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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28 : 중국, 역사의 트라우마(외상, 스트레스)

두바퀴인생 2011. 7. 27. 09:54

 

 

 

 

우면산의 여름 28 : 중국, 역사의 트라우마(외상, 스트레스)

 

 

                                                                                       폭우가 내리는 서울 고속터미널 근방

 

 

밤새 잠을 설쳤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 소리에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서울도 300밀리미터가 넘는 비가 내렸고 다른 곳은 400~5900밀리미터 이상 내렸다고 한다.  춘천에서는 자원봉사활동을 하던 36명의 인하대 동아리 대학생들이 야영장에서 잠을 자다가 산사태로 여러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도 여러 명이 생명이 위독하다고 한다. 아직도 6~8며 정도가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서울 - 춘천간 고속도로가 비로 여러 곳에 도로가 침수되어 통행이 전면 차단되었고, 지하철 1호선 오류동역 철로가 침수되면서 전동차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도로 상황은 잠수교와 동부간선도로도 침수로 전면 통제되고 있다고 한다. 한강 고수부지는 대부분 침수되었고 안양천에 주차되어 있던 여러 대의 차량이 침수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은 지난번 장마로 벽체 전선의 침수되어 노출로 배관을 다시하였고 지금은 사용에 문제는 없는 듯하다. 그런데 천둥 소리가 계속들리니 언제 벼락이 떨어져 변압기를 고장낼지는 알 수가 없다. 비는 내일까지 계속 내린다고 한다. 지난번 산사태, 침수 등 엄청난 피해에 이어 이번  폭우로 침수, 산사태, 익사, 실종, 교통사고 등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와 아까운 생명이 희생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모처럼 휴가를 떠난 사람들은 빗속에서 휴가를 보내야 할 것이고 이런 폭우 속에서 이동하다가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들 누구에게나 행복은 천천히 다가오지만 불행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찿아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난과 재해를 당한 국민들에게 정부나 정치인들이 얼마나 가슴아프게 생각하는지, 복구 지원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고통당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치유해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모두가 내년 총선과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줄을 서기 위해 갖가지 묘안을 생각하면서 머리를 싸메고 있을 것이다. 옛날 성군들은 백성들이 재난과 재해로 고초를 당하면 궁중에는 음주가무를 중지하고 초막에 들어가 초목근피로 백성들의 고통을 같이 나누었다고 한다. 과연 이 시대에 지금 그런 지도자나 정치인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자신이 스스로 이 나라 지도층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따라 이 나라의 앞날은 명암이 갈릴 것이다.

 

 

                                                                   비가 개인 후 새벽 반포 아파트

 

우리의 역사에서 중국은 가장 큰 영향력을 준 나라이다. 그들에게 복속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들의 힘 앞에 스스로 신하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들을 불러들여 상대국을 멸망시켰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감힘을 쏟았다. 왕이 즉위할때마다 책봉사를 요청하였고 그들의 승인을 받아야 마음을 놓았다. 후연, 수, 당나라처럼 중국 땅에 강력한 통일 정권이 들어서면 여김없이 한반도를 쳐들어 왔으며 고구려는 그래도 끝까지 버텼으나 결국에는 내분으로 당나라에게 멸망당했다.

 

그들 사신들은 황제 대접을 받았고 조선에 사신으로 오는 것이 경쟁이 치열하였으며 부자가 되는 길로 생각할 정도였다. 고려는 거란에는 그래도 대등한 위치였으나 원나라에게는 9번의 침략을 받고 결국 원의 속국이 되었다. 수많은 사신들이 조선을 들락거렸고 그들은 손을 벌려 금은보화를 요구하였음은 물론 수많은 공녀들이 원으로 끌려갔다. 그녀들은 성노리개로 치욕스런 삶을 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소리없이 사라져갔다. 그래서 원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일부는 원나라를 등에 업고 왕을 위협하며 위세를 부리던 간신배들이 들끓었다. 원나라가 원하면 왕도 갈아치우는 시대였으니, 오늘날 미국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밀 공작으로 반정부군을 지원하여 그 나라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다국적 기업이 갖가지 방법으로 국민들의 고혈을 다 빨아먹고 튀어도 아무런 항의도 못하는 약소국 신세는 고려가 원의 속국시대나 마찬가지다.

 

조선의 무능한 왕 인조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왕으로 옹립된 사람으로 왕권이 하약하여 치세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으며 국제정세에도 눈이 어두워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결과 정묘.병자호란  등 후금의 침공을 두 번이나 받았고, 결국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가 송파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포로들이 끌려갔고 노예로 전락했으며 발목이 짤린 병신이가 되었다. 끌려간 부녀자들은 성노리개로 치욕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그녀들은 환향녀로 돌아와봐야 가족과 사회의 멸시와 냉대로 목숨을 끓거나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삼학사가 불모로 끌려갔으며 명.청전쟁을 눈으로 직접 보았고 서양인 신부 아담-샬을 만나 서양문물에 눈을 뜬 소현세자가 오랜 볼모 생활에서 돌아오자 인조는 자신의 왕위가 세자에게 빼았낄까봐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고 세자비 강씨에게는 사약을 내렸으며 아들 셋은 유배를 보내 둘은 죽였다. 우리의 역사에서 적에게 항복한 유일무일한 왕이었다. 

