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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14 : 고려의 역사 82 (제8대 현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314 : 고려의 역사 82 (제8대 현종실록 2)
제8대 현종실록
(992~1031, 재위 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1. 불륜의 씨앗 왕순의 파란만장한 삶과 즉위 과정(계속)
왕순은 당시 이미 대량원군에 봉해져 있었다. 자식을 낳지 못한 목종이 1003년에 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종이 자식없이 죽는다면 그가 왕위를 이을 것은 기정사실화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를 노리고 있던 헌애왕후는 억지로 왕순이 머리를 깍게 하고 개성의 숭교사로 출가시켜버렸다. 그리고 1006년 왕순은 다시 양주로 내쫓겨 삼각산의 신혈사에 머물러야 했다.
이 때부터 헌애왕후는 누차에 걸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신혈사의 노승이 방 안에 굴을 파고 그 위에 침대를 놓는 방법으로 그를 숨겨주었기 대문에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목종이 병으로 눕게 되자 헌애왕후는 왕순을 죽이기 위해 더욱 혈안이 되었다. 자객을 보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접 심복을 시켜 독이 든 술과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왕순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몇 번에 걸쳐 목종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편지는 유행간에 의해 곧잘 중간에서 사라진곤 하였다. 하지만 대량원군을 차기 왕으로 앉혀야 된다고 생각하던 유충정이 그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함으로써 다행히 위기 상황을 전할 수 있었다.
목종은 이 때 이미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간파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우복야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유충정을 통해서 전해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충주부사로 있단 채충순을 은밀히 불러 왕순의 편지를 보여주며 한시바삐 신혈사로 가서 그를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가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인위를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왕의 부름을 받은 강조는 왕의 명령이 헌애왕후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서경을 떠날 때 강조는 목종이 이미 김치양 일파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도 평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온 상태라 이미 반역으로 몰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처지였고 선택의 길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는 내처 궁궐을 향해 말을 달렸다.
강조의 군대는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했다. 궁궐을 장악하자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강조는 거부했다. 그리고 목종을 폐위시켜 양국공으로 낮추고, 대량원군 왕순을 데려와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제8대 왕 현종이다.
강조
강조(康兆, 974년 ~ 1010년)는 고려 목종과 고려 현종 때의 장수이다. 황해도 태생으로, 신천지방의 호족 출신이며 본관은 신천 강씨(信川 康氏)이다. 태조 왕건의 22번째 부인인 신주원 부인 강씨의 친정 일족이었다.
목종을 폐하고 대량원군 순을 세우는 과정에서 거란족이 침공하여 직접 전선으로 나가 맞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적에게 포로로 끌려가 사형당한다.
생애
강조는 974년 황해도 신천에서 호족인 강장자 가문 사람인 강태주(康泰周)의 아들로 태어났다. 강태주는 고려 태조 왕건의 먼 외척으로 강호경과 강충, 강보전의 후손이었으나 가계가 불분명하다.
강조가 태어날 무렵 그의 일족 중에서도 왕비가 나왔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의 먼 외척이기도 한 신천의 호족 강기주(康起珠)의 딸을 22번째 부인인 신주원부인(信州原夫人)으로 삼았다. 강조는 신주원 부인의 친정 일족이었다.
고려 제6대 왕인 성종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고 목종(穆宗 : 경종의 아들)이 왕이 되자, 이때 왕의 나이가 18세임에도 불구하고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게 됨에 따라 외척이 다시 등장했다. 앞서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켜 유배되었던 김치양(金致陽)도 다시 불려와 중용되었다. 김치양은 마음대로 정치를 하면서 1003년(목종 6년)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한편 목종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중추사 우상시 겸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개경의 궁궐을 수비케 하였다. 이때 세간(世間)에서는 목종이 위독한 틈에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풍문이 돌았다.
이에 목종은 대량원군 순(大良院君詢 : 현종)을 후계자로 삼고, 궁궐 수비를 위해 서북면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에게 돌아와 지키도록 했다. 이때 세간에서는 왕이 위독하여 이 틈에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하여 인심이 매우 흉흉했다. 이윽고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오던 도중,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도 평산)에서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한때 주저했으나 부하 장수들과 회의한 뒤 개경(開京)으로 가 목종을 퇴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김치양(金致陽) 부자를 죽이고 태후와 그 무리들을 귀양보냈으며, 양국공(讓國公)으로 폐했던 목종을 죽였다. 이어 왕실의 부패를 척결하고 새로이 관제개혁을 실시하여 국왕의 측근 보좌기구인 은대(銀臺)와 중추(中樞) 남북원(南北院)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했다. 이때 중대사(中臺使)에 올랐으며, 1009년(현종 즉위)에는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어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
강조의 정변 이후 1010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황제 성종(야율융서)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강조는 통주(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30만의 군사로 거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사로 잡혔다.
장수 이현운(李玄雲)과 함께 포로가 되어 잡혔다. 거란의 황제 성종은 자신의 신하가 되라고 권유했으나 이현운만 응하고 강조는 응하지 않았다. 강조는 끝까지 권유를 거절하다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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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방영된 KBS 역사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강조는 천추태후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느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계승하기 위해 대량원군을 살해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거나 노골적으로 왕위 계승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모든 악역을 김치양이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천추태후를 위대한 여걸로 만들기 위한 역사 조작극이었다.
강조는 반정이 성공한 후 목종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열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의 그러한 권유를 거부했다. 그런면에서 강조는 진정으로 고려 왕실의 안위를 걱정했던 사람이며 서경에서 조정이 돌아가는 모양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종이 부르자 그 서신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이미 목종을 살해하고 서신을 조작하여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고 바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며, 그것은 바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난정을 바로잡기 위한 일종의 쿠테타적인 성격의 반정을 일으킨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 이어서 강조의 난을 핑계로 거란군이 침공하였을 때 반정으로 실권을 장악한 강조가 직접 전선으로 나갔다는 것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광군 30만으로 대적하던 고려가 수하 장수도 많앗을 것인데, 굳이 강조 자신이 전선으로 나갔고 또 거란군을 맞아 산성전투가 아닌 평지전투를 선택했다는 점, 전투를 앞두고 태평스럽게 바둑을 두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고려군의 수장이 거란군과 초전에 대규모 전투를 벌이다 어이없이 쉽게 포로로 잡혔다는 점 등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처럼 강조는 천추태후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스스로 자책감을 갖고 실의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니면 현종이 강조를 제거하기 위한 거란과 내면적인 밀약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록의 기록을 모두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내면적인 부분은 기술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실록이 이해하기가 힘든 점도 이러한 모호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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