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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11 : 고려의 역사 79 (제7대 목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311 : 고려의 역사 79 (제7대 목종실록 2)
제7대 목종실록
(980~1009, 재위 997년 10월~1009년 2월, 11년 4개월)
1. 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계속)
유행간은 힘이 강해지면서 유충정이라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목종에게 소개해주었다. 발해 출신인 유충정 역시 외모가 미려하고 신체가 뛰어난 덕택으로 목종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조정은 점차 유행간과 유충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항상 목종 곁에서 왕명을 핑계하여 인사를 좌지우지하였으며, 때로는 자신들이 마치 왕인 것처럼 많은 궁인을 거느리고 다니기도 하였다.
조정이 이처럼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1004년 그동안 김치양과 놀아나던 헌애왕후는 아들을 출산했다. 이 때부터 김치양과 헌애왕후는 자신들의 아들을 차기 왕으로 앉히기 위해서 온갖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뿐이었다. 헌애왕후의 친동생인 헌정왕후는 정종이 죽은 후에 시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귀양보낸다. 그 후 헌정왕후는 혼자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 의해 대궐에서 양육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다.
헌애왕후는 자신의 이종 조카인 대량원을 없애면 김치양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세자로 책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대량원군을 강제로 머리를 깎여 숭교사로 출가시킨 뒤 다시 양주로 내쫓아 삼각산 신혈사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누차에 걸쳐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량원군은 주지승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왕위를 노린 음모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목종은 병을 얻고 말았다. 원래부터 겁이 많았던 그는 1009년 봄에 숭교사를 다녀오다가 폭풍을 만난 다음부터 마음이 더욱 약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연등회 도중에 기름창고에서 불이나 천추전이 불타고, 궁궐의 일부와 창고마저 소실되자 슬픔에 잠겨 정사를 돌보지 않고 드러누웠다.
목종이 병으로 눕자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왕 곁에는 항상 유행간과 유충정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으며, 그들의 측근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왕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병으로 누운 목종은 좀처럼 편전에 나가지 않았으며, 만나기를 청하는 신하가 있어도 결코 만나주지 않았다. 따라서 유행간과 유충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모두 왕명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러는 사이 목종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는 스스로 임종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한시바삐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갖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 왕순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왕순에게 선위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종은 은밀히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황보유의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또한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서북면 순검부사로 파견하고 동시에 서경 도순검사 강조를 불러들였다.
김치양
김치양(金致陽, ?~1009년)은 고려 때의 권신이다. 본관은 동주(洞州)이며,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외족(外族)이다.
성격이 간교하여 승려를 사칭하고 천추궁(千秋宮)에 드나들며 추문이 있어 성종이 멀리 장배(杖配)하였다. 목종이 즉위한 후 천추태후(千秋太后)에 이어 우복야 겸 삼사사에 이르러 전횡했다. 천추태후와 불의의 아들을 낳고 그를 책봉하고자 대량군 왕순(大良君 王詢)을 살해할 모의를 하다가 실패하였으며, 다시 유일한 혈통인 목종을 해하려다가 성공치 못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개경 근처의 사찰에 자신의 부하들을 승려로 위장하여 숨긴 뒤 그들을 사찰 안에서 병력으로 키워서 거병하기도 했다.
강조의 정변으로 왕순(고려 현종)이 즉위하자 김치양은 그의 아들과 함께 처형되고, 그의 일당과 천추태후의 친척 이주정(李周禎) 등은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강조는 목종과 천추태후를 충주로 내쫓아 도중에 목종을 죽였고, 이에 천추태후는 황주(黃州)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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