 추증하는 등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전란 중에 소실된 궁성을 복구하고 서경의 황성(평양성)과 송악성을 중수하도록 했다.

 

 

 

요나라

(遼, 916년 - 1125년), 거란국(契丹國) 또는 카라 키탄(Kara Khitan)은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요'는 중국식 국호이고 '카라 키탄'은 대거란이라는 의미로,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킨 명칭이다. '키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요나라는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경(燕京)과 이전의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와 상경 임황부, 개봉 등의 수도가 있었다.

 

역사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2대 황제인 태종 때에는 주로 중국 경략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936년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946년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일대 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현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하였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에 들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宋)을 공격하여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요나라는 동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나라(金)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당했다.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망해가던 이때 요나라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하지만 120년 만에(금나라와 비슷하게) 징기즈칸에 의해 멸망한다.)

 

통치 구조

요나라는 점령지의 중국인과 발해인 등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중 지배 체제를 만들어냈다. 중국인과 발해인 지역을 통치하는 남면관에서는 당(唐)식의 군현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북면관에서는 내륙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을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렸다.

 

거란족 지배자들은 중국인 고문을 두고 중국식 행정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족적 주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 부족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를 쓰지 않고 거란 문자를 고안해냈다.

 

역대 황제

요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요 숙조
(遼肅祖)
(요 태조 추숭)
소열황제
(昭烈皇帝)

야율누리사

(耶律耨里思)

- -
- 요 의조
(遼懿祖)
(요 태조 추숭)
장경황제
(莊敬皇帝)
야율살랄덕
(耶律薩剌德)
- -
- 요 현조
(遼玄祖)
(요 태조 추숭)
간헌황제
(簡獻皇帝)
야율균덕식
(耶律勻德寔)
- -
- 요 덕조
(遼德祖)
(요 태조 추숭)
선간황제
(宣簡皇帝)
야율적노
(耶律的魯)
- -
제1대 요 태조
(遼太祖)
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야율아보기
(耶律阿保機)

신책(神冊) 916년 ~ 922년

천찬(天贊) 922년 ~ 926년
천현(天顯) 926년

916년 ~ 926년
제2대 요 태종
(遼太宗)
효무혜문황제
(孝武惠文皇帝)
야율덕광(耶律德光) 천현(天顯) 927년 ~ 938년
회동(會同) 938년 ~ 947년
대동(大同) 947년
926년 ~ 947년
- 요 의종
(遼義宗)
(요 세종 추숭)
문헌흠의황제
(文獻欽義皇帝)
야율배(耶律倍) - -
- - 장숙황제
(章肅皇帝)
(요 목종 추숭)
야율이호(耶律李胡) - -
제3대 요 세종
(遼世宗)
효화장헌황제
(孝和莊憲皇帝)
야율원(耶律阮) 천록(天祿) 947년 ~ 951년 947년 ~ 951년
임시 - 익무황제
(翼武皇帝)
야율찰할(耶律察割) - 951년
제4대 요 목종
(遼穆宗)
효안경정황제
(孝安敬正皇帝)
야율경(耶律璟) 응력(應曆) 951년 ~ 969년 951년 ~ 969년
제5대 요 경종
(遼景宗)
효성강정황제
(孝成康靖皇帝)
야율현(耶律賢) 보녕(保寧) 969년 ~ 979년
건형(乾亨) 979년 ~ 982년
969년 ~ 982년
제6대 요 성종
(遼聖宗)
문무대효선황제
(文武大孝宣皇帝)
야율융서(耶律隆緖) 통화(統和) 983년 ~ 1012년
개태(開泰) 1012년 ~ 1021년
태평(太平) 1021년 ~ 1031년
982년 ~ 1031년
제7대 요 흥종
(遼興宗)
신성효장황제
(神聖孝章皇帝)
야율종진(耶律宗眞) 경복(景福) 1031년 ~ 1032년
중희(重熙) 1032년 ~ 1055년
1031년 ~ 1055년
제8대 요 도종
(遼道宗)
인성대효문황제
(仁聖大孝文皇帝)
야율홍기(耶律洪基) 청녕(淸寧) 1055년 ~ 1064년
함옹(咸雍) 1065년 ~ 1074년
대강(大康) 1075년 ~ 1084년
대안(大安) 1085년 ~ 1094년
수창(壽昌) 1095년 ~ 1101년
1055년 ~ 1101년
- 요 순종
(遼順宗)
(요 천조제 추숭)
대효순성황제
(大孝順聖皇帝)
야율준(耶律濬) - -
제9대 - 천조황제
(天祚皇帝)
야율연희(耶律延禧) 건통(乾統) 1101년 ~ 1110년
천경(天慶) 1111년 ~ 1120년
보대(保大) 1121년 ~ 1125년
1101년 ~ 11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