 

조선의 선조는 의심이 많고 변덕이 심하였으며 어리석은 임금이었다. 조선은 유교사회로 공리공론으로 허상을 앞세운 부패하고 무능한 양반사회였다. 그러다 당한 임진.정유재란 등 7년 동안 왜눔과 명나라 군대에게 조선은 이리저리 다 뜯기고 빼앗기며 전국토는 유린되었고 백성들은 수도없이 희생되었다. 충신 열사들은 별똥별처럼 잠깐 빛을 발하다가 이슬처럼 죽음을 당하여 사라져갔고  간신배들만 살아남았다. 명나라 군대의 오만과 수탈은 극에 달하였고 조선의 임금은 그들의 부하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이나 중국 모두가 우리들의 역사에서는 지우고 싶은 역사의 트라우마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 그것을 자초하였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우리 현실도 아직 그 트라우마를 벗어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중국, 역사의 트라우마(외상, 스트레스)

 

“천빙더(陳炳德·진병덕) 중국군 총참모장이 우리 김관진 국방부 장관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10여 분간 미국을 비난하는 외교적 결례를 했다지요. 저는 그 뉴스를 듣고, 역사학자로서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청 태조)가 명(明)에 선전포고를 할 무렵 조선에 보낸 편지들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강의였다. 나는 지난 18일 저녁 역사전문 출판사 '푸른역사'의 부설기관 '푸른역사 아카데미'가 마련한 역사 특강 첫 시간에 참석했다. 미리 예고된 주제('G2 시대에 다시 읽는 조선시대의 국제관계')와 강사(한명기 명지대 교수) 이름을 보고 강의에 탐을 냈다. 적지 않은 참가료까지 지불했기에 모두 4번의 강의에서 꼭 본전(?)을 뽑으리라 작심하고 있었다.

 후금은 1618년 명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전후해 조선을 '너'라고 호칭하는 국서를 보내는가 하면 명과의 전쟁에 조선은 끼지 말라고 종용한다. 조선은 난처한 와중에 그나마 광해군의 현명한 실리외교로 버틴다. 그러나 인조대에 들어 힘도 없는 주제에 후금을 거스르다 정묘호란(1627년)을 당하고, 이어 병자호란(1636년)이라는 훨씬 참혹한 재앙을 맞는다. 인조는 한겨울에 남한산성을 나와 청의 홍타이지에게 큰절 세 번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 한바탕 승자들의 파티가 끝나고 홍타이지가 갖옷을 선물로 내리자 인조는 다시 “감사합니다”라며 두 번 무릎 꿇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린다(삼전도 굴욕). 왕이 이럴 정도니 일반 백성의 참상은 말할 것도 없다. 청에 끌려간 포로만도 최대 50만 명. 도망치다 잡혀 발꿈치를 잘린 포로도 부지기수였다. 청에 끌려가 성(性)노리개로 전락한 조선 여인들은 만주인 본처로부터 끓는 물 세례까지 받았다. 어렵게 고국에 돌아와서는 '화냥년(還鄕女)'이라는 욕설의 원조가 되어야 했다. 그 이전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군대의 행패는 또 어땠던가. 백성들은 명군의 가혹한 수탈을 빗대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고 했다.

 한명기 교수는 “새로운 강국이 기존 패권국에 도전할 때 한반도에는 거의 예외 없이 위기가 닥쳐왔다”고 분석했다. 중국 대륙의 원·명 교체기, 16세기 일본의 굴기(<5D1B>起), 명·청 교체기, 근대의 청·일 국력 역전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왜란·호란에서 국망(國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비극은 모두 기존 패권국과 신흥강국 사이에서 '관계'에 실패할 때 찾아왔다고 했다. 중국이 미국에 '맞짱'을 뜨기 시작한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행운 덕분에 우리가 못 겪어서 그렇지 조상들에게는 중국발(發) 수모가 거의 일상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오만과 무례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중국 사신을 황감하게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게 불과 115년 전이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온갖 위세를 부린 것도 그즈음이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시대의 임진왜란 참전을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른다. 419년 뒤에 일어난 6·25 전쟁 참전은 '항미원조(抗美援朝)'다. 당연한 일이지만, 철저하게 자국 위주로 역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예 나라를 통째로 빼앗아간 일본에 대한 강렬한 반감과 냉전 시기 죽(竹)의 장막 탓에 중국이라는 수퍼파워를 그나마 잊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제 그런 예외적인 시대는 끝이 났다. 중국·미국 사이에서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조상들의 비극이 형태를 달리해 찾아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어느 쪽이든 미국만을 상수(常數)로 삼아 국가 진로를 모색하던 시대는 저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천빙더 총참모장이 김관진 장관에게 보인 '결례'는 앞으로 결례 축에도 들지 않을지 모른다. 한명기 교수도 강의를 마무리하며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우리는 상당히 골치 아픈 시간들을 앞두고 있다고 봅니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